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 탐구 09] 마르크스 vs 애덤 스미스
아침 6시. 한 청년은 알람보다 먼저 눈을 떴다. 새벽에 배달해야 하는 주문이 밀려 있었기 때문이다. 전기자전거의 배터리를 확인하고, 헬멧을 챙기며 속으로 중얼거린다.
“오늘도 10건은 채워야 월세 걱정을 덜 텐데…”
배달을 끝내고 돌아오는 길, 그는 카페에 들러 노트북을 연다. ‘스타트업 공모전’에 제출할 사업계획서를 수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오전에는 노동자, 오후에는 창업가, 밤에는 대학원 준비생. 그는 세 가지 얼굴을 동시에 지닌다. 사람들은 그를 N잡러라 부르지만, 그는 그저 “살아남기 위해” 하루를 이어갈 뿐이다.
이 청년의 모습은 특별한 이야기가 아니다. 오늘날 수많은 청년들이 바로 이런 삶을 살고 있다. 등록금과 생활비를 마련하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전전하고, 졸업 후에도 안정된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플랫폼 노동에 뛰어든다. 동시에 더 나은 미래를 꿈꾸며 스타트업이나 창업을 준비하기도 한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이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청년의 삶은 점점 더 불안정해지고 있다.
여기서 떠오르는 질문은 단순하다.
“왜 이렇게 열심히 사는데, 삶은 나아지지 않을까?”
이 질문은 단순히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자본주의라는 시스템 전체에 대한 물음이다.
애덤 스미스는 『국부론』에서 시장의 자유와 경쟁을 통해 개인의 이익 추구가 사회 전체의 부를 증진한다고 보았다. 그는 이를 ‘보이지 않는 손’이라 불렀다. 이 관점에서 본다면 청년은 새로운 기회를 누구보다 먼저 포착할 수 있는 존재다. 기술과 창의성을 무기로 창업에 뛰어드는 청년, 새로운 직업군을 만들어내는 혁신가, 이들은 자본주의의 희망을 상징한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달랐다. 그는 자본주의가 가진 구조적 모순을 직시했다.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에서 소외되고, 자본가는 잉여가치를 독점하며 불평등은 심화된다고 보았다. 마르크스의 시각에서 청년은 “자유로운 선택을 누리는 개인”이 아니라,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가장 불안정한 계급이다. 플랫폼 노동자, 계약직, ‘인턴의 무한 순환’에 갇힌 청년들이 바로 그 증거다.
이처럼 스미스와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에 대해 서로 다른 목소리를 냈다. 그리고 오늘날 청년의 삶 속에서 두 목소리는 동시에 울린다.
한쪽에서는 혁신을 외친다. 청년 창업가들은 새로운 서비스를 만들고, 공유경제 플랫폼은 더 효율적인 자원 활용을 약속한다. “이제는 누구나 창업가가 될 수 있다”는 말은 매력적으로 들린다.
그러나 다른 한쪽에서는 불평등이 심화된다. 청년들은 부모 세대보다 집을 살 가능성이 낮아지고, 학자금과 생활비 대출로 이미 빚을 안고 사회에 나온다. 주거 불안, 고용 불안, 미래 불안이라는 삼중고가 청년을 짓누른다. 스미스의 이상은 청년의 기회로, 마르크스의 경고는 청년의 현실로 동시에 드러난다.
따라서 오늘의 청년 세대는 묻지 않을 수 없다.
- 자본주의는 여전히 우리에게 기회의 땅인가?
- 아니면 우리를 더 깊은 불평등의 덫으로 몰아넣는가?
철학적 논쟁은 더 이상 고전 속에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지금도 청년의 삶 속에서 구체적 질문으로 살아 있다.
스미스가 그린 희망과 마르크스가 던진 경고. 두 철학자의 목소리 사이에서 오늘의 청년은 매일 같은 고민을 되풀이한다.
“나는 소비자로 머무를 것인가, 아니면 새로운 질서를 만드는 설계자가 될 것인가?”
이제 우리는 청년의 하루 속에서 다시 철학의 길을 열어야 한다. 이 책의 이번 장은 바로 그 여정을 시작하려 한다.
