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적 합리성 vs 권력의 미시 권력

[진리 탐구 14] 하버마스 vs 푸코

“대화와 권력 사이에 선 청년 세대”





서울의 한 대학 강당. 늦은 오후, 강연을 마치고 열린 자유토론 시간이 막 시작되려 한다. 무대에는 두 개의 의자가 나란히 놓여 있고, 청중석에는 대학생들과 일반 시민들이 가득 앉아 있다. 오늘의 주제는 “소통과 권력, 우리는 어떻게 대화할 수 있는가?”였다.


한쪽 학생은 손을 들고 자신 있게 말했다.
“저는 대화가 유일한 해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서로 다른 의견이 있어도 합리적인 토론을 통해 공통점을 찾을 수 있어요. 결국 민주주의는 대화의 힘으로 유지되는 거 아닐까요?”
그는 하버마스의 사상을 떠올리며, 언어가 단순한 말의 도구가 아니라 사회적 합의와 상호 이해를 만드는 기반이라고 주장한다.


그러자 다른 쪽 학생이 마이크를 잡는다.
“하지만 그 대화조차 권력의 장치 아닐까요? 누가 발언권을 쥐고 있고, 어떤 목소리가 더 설득력을 가지는지는 이미 사회적 권력관계에 따라 결정돼 있잖아요. 토론이 공정해 보이지만 사실은 권력이 작동하는 또 다른 무대일 뿐일 수도 있죠.”
그의 말은 푸코의 문제의식을 그대로 옮겨온 듯했다.


강당은 순간 술렁였다. 두 학생의 발언은 단순히 토론의 서두가 아니라, 오늘 우리가 마주한 철학적 갈등의 압축판이었다. 한쪽은 합리적 소통을 믿고, 다른 한쪽은 숨은 권력을 직시한다. 과연 청년 세대는 어떤 입장에 더 가까울까?






오늘의 청년들은 유례없는 소통의 기술을 손에 쥐고 있다. 스마트폰 하나만 있으면 SNS에서 수천 명과 동시에 대화할 수 있고, 유튜브 생방송에서 실시간 채팅으로 토론을 이어갈 수 있다. 청년 세대는 인터넷 공론장의 중심 세대이며, 그만큼 대화의 가능성을 실험해온 세대다. 하지만 동시에 권력의 미시적 작동에 가장 예민하게 노출된 세대이기도 하다. 알고리즘이 대화의 흐름을 조율하고, 플랫폼 기업이 말의 도달 범위를 결정한다. 우리는 “소통의 시대”에 살고 있지만, 그 소통은 언제나 보이지 않는 권력의 프레임 속에서 이루어진다.


예컨대, 학생회 선거에서조차 ‘누가 발언권을 먼저 가지느냐’, ‘누가 더 유리한 언어를 쓰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진다. 공정한 대화의 장 같아 보여도, 사실은 권력의 비대칭이 이미 구조화되어 있다. 하버마스가 말한 이상적 발화 상황(ideal speech situation)은 꿈같은 이상에 가깝고, 푸코가 지적했듯 권력은 심지어 대화의 형식 속에도 뿌리내려 있다.






이 갈등은 단순한 철학적 논쟁이 아니다. 청년들이 매일 부딪히는 현실이다. 온라인 커뮤니티에서의 정치 토론, 직장 내 회의에서의 발언, 심지어 친구들과의 대화까지도 권력의 힘이 작동한다. 누군가는 침묵을 강요받고, 누군가는 더 큰 목소리로 장을 장악한다. 그래서 청년들은 묻는다.
“대화란 정말 평등한가?”
“우리는 진짜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가, 아니면 권력의 프레임 속에서만 말하는가?”


하버마스와 푸코의 철학은 이 질문의 양 끝을 차지한다. 하버마스는 대화 속에서 인간은 이해할 수 있고, 민주주의는 성숙할 수 있다고 본다. 반면 푸코는 권력은 언제나 우리를 지배하며, 대화조차 권력의 장치라고 본다. 두 입장은 충돌하면서도, 현대 청년들이 마주한 현실을 정밀하게 비추어준다.






