3-26 올레의 해석

8코스 (월평아왜낭목쉼터 → 대평포구, 19.6km) 4

by 커피소년

되돌아보면 두 번의 기회가 있었다. 색달해수욕장으로 가기 위해서는. 그러려면 파란 화살표를 거슬러야 했다. 요트 계류장에서 올라 처음 만난 화살표에서 반대 방향으로 가야 했다. 또 주차장을 거쳐 ‘카페오션’으로 가는 나무 데크 길 입구에서도 화살표를 무시하고 옆길로 내려가야 했다. 아마 카카오맵을 봤다면 분명 그렇게 했을 것이다. 오다 그치기를 반복한 비 때문에 그러지 못했다. 그런 상태에서 번번이 핸드폰을 꺼내 확인하는 것은 번거로운 일이었다. 그래서 화살표에 의지했다. 글을 쓰기 위해 사진을 확인하다 첫 번째 화살표에서는 반대로 갈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해수욕장으로 가려면 ‘더 리프’라는 카페를 지나야 하는데 그곳에서 출입을 금지한 것 같았다. 사진에서 화살표 뒤에 있는 A 보드에 ‘무단 이용 시 입장료를 부과될 수 있습니다’라고 적혀 있었다. 그래도 ‘카페오션’으로 가는 나무 데크 길 입구에서는 해수욕장으로 가는 화살표도 있어야 했다. 어떤 이유가 있었겠지만.

Screenshot_20251225_085157_Photo Editor.jpg
20250521_165156.jpg
<좌 : 빨간 선을 따라 가야했다. 노란 선을 따라 갔다 / 우 : 화살표 뒤로 무단 출입 금지를 알리는 A보드가 서있다>


색달해수욕장. 색달, 이름이 참 곱다고 생각했다. 아마 이름에서 빛깔과 달이 연상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한자를 보면 달라진다. 색달(塞達)의 한자 의미는 ‘막히다(塞)’와 ‘닿다(達)’이다. 막힌 곳에 도달한 것일까? 도달하니 막힌 곳일까? 의미상으론 이름의 느낌과 다르게 답답함이 느껴졌다. 색달은 옛 이름인 ‘막은다리’ 또는 ‘막은골’에서 왔다. ‘막은’은 ‘막히다’이고 ‘다리’는 제주어로 ‘언덕’이란 의미이니 색달은 결국 내(川/색다릿내)를 막거나 둘러싸고 생긴 언덕이란 뜻이다. 바다를 향했던 포토존의 풍경이 떠오르면서 언덕이란 단어에서 답답함은 사라졌다. 절벽이라는 의미인 카페 ‘더 클리프’도 색달이 스며있었다.

20250521_165957.jpg
20250521_170004.jpg
<절벽을 연상시키는 색달의 풍경과 색달 해수욕장>

호텔 사이의 도로를 따라갔다. 특이한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하얀 건물이었는데 옥상에 애니메이션에서 나올만한 괴물 캐릭터가 둥그런 눈과 커다란 입을 벌리고 있었다. 1층에 스타벅스가 영업하고 있는 건물을 찬찬히 보았다. 갈퀴가 있는 손이 통 하나를 쥐고 있고, 측면에 GRlMM FOREST라고 쓰여있었다. 그래서 알게 되었다. 그 형상은 그림 형제의 동화, ‘공주와 개구리 왕자’에 나오는 개구리 왕자를 모티브로 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몇 년 전에 이 건물에 '그림의 숲'이라는 이름의 스토리텔링 미디어아트 전시회가 열렸다고 한다. 이것과 건물은 연관이 있는 것 같았다.

20250521_171014.jpg


길은 중문골프장의 테두리를 따라 크게 돌아갔다. 관광지를 알리듯 번잡스럽게 차들이 지나갔다. 그리고 어느 순간 차들이 사라졌다. 공간은 한적해지고 초록의 작은 평지가 나왔다. 평지 끝에 하얀 말들이 여유롭게 풀을 뜯고 있었다. 생각해 보니 이번 올레길에서 처음 본 말이었다. 잠시 보는 여유를 잘라버리고 걸음을 재촉했다. 길은 도로에서 갈라져 옆으로 빠졌다. 대왕수천예래생태공원을 지나 대왕수천을 길게 따라갔다. 그 긴 길에서 한 사람도 보지 못했다. 마치 내가 걷는 동안 모든 사람이 증발해버려서 세상에 나 혼자만 있는 느낌이었다. 비가 오고 있어 습기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공간은 무언가로 가득 채워져 있어 무거웠다. 혼자라는 느낌이, 고독이라는 느낌이 때론 주변 공기를 이렇게 바꿔놓은 건 아닐까?, 영화 ‘나는 전설이다’에서 혼자 남은 윌 스미스가 느낀 외로움도 이런 것일 수도 있겠다, 생각했다. 이런 내 느낌을 비웃듯 청둥오리 한 쌍이 내 앞을 걷고 있었다.