18세기 유럽은 산업혁명으로 요동쳤다. 농업과 수공업 중심의 사회가 공장과 기계, 새로운 무역 네트워크로 재편되던 시기였다. 바로 이 순간, 애덤 스미스는 『국부론』(1776)을 세상에 내놓았다. 그는 인간의 본성을 “자연스럽게 교환하고 협력하려는 존재”로 보았다. 시장은 이 본성을 가장 잘 드러낼 수 있는 장치였고, 각 개인이 자신의 이익을 추구할 때 사회 전체의 부가 증가한다고 주장했다.
스미스의 가장 유명한 개념은 “보이지 않는 손”이다. 그는 국가가 과도하게 개입하지 않고 개인의 자유로운 경제 활동을 보장하면, 시장의 자율적 조정 메커니즘이 작동하여 사회 전체의 이익을 증진한다고 믿었다.
- 핵심 사상 요약
인간은 교환과 협력의 본성을 지닌 존재
개인의 이익 추구 → 사회 전체 부의 증진
자유로운 시장 경쟁이 자원의 효율적 배분을 가능하게 함
국가는 최소한의 역할(법과 질서 유지, 시장 기반 마련)에 집중해야 함
스미스의 철학은 오늘날까지도 자유주의 경제의 근간을 이룬다. 창업, 혁신, 기업가 정신을 강조하는 담론은 모두 스미스의 그림자 속에 있다. 현대 청년들이 ‘스타트업 창업’과 ‘공유경제 플랫폼’을 기회의 장으로 여기는 것도 이 전통과 연결된다.
반면 19세기의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의 다른 얼굴을 보았다. 그는 산업혁명의 결과로 등장한 대규모 공장과 노동자의 처지를 주목했다. 공장은 부를 쏟아냈지만, 그 부는 노동자에게 돌아가지 않았다. 자본가들은 노동자의 임금을 최소화하고, 남은 잉여가치를 독점했다. 마르크스는 이것을 착취라 불렀다.
그는 『자본론』에서 자본주의가 발전할수록 불평등이 심화된다고 분석했다. 노동자는 노동 과정에서 자신이 만든 생산물과 소외되고, 삶은 단순히 ‘노동력 판매’로 축소된다. 결국 자본주의는 내적으로 모순을 안고 있으며, 이 모순은 언젠가 혁명을 통해 다른 체제로 전환될 수밖에 없다고 보았다.
- 핵심 사상 요약
자본주의의 본질 = 노동 착취
잉여가치는 자본가가 독점
노동자는 생산물·과정·타인·자기 자신으로부터 소외됨
불평등은 자본주의의 구조적 필연
최종적으로는 사회주의적 전환이 필요
마르크스의 시각에서 청년은 자본주의의 ‘가장 불안정한 노동계급’이다. 정규직 기회를 잡지 못하고, 플랫폼 노동이나 인턴십을 전전하는 현실은 마르크스가 말한 노동의 불안정성과 소외를 오늘날 보여주는 사례다.
스미스와 마르크스의 사상은 단순히 경제 이론의 차이가 아니다. 그것은 자본주의를 바라보는 두 개의 철학적 세계관이다.
- 스미스는 자본주의를 자유와 기회의 체제로 보았다. 개인의 노력과 창의성은 곧 부와 번영을 낳는다고 믿었다.
- 마르크스는 자본주의를 착취와 불평등의 체제로 보았다. 개인의 노력은 자본가의 이익을 위해 소모될 뿐이라고 진단했다.
오늘날 청년 세대의 삶은 이 두 관점이 동시에 드러나는 장이다.
스타트업에 도전하는 청년은 스미스적 낙관을 살아내는 주체다.
그러나 학자금 빚과 불안정한 노동시장 속에서 고통받는 청년은 마르크스의 경고를 증명하는 존재다.
스미스와 마르크스가 활동하던 시대와 지금은 다르지만, 청년이 처한 질문은 여전히 유사하다.
“나는 이 체제 속에서 기회의 주체인가, 소외된 객체인가?”
“자본주의는 나에게 자유를 주는가, 아니면 불평등을 강화하는가?”
결국 두 경제 철학자의 사상은 청년 세대가 매일 부딪히는 삶의 모순을 해석하는 언어다. 어떤 청년은 스미스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또 다른 청년은 마르크스의 눈으로 현실을 해석한다. 그러나 진실은 둘 사이 어딘가에 놓여 있다.
이제 우리는 이 철학적 배경 위에서 청년의 일상과 노동, 소비와 공유경제가 어떻게 이 두 전통과 교차하는지 살펴볼 차례다.