강당에 앉아 있던 한 학생이 이런 말을 했다.
“우리는 지금 하버마스와 푸코 사이 어딘가에 서 있는 것 같아요. 이상적인 대화의 힘을 믿고 싶지만, 현실은 권력의 그림자가 너무 짙게 드리워져 있거든요.”


이 말은 오늘의 청년 세대를 압축한다. 대화의 이상을 꿈꾸지만, 동시에 그 이상이 쉽게 무너지는 현실을 직시하는 세대. 그들은 여전히 질문한다.


“대화는 권력을 극복할 수 있는가?”

“아니면 권력에 의해 관리되는 착각에 불과한가?”


이 질문에서 15회차의 이야기가 출발한다.










철학적 배경 – 20세기 철학의 새로운 문제의식



20세기는 인류 역사에서 그 어떤 시기보다도 급격한 변화와 위기를 동시에 경험한 세기였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은 인간이 이성과 과학을 신뢰하던 낙관을 무너뜨렸고, 전체주의와 파시즘의 경험은 자유와 권력이 어떻게 결합하여 파국으로 치달을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동시에 냉전과 핵무기 경쟁은 인류 생존의 문제를 철학적 성찰의 중심에 올려놓았다. 철학자들은 “이성이 정말 인간을 해방시킬 수 있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다시 묻게 되었다.




1. 계몽의 이성과 그 그림자



18세기 계몽주의는 이성을 만능의 도구로 내세웠다. 인간은 스스로 생각할 수 있고, 합리적 제도를 만들며, 과학을 통해 진보할 수 있다는 확신이 사회를 지배했다. 그러나 20세기의 현실은 이 낙관을 배신했다. 아우슈비츠와 히로시마, 스탈린의 강제수용소와 전 세계적 전쟁은, 인간의 이성이 진보의 도구일 뿐 아니라 파괴의 도구로도 작동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이성의 빛은 동시에 그림자를 드리웠던 것이다. 하버마스와 푸코가 활동한 지적 배경에는 바로 이러한 ‘계몽 이성의 양면성’에 대한 비판적 성찰이 자리 잡고 있었다.




2. 하버마스의 문제의식 – 왜곡된 소통을 넘어



하버마스는 독일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후예였다. 그의 스승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는 『계몽의 변증법』에서 이성이 오히려 도구화되어 인간을 지배한다고 비판했다. 과학과 기술, 합리적 제도조차 권력의 도구로 전락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버마스는 이 비판을 이어받으면서도, 동시에 새로운 가능성을 찾고자 했다. 그는 “모든 이성이 권력화되는 것은 아니다. 의사소통적 이성은 여전히 인간을 자유롭게 할 수 있다”라고 주장했다.


하버마스의 문제의식은 단순하다. 사회가 합리적이고 정의롭게 작동하기 위해서는 권력이 아니라 대화와 합의가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왜곡되지 않은 이상적 대화 상황’을 이론화하며, 언어 속에 담긴 합리적 가능성을 철학의 중심에 놓았다. 20세기의 위기를 넘어설 길은, 권력의 폭력이 아니라 언어의 합리적 힘을 회복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그의 철학은 희망의 철학이었다.




3. 푸코의 문제의식 – 권력의 미시적 작동



푸코는 전혀 다른 길을 걸었다. 그는 하버마스처럼 언어와 합의의 가능성에 희망을 걸지 않았다. 대신, 사회 곳곳에 침투한 권력의 작동을 냉정히 드러내는 데 집중했다. 푸코는 전통적 권력관—즉, 왕이나 정부처럼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힘’—을 해체하고, 권력이 사회의 미세한 일상적 관계 속에서 작동한다고 주장했다.


예컨대 감옥, 병원, 학교와 같은 제도는 단순히 중립적 기관이 아니다. 그 속에서는 인간을 감시하고 규율하며, 순응하도록 만드는 권력이 작동한다. 푸코는 이를 규율 권력(disciplinary power)이라 불렀다. 또 근대 사회가 발달시키는 통계, 의학, 행정은 인간을 생명 단위로 관리하는 권력, 즉 생체 권력(biopower)으로 작동한다고 분석했다.