20250521_173515.jpg
20250521_173616.jpg
20250521_174916.jpg
20250521_175111.jpg
20250521_175836.jpg
20250521_180204.jpg
<대왕수천예래생태공원과 대왕수천를 지나는 길>


대왕수천이 바다에 다다를 때쯤 왼쪽에 폐건물들이 보였다. 짓다 만 건물들이었다. 빗물에 젖은 콘크리트가 그대로 드러났다. 부끄러움도 모르는 뻔뻔한 나체의 건물이었다. 베란다의 철제 난간은 녹이 슬어 낡아가고 있었다. 천변 풍경엔 너무 어울리지 않았다. 무분별한 개발의 나쁜 사례 같았다.

20250521_180620.jpg
20250521_180744.jpg


드디어 길은 바다에 닿았다. 18시 10분이었다. 어두워지기 전에 도착할 수 있을까? 바다를 보았다. 왠지 밝아진 느낌이었다. 잿빛 구름은 어느새 하얀색으로 변해있었다. 또한 바다의 하늘을 덮었던 구름은 수평선 부근에서 돌돌 말려 두꺼워지면서 하늘은 조금 가벼워졌다. 태양의 빛은 가벼워진 구름에 스며들어 엷게 빛났다. 그 빛에 마음을 의지하며 걸었다. 내가 대평포구에 도착할 때까지 그 빛이 꺼지지 않길 바랐다.

20250521_180853.jpg
20250521_180859.jpg
<드디어 바다에 닿았다>

조금 걸으니 ‘논짓물’을 알리는 간세가 보였다. ‘논짓물’은 제주어로‘그냥 버리는 물’이라는 뜻이다. 왜냐하면 한라산에서 흘러 내려온 용천수가 해안과 너무 가까운 곳에서 솟아난 까닭에 농업용수나 식수로 사용할 수 없어, 버리는 물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지금은 둑을 막아서 풀장과 샤워장으로 사용하고 있다. 비가 와서인지 노란 테이프로 출입 금지 시킨 곳이 풀장 같았다. 그 옆에 공원 같은 넓은 공간이 나왔다. 공원 입구에 있는, 이곳이 예래동이라는 것을 알리는 ‘예래논짓물’ 글자를 지나쳤다.

20250521_180929.jpg
20250521_181049.jpg
20250521_181225.jpg
20250521_181825.jpg
<논짓물>

바로 하예환해장성 안내판이 나타났다. 그런데 환해장성 뒤로 하얀 건물들이 나타났다. 영업용 주택인지 개인 소유 주택인지는 모르지만, 환해장성을 담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것이 가능한 일일까? 분명 문화재 훼손 및 접촉을 금지한다고 했는데. 안타까웠다. 환해장성이 끊긴 부근의 도로에 감귤 색, 보라색, 빨간색의 앙증맞은 의자들이 바다를 보고 앉아있었다.

20250521_182038.jpg
20250521_182120.jpg
20250521_182345.jpg
20250521_182210.jpg
<하예환해장성>

의자가 가리키는 바다를 보았다. 수평선 부근엔 환해장성처럼 거대한 흰 장막이 펼쳐졌다. 수평선에 이르지 못한 구름은 몽글몽글 뭉쳐 여러 형상들을 내보였다. 그러면서 하늘이 조금씩 열리기 시작했다. 기분 탓인지 모르지만, 바다도 하늘을 닮아 시나브로 잿빛에서 벗어나고 있었다. 파도는 해안가에 닿아 긴 하얀 띠를 이루며 조용히 사라졌다.

20250521_182307.jpg


걸었다. 언덕에 있는 영화 ‘마녀’를 촬영했다는 ‘마녀의 언덕 카페’와 그 바로 밑에 있는 올레 8코스 길에 있다고 ‘PALGIL(팔길)’이라는 이름 지은 카페 근처에서 고양이들이 나를 또렷이 쳐다보고 있었다. 반가웠다. 내가 다가가도 도망가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지나쳤다. 길의 나무 난간이 나무들로 바뀌고 민틋한 언덕에서 길은 옆으로 빠졌다. ‘진황등대탐방로’였다. 전망대에서 온 길을 봤다. 바로 앞에 바다로 나온 곳이 고양이들이 날 맞아주었던 곳이다. 바다 쪽에 하얀 등대가 있었지만 가지 않고 파란 화살표가 가리키는 길로 걸었다. 나무 데크로 내려가는 길이었다. 중문 방파제였고 예래 포구였다. 포구의 시작인 곳에서 젊은 남자 3명이 포구로 뛰어들려고 준비하고 있었다. 잠시 후 다이빙했다. 땀에 젖은 나도 저렇게 뛰어들고 싶다는 강렬한 욕구가 솟았다. 그들이 뛰어든 포구를 보니 깊이를 알 수는 없었으나 천연 수영장이었다. 중문방파제가 있어 바다로 떠밀려 나갈 일은 없을 것 같았다.