마르크스의 분석에서 가장 핵심은 잉여가치 개념이다. 노동자는 하루 8시간을 일하지만, 임금은 그중 일부만을 반영한다. 나머지 시간 동안 창출된 가치는 자본가의 몫이 된다. 이 구조는 착취를 제도화한다.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을 팔아 생계를 유지할 뿐, 그 노동이 만들어낸 부의 대부분은 다른 이의 주머니로 들어간다.
현대 자본주의는 더욱 정교해졌다. 청년들이 아르바이트, 인턴십, 계약직 등 불안정한 노동에 종사하는 동안, 그들의 노동은 ‘경험 쌓기’라는 이름으로 저임금 또는 무급에 가깝게 소비된다. 배달 라이더, 플랫폼 드라이버, 프리랜서 디자이너 모두 잉여가치 체계 속에 편입되어 있지만, 그 대가는 언제나 불안정하다. 마르크스가 『자본론』에서 지적했던 구조적 불평등은 21세기에도 여전히 강력하게 작동한다.
마르크스가 특히 주목한 것은 노동의 소외(alienation)이다. 노동자가 단순히 임금을 얻기 위해 자신의 노동력을 파는 순간, 그는 자신이 만든 산물로부터, 노동 과정으로부터, 타인으로부터, 그리고 자기 자신으로부터 소외된다.
오늘날 청년의 노동 현실을 보자.
한 청년이 스타트업에서 밤낮없이 일하지만, 회사가 성장하면 그 성과는 투자자와 창업주에게 돌아간다. 그는 자신이 창조한 가치에서 소외된다.
또 다른 청년은 공장에서 단순 반복 작업을 하며, 노동 과정 자체에 무의미함을 느낀다. 그는 자신의 잠재력과 열망으로부터 소외된다.
플랫폼 노동에 종사하는 청년은 소비자와 기업 시스템 사이에서 ‘노동력’으로만 취급되며, 동료와의 관계마저 단절된다. 그는 타인으로부터 소외된다.
결국 이런 모든 과정은 자아 정체성의 혼란으로 이어진다. “나는 왜 일하는가?”, “내 노동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라는 질문 앞에서 청년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멀어진다.
이 소외의 경험은 단순한 개인적 우울이 아니라, 체제의 구조적 산물이다.
마르크스는 계급이 단순히 경제적 차원에 머물지 않고, 사회 전반의 기회를 결정한다고 보았다. 오늘날 청년 세대는 교육과 기회의 불평등을 날카롭게 체감한다.
명문대 진학 여부는 여전히 취업 기회의 차이를 만든다.
부모 세대의 자산은 자녀의 주거 안정과 커리어 시작점에 직접적 영향을 미친다.
같은 능력을 가진 청년도 “출발선”이 다르면 결과가 달라진다.
마르크스적 시각에서 이는 단순한 불공정이 아니라 자본주의가 계급 구조를 재생산하는 방식이다. 청년이 아무리 노력해도, 사회 구조가 이미 불평등을 고착화하고 있기 때문에 동일한 성과를 얻기 어렵다.
오늘날 사회학자들은 청년 세대를 ‘프레카리아트(불안정 노동 계급)’라 부르기도 한다. 이는 마르크스가 말한 프롤레타리아트(노동자 계급)의 현대적 변형이다.
정규직 채용 대신 계약직·프리랜서·아르바이트가 늘어난다.
4대 보험조차 적용되지 않는 일자리가 많다.
“청년 창업”은 새로운 기회의 언어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안전망 없는 자기착취로 이어지기도 한다.
마르크스라면 이 현상을 “자본주의가 위기에 대응하는 방식”이라고 분석했을 것이다. 체제는 유연성을 명분으로 노동의 불안을 확대시키고, 이 과정에서 청년 세대가 가장 큰 타격을 받는다.
오늘날 청년들은 마르크스의 언어를 빌리지 않아도 이미 그의 문제의식을 살아내고 있다.
“왜 우리는 이렇게 열심히 일해도 집 한 채 마련할 수 없을까?”
“왜 혁신 기업에서 일해도, 진짜 부는 소수 창업자와 투자자에게만 돌아갈까?”
“왜 우리는 플랫폼에서 노동자이면서 동시에 소비자로만 취급될까?”