푸코의 문제의식은 명확했다. 우리가 자유롭다고 생각하는 순간에도 권력은 이미 우리의 몸짓, 언어, 생각 속에 스며들어 있다는 것이다. 그는 권력을 부정적인 억압이 아니라, 생산적이고 전면적인 힘으로 보았다. 바로 이 지점에서 푸코는 하버마스와 날카롭게 대립한다.




4. 소통과 권력의 교차점



하버마스와 푸코는 서로 다른 길을 걸었지만, 두 사람 모두 20세기의 위기에서 출발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진다.


- 하버마스는 왜곡된 소통을 넘어 합리적 대화의 가능성을 회복하려 했다.

- 푸코는 제도와 언어 속에 숨어 있는 권력의 작동을 밝혀내며, 우리가 믿는 자유와 소통이 사실은 권력의 산물일 수 있음을 경고했다.


즉, 두 사람은 각각 언어의 힘권력의 힘을 통해 현대 사회를 분석한 것이다.




5. 청년 세대와의 연결



오늘날 청년 세대는 바로 이 두 시각의 교차로에 서 있다. 한편으로는 SNS와 온라인 토론을 통해 하버마스적 ‘소통의 가능성’을 믿는다. 해시태그 운동, 청년 의제 공론화, 온라인 집단토론 등은 모두 대화와 합의의 힘을 보여준다. 하지만 동시에, 청년들은 푸코적 문제의식—즉, 플랫폼 권력, 알고리즘 편향, 발언권의 불평등—을 매일 경험한다. 대화의 장은 존재하지만, 그 대화는 이미 권력의 규율과 프레임 속에서 이루어진다.


따라서 20세기 철학의 문제의식은 오늘 청년 세대의 삶과 직결된다. 청년들이 “대화로 미래를 만들 수 있는가?”라는 하버마스적 질문과, “대화조차 권력의 장치 아닌가?”라는 푸코적 질문을 동시에 던지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하버마스의 소통적 합리성 – 대화의 힘




하버마스(Jürgen Habermas)는 20세기 철학자 가운데서도 ‘희망의 철학자’라 불린다. 전쟁과 전체주의, 그리고 자본주의와 기술 발전의 그늘 속에서 많은 철학자들이 비관적 진단을 내릴 때, 그는 여전히 인간의 합리성 속에서 자유와 정의의 가능성을 보았다. 그가 주목한 것은 ‘도구적 합리성’이 아닌 ‘소통적 합리성’이었다.




1. 도구적 합리성과 소통적 합리성의 구분



하버마스에 따르면, 근대 사회에서 이성은 점차 도구화되어 갔다. 즉, 이성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을 찾는 계산 능력으로 축소되었다. 기업에서의 경영 합리화, 국가의 행정 효율성, 기술 발전의 논리 모두가 이런 도구적 합리성의 예이다. 문제는 이러한 합리성이 인간 해방에 기여하기보다는, 오히려 인간을 통제하고 관리하는 체계로 기능한다는 점이다.


이에 비해 하버마스는 소통적 합리성(communicative rationality)을 제시했다. 이는 단순히 효율적인 결과를 추구하는 이성이 아니라, 사람들이 서로의 주장을 검토하고 이해하며, 합의에 도달하려는 과정 속에서 발휘되는 이성이다. 대화와 토론을 통해 각자가 자신의 입장을 정당화하고, 타인의 논거를 수용하면서 공동의 결론에 이르는 과정이야말로 진정한 합리성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2. 이상적 담화 상황



하버마스의 철학에서 핵심 개념은 ‘이상적 담화 상황(ideal speech situation)’이다. 그는 현실의 토론은 언제나 권력, 돈, 사회적 위계에 의해 왜곡된다고 보았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모두가 동등한 발언권을 가지고, 억압이나 강제가 배제된 상태에서, 오직 더 나은 논거만이 힘을 발휘하는 장을 상상한다면, 거기서 도출되는 합의야말로 가장 정당한 결론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물론 현실에서 완벽한 이상적 담화는 존재하기 어렵다. 그러나 이 개념은 하나의 규범적 기준이 되어, 사회 제도와 민주주의 절차를 설계할 때 방향을 제시한다. 민주적 토론, 시민 참여, 언론의 자유, 공론장의 형성 등은 모두 이 ‘이상적 담화 상황’을 구현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들이다.