20250521_182735.jpg
20250521_182938.jpg
20250521_182758.jpg
20250521_183630.jpg
20250521_184022.jpg
20250521_184032.jpg
20250521_184155.jpg
20250521_184145.jpg
20250521_184242.jpg
20250521_184306.jpg
20250521_184437.jpg
20250521_184632.jpg
<중문방파제와 예래포구에 이르는 길>

포구의 끝에 있는, ‘팥 나무(폿+낭)’를 의미하는 ‘포시낭 코지’라는 카페를 지나 사람 없는 긴 도로를 걸었다. 걷는 나의 상태를 암시하는 ‘MUNGWUJU멍우주’라는 카페도 지났다. 멍하게 걸었지만 멍한 상태를 헤치고 들어온 생각 하나가 있었다. 지치고 힘드니 자연스럽게 스멀스멀 올라온, 자조적인 생각이었다. 왜 걷고 있을까? 올레가 뭐길래. 몸 상태 안 좋아지니 의도하지 않게 내 몸에 대해 자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훅 들어왔다. 올레는 나 자신일지 모른다는 사실을.

20250521_184723.jpg
20250521_185358.jpg
20250521_185550.jpg
20250521_185707.jpg
20250521_190051.jpg


올레는 마을의 큰길과 집 사이로 난 길로, 반드시 곡선으로 만들었다. 제주는 바람이 강해서 올레를 곡선으로 해놓으면 바람이 휘어들어 오는 동안 그 세기가 약해져 바람으로부터 집을 보호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또한 곡선이다 보니 외부로부터 집안이 노출되지 않는 장점도 있었다. 이런 올레를 길의 이름으로 차용한 이유를 여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예전엔 길을 걸으며 제주의 역사, 자연, 지질 등과 마주하기에 이를 연결하는 의미로 올레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그것에 스스로 선뜻 동의가 되지 않았다. 그런데 8코스가 거의 끝나갈 때쯤에 겪었던, 통증이 오고 있는 무릎과 짙은 땀내만큼 지치고 무거운 몸의 자각으로 인해 올레를 다른 시각으로 보게 되었다. 올레길을 걸으면 많은 것을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하게 된다. 즉, 외부의 조건에 반응하게 된다. 반응의 결과는 느낌과 사유였다. 이를 바탕으로 지금 글을 쓰고 있기도 하다. 그리고 길과 느낌, 사유 사이에 내가 있다. 길은 나를 통해서만 느낌이 되고 사유가 된다. 그러므로 연결이라는 의미에서 보면 걷고 있는 내가 올레인 것이다. 내가 없다면, 아니 모든 순례자가 없다면 올레는 올레가 아닌 게 된다.

20250521_182648.jpg
20250521_185207.jpg
<올레길>

길을 올레이게 한 나는 걷고 있다. 모퉁이를 도는데 거대한 절벽이 보였다. 그 뒤로 코끼리가 긴 코를 바다로 뻗고 누운 실루엣의, 흐르는 운무가 더해져 신비로운 섬인지, 오름인지, 절벽인지 모를 형상이 있었다. 빛을 잃어가는지 세상은 은빛으로 차가워졌다. 그 세상 아래 얼굴, 손발만 형상이고 나머진 철사로 이루어진 지친 해녀가 바위에 앉아있었다. 그곳에서 8코스 종점인 대평포구로 곧장 가지 않고 샛길로 빠져 마을로 들어갔다. 바로 게스트하우스로 갔다. 내일 해녀 조형물로부터 걸으면 될 일이다. “많이 늦었네요”라고 말하며 주인은 날 맞이했다. 19시 25분이었다. (2025. 5. 21)

20250521_190447.jpg
20250521_190924.jpg


#제주올레길 #올레8코스 #색달 #GRlMMFOREST #대왕수천예래생태공원 #대왕수천 #예래논짓물 #하예환해장성 #마녀의언덕카페 #PALGIL #진황등대탐방로 #예래포구 #중문방파제 #포시낭 #포시낭코지 #MUNGWUJU멍우주



연말이라 그런지 일이 많아 글이 자주 늦어졌습니다. 게으르지 않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늦었지만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매거진의 이전글3-25 베릿내오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