이 질문들은 곧 마르크스가 던진 물음의 현대적 변주다. 자본주의가 만들어내는 구조적 불평등과 소외의 문제는 여전히, 특히 청년 세대의 삶 속에서 반복되고 있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가 발전할수록 노동자의 삶이 더욱 불안정해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현대 청년은 그 예언의 산 증인이다. 비정규직과 플랫폼 노동, 부동산 불평등과 교육 격차는 모두 체제의 구조적 문제를 드러낸다.
하지만 동시에, 청년 세대는 새로운 대안을 탐색하는 주체이기도 하다. 공유경제, 협동조합, 공정무역, 기후 정의 운동 같은 시도는 마르크스가 꿈꾸었던 연대와 구조적 변혁의 작은 씨앗일 수 있다.
마르크스의 비판적 시각은 단순히 19세기 산업사회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그것은 오늘날 청년이 겪는 불평등과 소외의 현실을 설명하는 도구다. 청년 세대가 직면한 질문—“나는 체제 속에서 기회의 주체인가, 소외된 객체인가?”—는 여전히 마르크스의 거울 속에서 반사된다.
청년들은 이제 단순히 체제의 희생자가 아니라, 그 모순을 직시하고 새로운 대안을 모색하는 세대가 되어야 한다. 마르크스의 사상은 그 과정에서 비판적 렌즈이자, 사회적 상상력을 자극하는 자원이다.
애덤 스미스(Adam Smith, 1723~1790)는 흔히 ‘자본주의의 아버지’로 불린다. 그의 대표작 『국부론』은 단순한 경제학 교과서가 아니라, 한 사회가 어떻게 번영할 수 있는지를 체계적으로 설명한 책이었다. 스미스는 인간을 냉혹한 탐욕의 존재로만 보지 않았다. 그는 인간이 자기 이익을 추구하지만, 그 과정에서 오히려 사회 전체에 기여할 수 있다는 낙관적 믿음을 가졌다. 그것이 바로 오늘날까지 회자되는 “보이지 않는 손”의 원리다.
스미스가 본 인간은 이타적 이상주의자가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인간의 자기이익 추구가 무조건 사회를 해치는 것은 아니라고 보았다. 오히려 장인이 더 좋은 물건을 만들고, 상인이 더 많은 소비자를 만족시키려는 욕망은 개인의 이익을 넘어 사회 전체의 풍요를 증대시킬 수 있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저녁 식탁에서 고기를 먹을 수 있는 것은 정육업자의 자비심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이익을 추구하는 마음 덕분이다.”
즉, 인간의 사적인 욕망은 적절한 제도와 시장 메커니즘 속에서 공적 이익으로 전환될 수 있다는 것이다.
스미스의 사상에서 가장 유명한 사례 중 하나가 바로 ‘핀 공장’ 이야기다. 그는 한 명이 핀을 처음부터 끝까지 제작한다면 하루에 고작 수십 개밖에 만들지 못하지만, 열 명이 각자 역할을 나누어 생산한다면 수천 개의 핀을 만들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는 단순한 생산 기술의 문제를 넘어, 사회가 어떻게 협력과 분업을 통해 생산성을 극대화하고 풍요를 확대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은유였다.
오늘날 청년들이 팀 프로젝트, 창업, 혹은 스타트업에서 경험하는 협업의 효과는 이미 스미스가 설명했던 분업의 원리가 현대적으로 구현된 모습이다.
스미스가 보기에 시장은 억압이 아니라 자유를 보장하는 장치였다. 각자가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시장은 자연스럽게 균형을 찾아간다고 보았다. 물론 시장이 항상 완벽하지는 않지만, 그는 권력이나 독점보다 자유경쟁이 훨씬 더 많은 기회와 효율을 낳는다고 강조했다.
스미스는 국가가 경제에 과도하게 개입할 때 생기는 부작용을 경계했다. 보호무역이나 특혜정책은 특정 집단만을 이롭게 하고, 사회 전체의 번영을 해친다고 보았다. 반대로, 자유로운 교역과 경쟁은 청년들에게도 더 많은 일자리, 더 다양한 창업 기회, 더 넓은 시장을 제공한다.
오늘날 청년들에게 스미스의 낙관적 시각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
많은 청년들이 불평등과 기회의 박탈을 호소하지만, 여전히 시장은 새로운 가능성의 공간으로 기능하고 있다. 온라인 플랫폼을 활용한 1인 창업, 크리에이터 경제, 글로벌 스타트업의 확산은 모두 “자유로운 경쟁과 개방된 시장”이라는 스미스적 이상에서 비롯된 현상이라 할 수 있다.