3. 공론장의 재발견



하버마스는 또한 『공론장의 구조변동』에서 공론장(public sphere) 개념을 발전시켰다. 그는 근대 초기 시민사회에서 신문, 살롱, 카페 등에서 형성된 공적 토론 공간이 민주주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보았다. 그러나 현대 사회에서는 언론의 상업화, 정치적 선동, 광고와 자본의 영향으로 공론장이 왜곡되었다고 진단했다.


그렇기에 오늘날 민주주의의 회복은 ‘왜곡된 공론장’을 넘어, 다시 합리적이고 개방적인 공론장을 만들어내는 데 달려 있다. 누구든 자유롭게 의견을 표현할 수 있고, 그 의견이 권력이나 돈이 아니라 논리와 근거로 평가받는 사회—하버마스가 꿈꾼 것은 바로 그런 사회였다.




4. 소통적 합리성과 민주주의



하버마스의 소통적 합리성은 민주주의의 핵심이다. 그는 민주주의를 단순한 다수결이 아니라, 대화 속에서 더 나은 논거가 힘을 얻는 과정으로 보았다. 진정한 민주주의는 승자 독식이 아니라 합의와 담론 속에서만 살아난다.


이 시각은 최근 한국 사회의 장면과도 맞닿는다. 2024년 비상계엄 사태 때, 시민들은 SNS와 유튜브를 통해 정보를 공유하며 광장에 모였다. 특히 2030 세대가 응원봉을 들고 전면에 선 장면은 새로운 ‘공론장’의 탄생을 보여주었다. 이어진 탄핵 국면에서는 찬반 진영이 헌재와 광장 앞에서 밤샘 농성을 이어가며 서로 다른 목소리를 내놓았다. 갈등은 첨예했지만, 동시에 민주주의가 여전히 시민 참여 속에서 유지됨을 확인시킨 사건이었다.


오늘날 청년들은 기존 제도권 정치만으로는 목소리를 내기 어렵다고 느낀다. 대신 SNS 해시태그 운동, 기후위기 시위, 광장 행동 등으로 새로운 공론장을 열고 있다. 이는 하버마스가 강조한 “더 나은 논거가 이기는 사회”를 향한 현대적 실천이자, 민주주의를 형식이 아닌 살아 있는 과정으로 만드는 힘이다.




5. 청년 세대와 소통적 합리성



청년들에게 소통적 합리성은 단순한 이론이 아니다. 그것은 삶의 방식이자 생존 전략이다.

대학 강의실과 동아리에서 토론하며 스스로 문제를 정의하는 과정,

스타트업이나 시민단체에서 팀원들과 끝없는 대화를 통해 합의점을 찾아내는 과정,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사회적 이슈를 놓고 치열하게 논쟁하는 과정,


이 모든 장면은 소통적 합리성이 어떻게 실질적 힘으로 작동하는지를 보여준다.


청년들은 이미 기존 권력 구조가 제공하지 않는 자리를 대화의 힘으로 만들어내고 있다. 권력을 가지지 않아도, 자본이 없어도, 대화를 통해 새로운 의제를 발굴하고 사회적 변화를 요구할 수 있다. 하버마스의 철학은 바로 이 점에서 청년 세대의 현실적 경험과 깊이 호응한다.




6. 비판과 한계



물론 하버마스의 이론은 비판을 받는다. 현실의 공론장은 권력과 자본에 의해 끊임없이 왜곡되며, 이상적 담화 상황은 실제로 실현되기 어렵다는 지적이다. 또한 온라인 공간에서의 소통은 때로는 혐오와 왜곡된 정보의 확산으로 변질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비판조차 하버마스 이론의 중요성을 반증한다. ‘이상적 담화 상황’이라는 규범적 이상이 없다면, 우리는 현실의 공론장을 비판할 기준조차 잃게 되기 때문이다.




7. 정리 – 대화의 힘



하버마스는 권력과 자본의 왜곡에도 불구하고, 언어와 대화 속에 인간 해방의 가능성이 있다고 보았다. 그의 소통적 합리성은 청년 세대가 직면한 문제—정치적 배제, 기후 위기, 사회 불평등—에 대한 하나의 대답이 된다. 그것은 단순히 목소리를 크게 내는 것이 아니라, 근거 있는 말과 합리적 대화를 통해 변화를 이끌어내는 길이다.










푸코의 권력 분석 – 미시 권력과 규율 사회




푸코는 권력을 ‘위에서 내려오는 힘’으로만 보지 않았다. 전통적 정치철학이 군주나 국가, 제도 같은 거대한 권력 주체를 중심으로 설명했다면, 푸코는 일상의 구석구석을 들여다보았다. 병원, 학교, 감옥, 군대 같은 제도 속에서 작동하는 규율과 통제가 사실상 더 강력하게 인간의 삶을 지배한다고 보았다. 권력은 위에서만 행사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세부 속에서 미시적으로 작동하며 개인의 몸과 사고를 길들이는 힘이라는 것이다.




1) 권력의 새로운 얼굴 – 미시 권력



푸코가 제시한 핵심은 권력은 억압만이 아니라 생산이라는 통찰이다. 권력은 단순히 “하지 마라”라고 금지하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해야 한다”라는 규율과 습관을 만들어낸다. 예를 들어 학교에서 벨이 울리면 자리에 앉아야 하고, 군대에서는 발을 모아 서야 한다. 이런 훈육은 개인을 억압하는 동시에 ‘순응적인 주체’를 만들어낸다. 즉, 권력은 인간을 ‘길들이는’ 동시에 ‘만들어내는’ 기능을 수행한다.


푸코는 이를 ‘미시 권력’이라 불렀다. 이는 국가 권력보다 더 은밀하고 세밀하며, 개인의 행동과 사고방식을 규정한다. 감옥의 규율, 병원의 환자 관리, 공장의 노동 규칙 같은 것들이 그 사례다.




2) 규율 사회와 감시의 시선



푸코의 대표 저작 『감시와 처벌』은 현대 사회를 ‘규율 사회’로 묘사했다. 과거 권력이 범죄자를 처벌할 때는 공개 처형 같은 물리적 폭력을 사용했지만, 근대 사회는 ‘감시’와 ‘규율’을 통해 사람들을 통제한다. 대표적 비유가 ‘판옵티콘(Panopticon)’이다. 원형 감옥 중앙에 감시탑이 있고, 죄수들은 언제든 감시당할 수 있다는 의식 속에서 스스로 행동을 교정한다.


푸코는 이 모델이 감옥을 넘어 학교, 공장, 병원, 군대 등 사회 전반에 확산되었다고 보았다. 즉, 권력은 더 이상 외부에서 강제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 내부의 ‘자기검열’을 통해 내면화된다. 우리는 감시를 당하기 때문에가 아니라, 감시를 의식하기 때문에 순응한다.




3) 현대 사회와 규율의 확장



푸코가 그린 규율 사회는 21세기에도 생생하게 이어진다. 대학 강의실의 출석 체크, 직장인의 근태 기록, 플랫폼 노동자의 실시간 GPS 추적, SNS의 알고리즘까지 모두 푸코적 감시와 규율의 장치로 읽을 수 있다. 청년들은 이러한 체제 속에서 늘 “관찰당하는 존재”로 살아간다.


예를 들어, 한 청년이 배달 플랫폼에서 일할 때 앱은 실시간으로 위치를 추적하고, 배달 시간이 늦으면 즉각적으로 점수가 떨어진다. 학생들은 온라인 수업 플랫폼에 자동 기록되는 ‘출석 로그’를 통해 평가받는다. 직장인은 사무실 CCTV와 키로그, 메신저 접속 기록으로 ‘근무 충실도’를 증명해야 한다. 모두가 눈에 보이지 않는 판옵티콘 속에서 스스로를 감시하고 규율한다.