한 청년이 지방 소도시에서 온라인 스토어를 운영하면서 세계 각국의 소비자에게 물건을 판매하는 장면을 떠올려 보자. 과거 같으면 불가능했을 일이, 지금은 누구나 도전할 수 있는 현실이 되었다. 시장은 여전히 청년들에게 기회의 무대인 것이다.
물론 스미스의 시각이 모든 것을 설명하지는 않는다. 시장이 자유롭게 돌아간다고 해서 항상 정의롭거나 공정한 결과가 나오는 것은 아니다. 독점, 불평등, 정보 비대칭 같은 문제들은 여전히 시장을 왜곡한다. 그러나 스미스의 사상은 중요한 통찰을 남긴다.
그것은 바로 “청년 세대가 시장을 두려워하기보다 기회의 공간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점이다. 단순히 안정적인 일자리만을 찾기보다, 자기 역량을 발휘하고 새로운 기회를 모색하는 장으로서 시장을 바라볼 때, 청년들은 더 넓은 선택지를 가질 수 있다.
마르크스와 스미스의 사상은 서로 정반대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오늘날 우리가 직면한 불평등과 기회의 문제를 두 축에서 해석하는 두 개의 렌즈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가 필연적으로 불평등을 낳는다고 보았고, 스미스는 자유로운 경쟁이 사회적 번영을 확산시킬 수 있다고 믿었다. 이 두 길의 충돌은 오늘날 청년 세대의 현실에서 극적으로 드러난다.
대부분의 청년들은 여전히 근로소득, 즉 ‘일해서 버는 돈’에 의존한다.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에 성공해도, 월급은 주거비·교육비·생활비에 빠듯하게 쓰이고 남는 것이 없다. 많은 청년들이 “열심히 일해도 집 한 채 마련하기 힘들다”는 좌절을 토로한다. 이는 단순한 체감이 아니라 통계로도 증명된다. 근로소득만으로는 자산 격차를 줄이기 어렵고, 특히 대도시 주거 시장에서는 아예 접근조차 힘든 경우가 많다.
마르크스의 언어로 표현하자면, 청년 세대는 여전히 “임금노동자의 굴레” 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노동력을 팔아 생존은 유지할 수 있으나, 축적의 기회를 잡기 어렵다. 자본은 자본을 낳는데, 청년들에게는 그 출발점조차 주어지지 않는 것이다.
한편, 일부 청년들은 금융 투자나 자산 증식을 통해 새로운 길을 모색한다. 주식, 가상자산, 부동산 공동투자, 스타트업 창업 등 다양한 방식으로 근로소득 이외의 소득원을 확보하려 한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근로소득만으로는 미래를 준비하기 어렵다는 냉혹한 현실 인식이다.
둘째, 디지털 플랫폼과 금융 인프라의 발달로 과거에 비해 훨씬 쉽게 투자와 자산 관리에 접근할 수 있게 되었다는 변화다.
스미스적 시각에서 보자면, 이는 시장이 청년들에게 새로운 기회를 제공하는 모습이다. 각자의 판단과 도전이 경쟁을 낳고, 그 경쟁 속에서 더 나은 기회와 성취가 가능해진다. 실제로 소액 투자로 시작해 꾸준히 자산을 불려가는 청년들의 사례도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다시 마르크스적 통찰이 힘을 발휘한다. 청년들이 금융투자에 몰려들고 있지만, 그 기회 자체가 평등하게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부모의 자산을 일부 상속받거나, 주거비 부담이 적은 청년은 상대적으로 더 적극적인 투자에 나설 수 있다. 반면, 생활비와 학자금 대출에 허덕이는 청년에게는 투자할 여력이 없다. 결국 ‘투자할 수 있는 자’와 ‘투자할 수 없는 자’ 사이의 격차가 다시 벌어진다.
이는 자본주의가 단순히 근로소득의 차이를 넘어 자산 격차를 통해 불평등을 재생산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시장은 기회를 제공하지만, 그 기회는 출발선의 조건에 따라 극명하게 갈린다.
이 지점에서 스미스의 낙관과 마르크스의 비판을 동시에 재해석할 수 있는 영역이 있다. 바로 공유경제(Sharing Economy)와 플랫폼 기반의 협력 모델이다. 자동차, 주거, 지식, 재능을 공유하는 플랫폼은 청년들에게 ‘자본을 소유하지 않고도 활용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이는 스미스적 의미에서 새로운 시장의 확장이자, 마르크스적 의미에서 자본 소유의 불평등을 일정 부분 완화할 수 있는 실험이다.
물론 공유경제 역시 노동 착취나 플랫폼 독점 같은 문제를 낳기도 한다. 그러나 청년들이 창의성과 디지털 역량을 활용해 자산 소유 대신 접근(Access)과 협력(Collaboration)을 기반으로 새로운 경제 활동을 창출한다는 점은 분명한 가능성이다.
결국 청년 세대에게 중요한 질문은 이것이다.
“나는 근로소득만으로 만족할 것인가, 아니면 금융·투자·자산 관리까지 포함해 다층적인 소득 구조를 준비할 것인가?”
마르크스는 불평등의 구조를 직시하라고 말한다. 단순한 근로소득만으로는 자본주의적 불평등을 극복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반면 스미스는 시장과 경쟁을 기회로 삼으라고 권한다. 금융·투자, 창업, 자산 관리 등은 불평등을 악화시키는 요인이 아니라, 오히려 개인에게 열린 새로운 무대일 수 있다는 것이다.
청년들은 이 두 길을 동시에 바라보아야 한다. 현실의 불평등 구조를 비판적으로 직시하면서도, 동시에 시장이 제공하는 새로운 기회를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노동과 자산, 소비와 투자, 안정과 도전 사이에서 균형을 찾는 것. 그것이 바로 오늘날 청년 세대가 직면한 가장 큰 과제다.
마르크스와 스미스의 사상은 추상적인 이론에 머무르지 않는다. 오늘날 청년들의 삶을 살펴보면, 그들의 현실이야말로 두 철학의 대립을 가장 극명하게 드러내는 장면이다.
서울의 한 스타트업에 다니는 20대 후반 직장인 A씨는 매달 250만 원 정도의 월급을 받는다. 하지만 월세와 생활비, 학자금 대출 상환을 제하면 손에 쥐는 돈은 거의 남지 않는다. 저축은커녕, 예기치 못한 지출이 생기면 카드빚으로 버텨야 한다. “열심히 일하지만, 미래가 보이지 않는다”는 그의 말은 수많은 청년들의 공통된 고백이다.
마르크스의 시각에서 보자면, 이는 자본주의적 구조 속에서 노동자가 자신의 노동력을 팔아 생존은 유지하지만 축적의 기회를 빼앗기는 ‘임금노동자의 소외’ 그 자체다. 노동은 단순히 생계를 유지하는 수단으로 전락했고, 삶의 의미와 미래 설계의 기회는 멀어져 간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B씨는 같은 20대 후반이지만 주식과 코인 투자로 자산을 늘려가고 있다. 대학 시절부터 소액으로 시작해 투자 지식을 쌓은 그는, “일해서 모으는 돈보다 불리는 돈이 더 크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최근 몇 년 사이 ‘동학개미운동’으로 불린 주식 투자 열풍이나, 20~30대가 가상화폐 시장에 적극적으로 뛰어든 현상은 단순한 투기 열기를 넘어 근로소득만으로는 미래를 준비할 수 없다는 절박함을 보여준다.
스미스의 관점에서 보면 이는 시장이 제공하는 새로운 기회다. 자본의 자유로운 이동과 금융 기술의 발전은 누구나 기회에 접근할 수 있는 환경을 열었다. 하지만 동시에 마르크스적 통찰도 필요하다. 실제로 이런 금융·투자 시장은 ‘투자할 여유가 있는 자’와 ‘그렇지 못한 자’ 사이의 격차를 더 벌리는 기제로 작동한다.
한국 사회에서 청년 불평등의 가장 뚜렷한 장면은 부동산 시장이다. 자가 보유율은 청년층에서 극히 낮으며, 많은 청년들은 월세·전세라는 불안정한 주거 환경에 놓여 있다. 반면, 부모로부터 자산을 증여받은 소수 청년은 일찍부터 안정적인 주거와 함께 투자 기반을 마련한다.
예를 들어, 최근 통계에 따르면 20~30대의 주택 매입자 중 상당수가 부모의 증여 자금으로 집을 산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시장이 기회를 제공하는 동시에, 출발선의 불평등이 기회의 불평등으로 이어지는 현장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마르크스적 경고 – 자본이 자본을 낳는 구조 – 가 청년 세대에서 실감나게 드러나는 순간이다.