4) 권력과 자유 – 푸코의 문제 제기


푸코가 던진 질문은 단순하다. “우리는 자유로운가?”
현대 사회는 과거처럼 폭력적 강압을 드러내지 않는다. 오히려 자유를 보장하는 듯 보이지만, 그 자유 속에 더 은밀한 규율과 통제가 숨어 있다. 푸코의 관점에서 보면, 자유로운 대학생활도 성적과 출석으로 규율되고, 자율적이라고 여겨지는 SNS 활동도 알고리즘의 틀 안에서 소비된다.


푸코는 이러한 권력 구조가 단순히 억압적이라고만 보지 않았다. 그는 권력이 사회를 조직하는 동시에, 저항의 가능성 또한 만들어낸다고 보았다. 규율을 인식할 때 우리는 그것을 비판하고 새로운 가능성을 열 수 있다. 즉, 권력은 전면적으로 거부할 대상이 아니라, 비판적으로 해체하고 다시 구성해야 할 관계망이다.




5) 청년 세대의 경험과 푸코적 현실



청년 세대는 푸코적 권력 구조를 가장 민감하게 체험한다. ‘자기계발’은 단순히 개인의 선택이 아니라 사회가 요구하는 규율이다. “스펙을 쌓아야 한다”, “네트워킹을 해야 한다”, “쉬는 시간마저 생산적으로 써야 한다”는 압박은 청년들에게 보이지 않는 감시탑이 된다.


또한 SNS에서 청년들은 자기 표현의 자유를 누리는 듯하지만, 동시에 ‘좋아요’와 ‘조회수’라는 규율에 갇혀 행동한다. 한 장의 사진을 올릴 때도, ‘내가 어떻게 보일까’, ‘얼마나 호응을 얻을까’를 고려한다. 이는 푸코가 말한 ‘내면화된 감시’의 전형적 사례다.






정리



푸코의 권력 분석은 청년 세대가 살아가는 오늘의 현실과 깊이 겹쳐진다. 그는 권력을 단순히 국가나 제도의 억압이 아니라, 일상의 세세한 습관과 규율, 감시의 구조로 파악했다. 우리가 자유롭다고 생각하는 영역조차도 사실은 수많은 규율의 작동 속에 있으며, 그 속에서 우리는 스스로를 길들이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푸코는 이런 구조를 인식하는 순간, 저항과 새로운 가능성의 길이 열린다고 보았다.


즉, 푸코는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은 스스로 선택한다고 믿는 그 행동, 정말로 자유로운가? 아니면 규율과 감시가 만든 습관을 따르는 것인가?”











토론 장면 재현 – 하버마스와 푸코의 대화




장면 설정 – 한 대학 강당에서 열린 공개 토론회
무대 위 스크린에는 2024년 12월 비상계엄 사태와 시민의 저항, 그리고 탄핵 심판을 둘러싼 농성 현장의 사진이 교차로 비친다. 객석에는 대학생과 청년 활동가들이 가득 앉아 있다. 사회자가 입을 열며 두 철학자에게 질문을 던진다.






사회자
“오늘 우리는 두 사상가를 모셨습니다. 하버마스 교수님과 푸코 교수님. 두 분께 묻겠습니다. 2024년 12월, 한국에서 시민들이 계엄군을 막아낸 사건이 있었습니다. SNS로 소식이 퍼지자 수많은 청년과 시민이 거리로 뛰쳐나와 군용 트럭 앞에 맨몸으로 서 있었습니다. 이는 ‘시민이 권력을 멈춘 밤’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이 사건을 어떻게 보십니까?”






하버마스
“저는 이 장면을 한국 민주주의의 새로운 공론장이자 소통적 합리성의 힘으로 봅니다. 시민들은 무기를 들지 않았습니다. 대신, SNS를 통해 사실을 공유했고, 광장에서 서로의 목소리를 확인하며 합리적 판단을 내렸습니다. 바로 이것이 제가 말해온 공론장의 진화된 형태입니다. 다수가 모여서 단순히 소리치는 것이 아니라, 시민들이 스스로 토론하고 의견을 조율하면서 권력의 폭주를 막아낸 사건이죠. 특히 응원봉을 들고 앞자리에 선 2030 여성들의 모습은 민주주의의 미래를 여는 새로운 세대 주체성을 보여주었습니다.”






푸코
“흥미로운 해석입니다만, 저는 다르게 봅니다. 계엄을 막아낸 것은 단순히 ‘합리적 담론’이 아니라, 몸을 던져 권력의 장치에 맞선 저항의 행위였습니다. 맨몸으로 트럭 앞에 서는 순간, 그들의 신체는 권력의 미시 권력과 맞닿아 있었습니다. 권력은 늘 육체를 통해 작동합니다. 규율하고, 감시하고, 길들이죠. 이번 사건에서도 계엄군은 바로 신체를 통제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시민들이 스스로의 몸을 정치적 무기로 전환한 겁니다. 그것은 권력의 미시 권력을 뒤집는 힘이었습니다.”






사회자
“흥미롭습니다. 그런데 다른 사례를 보죠. 바로 탄핵 심판을 앞두고 벌어진 ‘찬탄파 vs 반탄파’의 밤샘 단식 농성입니다. 한쪽은 ‘윤 대통령 파면’을 외치며 철야 농성을, 다른 쪽은 ‘탄핵 무효’를 주장하며 헌법재판소 앞에 자리를 지켰습니다. 심지어 나흘째 단식 중인 이들도 있었죠. 이 장면은 어떻게 해석하시겠습니까?”






푸코
“저는 이 장면에서 권력의 미시 권력이 얼마나 깊숙이 몸을 지배하는지를 봅니다. 단식은 단순히 의지의 표현이 아닙니다. 권력은 개인의 몸을 규율하는 동시에, 개인은 그 몸을 저항의 언어로 돌려줍니다. 헌재 앞에서 은박매트 위에 담요를 두른 시민들, 그리고 단식을 통해 권력에 압박을 가하는 집단 모두, 권력의 작동을 몸으로 체현하고 있습니다. 권력은 억압만이 아니라, 저항의 형식으로도 작동한다는 것이지요. 저는 이것이 ‘저항하는 신체들의 정치학’이라고 부릅니다.”






하버마스
“물론 푸코 교수님 말씀에 동의하는 부분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여전히 공론장의 측면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이 농성 현장은 단순히 신체의 저항만이 아니라, 서로 다른 논거가 부딪히는 공간이기도 합니다. 찬탄파와 반탄파가 물리적 충돌 없이 각자의 주장을 밤새 이어가는 것, 바로 이것이 민주주의의 역설적 힘입니다. 다수가 같은 결론에 도달하지 않더라도, 서로의 목소리를 내고 듣는 과정 속에서 공론장은 유지됩니다. 저는 이 과정을 통해 사회가 합리성의 토대를 다시 다질 수 있다고 믿습니다.”






청년 청중
(한 대학생이 손을 든다)
“두 분 말씀 잘 들었습니다. 하지만 저 같은 청년 입장에서 보면, 때로는 답답합니다. 우리는 촛불집회에도, 기후 시위에도, 이번 계엄 저지에도 나섰습니다. 하지만 제도 정치의 변화는 느립니다. 결국 권력자들의 계산 속에서 우리의 목소리가 소모되는 건 아닐까요?”






푸코
“그 불안은 당연합니다. 권력은 언제나 목소리를 흡수하고 길들이려 하니까요. 하지만 중요한 건 청년 세대가 몸을 던져 새로운 실천을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규율 권력은 피할 수 없지만, 그것을 전복하는 방식은 늘 존재합니다.”






하버마스
“저는 희망을 봅니다. 청년 세대가 광장에서, 온라인에서, 그리고 일상의 작은 토론장에서 공론장을 새롭게 열고 있기 때문입니다. 느리고 불완전해도, 결국 민주주의는 대화와 합리성 위에서만 지탱될 수 있습니다. 청년들이 바로 그 대화를 이어가는 주체라는 점에서, 한국 사회의 미래는 여전히 열려 있습니다.”






� 정리


이 토론 장면은 “소통적 합리성(하버마스)”과 “권력의 미시 권력(푸코)”이라는 두 철학적 틀을, 2024년 계엄 저지와 2025년 탄핵 농성전이라는 실제 사건 위에 겹쳐 해석해 보였다. 그리고 질문은 다시 청년 세대로 향한다.