그러나 청년들은 단순히 불평등을 체념하지 않는다. 일부는 공유경제와 협력적 모델 속에서 새로운 돌파구를 찾는다.
- 모빌리티 공유 서비스: 차량을 소유하지 않고도 필요할 때마다 빌려 쓰는 서비스는 자동차 구매 여력이 없는 청년들에게 ‘접근(Access)의 자유’를 제공한다.
- 주거 공유 플랫폼: 쉐어하우스, 코리빙(Co-living) 공간은 높은 전세금을 감당하기 어려운 청년들에게 안정적 주거를 제공한다.
- 지식·재능 공유 플랫폼: 과외, 디자인, 프로그래밍 등 개인의 재능을 공유하고 수익화하는 플랫폼은 소득 구조를 다각화하는 길이 된다.
스미스의 시장 확장 이론으로 보면 이는 분명 긍정적이다. 동시에 마르크스적 시각으로 보면, 이는 ‘소유 불평등’을 일정 부분 상쇄하는 실험적 시도다.
이러한 사례들은 결국 청년 세대가 마르크스와 스미스의 사유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한쪽에서는 “노동만으로는 불평등 구조를 극복할 수 없다”는 마르크스의 통찰이 실감난다.
다른 한쪽에서는 “시장이 여전히 기회를 제공한다”는 스미스의 믿음이 새로운 실험을 가능케 한다.
청년 세대는 근로소득과 금융소득, 자산과 공유경제, 안정과 도전 사이에서 균형을 찾아야 한다. 그리고 이 균형을 어떻게 설계하는가는 개인의 생존을 넘어, 사회 전체의 불평등 구조와도 깊이 연결된다.
마르크스와 스미스의 사상은 자본주의를 바라보는 두 개의 날카로운 렌즈다. 마르크스는 자본이 노동을 지배하면서 불평등을 심화시키는 구조적 문제를 직시했다. 반면 스미스는 시장의 자율적 메커니즘 속에서 개인의 자유와 기회가 확장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렇다면 오늘날 청년 세대는 이 두 시선을 어떻게 균형 있게 가져갈 수 있을까?
우선, 청년 세대는 자본주의 사회가 만들어내는 구조적 불평등을 회피하지 않고 직시할 필요가 있다. 근로소득으로는 주거 안정조차 어려운 현실, 부모의 자산에 따라 출발선이 달라지는 세대 격차, 금융시장 참여 여부에 따라 삶의 기회가 달라지는 상황은 단순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이는 사회 전체가 풀어야 할 구조적 모순이다. 마르크스의 비판적 통찰을 통해, 청년들은 자신들의 좌절을 ‘개인의 무능’이 아닌 ‘시스템의 한계’로 이해할 수 있다. 이는 곧 목소리를 내고 제도 변화를 요구하는 힘으로 이어진다.
동시에, 시장이 제공하는 기회 역시 무시할 수 없다. 금융 투자, 공유경제, 재능 기반 플랫폼은 청년들에게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고 있다. 스미스의 사유가 일깨우는 것은 바로 자율적 주체로서의 청년이다. 시장은 위험을 내포하지만, 동시에 도전하는 자에게 기회를 제공한다. 청년이 스스로의 역량을 개발하고, 시장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아가려는 노력은 단순한 생존이 아니라 자기 실현의 과정이 된다.
따라서 필요한 것은 불평등을 직시하면서도, 기회를 활용하는 균형적 태도다. 마르크스의 눈으로 사회 구조를 비판적으로 성찰하고, 스미스의 눈으로 시장의 활력을 기민하게 활용하는 것. 이 두 시선이 조화를 이룰 때, 청년 세대는 단순히 생존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자신과 공동체의 미래를 설계할 수 있다.
이 균형은 개인 차원의 선택만이 아니라, 사회 차원의 제도 설계와도 연결된다. 예컨대, 청년 기본소득이나 주거 지원 정책은 마르크스적 문제의식에서 비롯된 안전망이 될 수 있다. 동시에 창업 지원이나 공유경제 플랫폼 확대는 스미스적 신뢰에서 비롯된 기회 제공의 장치가 된다. 두 축이 함께 작동할 때 비로소 청년 세대는 현실의 장벽을 넘으면서도, 새로운 가능성을 탐색할 수 있다.
결국 마르크스와 스미스의 사상은 어느 한쪽을 선택하라는 명령이 아니다. 오히려 두 시선을 동시에 가질 때, 우리는 자본주의라는 복잡한 현실을 제대로 읽을 수 있다. 청년 세대에게 이 균형은 선택이 아니라 생존의 조건이며, 동시에 미래를 열어가는 사유의 출발점이다.
21세기 자본주의의 새로운 얼굴은 ‘공유경제’다. 차량을 소유하지 않아도 카셰어링으로 이동할 수 있고, 집을 소유하지 않아도 플랫폼을 통해 숙소를 나눠 쓸 수 있다. 지식과 기술 역시 오픈소스와 온라인 강좌를 통해 자유롭게 순환한다. 이러한 변화는 전통적인 ‘소유 중심의 자본주의’와는 다른 질서를 만들어내고 있다. 그러나 이 질서가 모두에게 해방을 약속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새로운 기회와 함께 새로운 불평등이 겹겹이 쌓이고 있다.
마르크스가 지적했던 자본의 집중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공유경제의 플랫폼들은 ‘공유’라는 이름으로 포장되지만, 실상은 소수 거대 기업의 독점 구조가 되어가고 있다. 사용자와 노동자는 플랫폼의 규칙에 종속되며, 불투명한 알고리즘에 의해 평가받는다. 다시 말해, 공유경제는 자본주의의 모순을 완전히 극복하지 못한 채 새로운 형태로 재생산하고 있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마르크스의 비판적 눈을 빌려, ‘공유’라는 이름이 실제로 누구의 이익을 위한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반대로, 스미스의 시각에서 본다면 공유경제는 개인의 자유와 창의성을 극대화할 수 있는 장치이기도 하다. 누구든 자신의 여분의 자원—차, 방, 재능—을 시장에 내놓아 수익을 창출할 수 있다. 이는 자본의 초기 축적이 부족한 청년들에게 특히 의미 있는 기회다. 거대한 공장을 세우지 않아도, 거대한 자본을 들이지 않아도, 개인이 시장에 참여하고 자신만의 경제적 영역을 만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스미스가 강조한 ‘자유로운 교환과 자율적 활동’의 이상이 공유경제라는 무대에서 되살아나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청년 세대의 선택과 태도다. 청년들은 공유경제라는 새로운 무대에서 두 가지 길을 동시에 직면한다. 하나는 플랫폼 종속의 위험, 또 하나는 창의적 기회의 확장이다. 이 모순된 현실을 어떻게 이해하고 활용할 것인지는 단순한 경제적 기술을 넘어 철학적 태도의 문제다.
철학이 필요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청년 세대가 공유경제 속에서 단순히 소비자가 아니라 ‘사유하는 참여자’로 서야 하는 이유다. 불평등을 직시하면서도, 시장의 활력을 활용하는 균형적 태도는 결국 철학적 사고 없이는 가능하지 않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데카르트의 명제가 기술시대에도 유효한 것처럼, “나는 성찰한다, 고로 미래를 설계한다”라는 태도가 공유경제 시대의 새로운 시민 철학이 되어야 한다.
결국 우리의 과제는 분명하다. 공유경제를 단순히 새로운 소비 패턴으로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 사회 구조와 개인의 기회가 교차하는 장치로 이해해야 한다. 마르크스의 비판과 스미스의 낙관을 동시에 참고하여, 불평등을 완화하고 기회를 확장하는 방향으로 제도를 설계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공유경제는 또 하나의 자본주의적 착취 구조로 전락할 것이고, 청년 세대는 새로운 이름의 불평등 속에 갇히게 될 것이다.
따라서 공유경제 시대의 새로운 철학은 비판과 활용의 균형이다. 불평등을 외면하지 않는 비판적 성찰(마르크스), 그리고 자유와 기회를 놓치지 않는 적극적 활용(스미스). 두 시선을 함께 가져가는 청년 세대만이 이 모순된 현실 속에서 주체적 길을 설계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독자에게 질문을 던져본다.
“나는 공유경제를 단순히 편리한 서비스로 소비하고 있는가, 아니면 그 속에서 나와 공동체의 미래를 새롭게 설계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고 있는가?”
그 질문을 붙드는 순간, 우리는 이미 ‘철학하는 시민’으로 한 걸음 나아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