- 청년은 합리적 대화의 새로운 공론장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

- 동시에 권력의 미시 권력 속에서 자기 몸과 일상을 저항의 정치학으로 어떻게 바꿀 것인가?


바로 이것이 이 시대 청년에게 던져진 이중의 과제다.









실제 사례 분석 – 한국 사회의 권력과 소통 문제, 청년의 경험




한국 사회는 지난 수십 년 동안 민주주의의 발전과 동시에 권력과 소통의 문제를 반복적으로 겪어 왔다. 그 과정에서 청년 세대는 언제나 중요한 목격자이자 행위자였다. 하버마스가 말하는 합리적 공론장의 부재와 푸코가 지적하는 권력의 미시적 작동은 지금 이곳, 청년들의 삶 속에서 생생하게 재현된다.






1) 계엄 사태와 공론장의 힘



2024년 말 발생했던 비상계엄 사태는 한국 사회가 여전히 권력의 폭주 가능성을 안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동시에, 이를 막아낸 것은 정치 엘리트가 아니라 시민이었다. 특히 SNS를 중심으로 청년 세대는 상황을 실시간으로 공유했고, ‘응원봉’과 휴대폰 불빛을 들고 거리에 나섰다.
하버마스적 관점에서 보자면, 이는 전통적 의미의 토론장이 아니라 디지털 공론장이었다. 불과 몇 시간 만에 수십만 건의 게시글과 해시태그가 확산되며, 권력의 불법적 시도를 중단시킨 이 사건은 청년들이 새로운 형태의 민주주의 실천을 만들어내고 있음을 보여준다.






2) 탄핵 정국과 규율 권력의 작동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는 푸코가 강조한 규율 권력의 작동이 뚜렷하게 나타났다. 2025년 초 윤석열 대통령 탄핵 심판을 둘러싼 찬반 집회 현장에서 청년들은 또다시 중심에 섰다. 일부는 ‘찬탄파’로, 일부는 ‘반탄파’로 나뉘어 헌법재판소 앞에서 밤샘 농성과 단식을 이어갔다.
이 장면은 권력이 단순히 국가기관을 통해서만 작동하는 것이 아님을 드러낸다. 권력은 개인의 신체, 일상의 규율, 집단적 몸짓을 통해 드러난다. 단식이라는 행위는 단순한 개인의 결단이 아니라, 권력이 개인의 몸을 통제하고 그 몸이 다시 권력에 맞서 싸우는 장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청년들의 참여는 곧 권력이 어떻게 몸을 매개로 작동하고 저항으로 전환되는지를 드러내는 상징적 사건이었다.






3) 청년 세대와 ‘소통의 피로’



청년 세대는 스스로 공론장을 열고 권력에 저항하면서도 동시에 깊은 피로를 느낀다.
첫째, 정치적 무력감. SNS에서 아무리 목소리를 높여도, 제도 정치의 구조는 쉽게 바뀌지 않는다. 법과 제도는 여전히 기성세대가 쥐고 있으며, 청년들의 의견은 “참신하지만 미숙하다”는 이유로 소외되기 일쑤다.
둘째, 정보의 과잉. 청년들은 하루에도 수십 개의 뉴스 알림과 게시글을 소비한다. 그러나 진실과 가짜가 섞인 이 정보 환경 속에서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라는 피로가 겹쳐진다. 결국 정치적 토론이 활발할수록, 오히려 진리에 대한 회의와 냉소가 커진다.
셋째, 일상의 부담. 취업, 학자금 대출, 불안정 노동 속에서 청년들에게 정치 참여는 ‘선택적 사치’가 된다. 공론장에 서고 싶어도 생존의 압박이 발목을 잡는다. 이때 권력은 청년들의 침묵을 이용한다.






4) 하버마스와 푸코의 렌즈로 본 청년의 경험



- 하버마스의 관점에서 청년 세대는 ‘새로운 공론장의 창조자’다. SNS, 대학 토론, 시민 집회 등에서 청년들은 끊임없이 새로운 대화 방식을 실험한다. 그러나 그 공론장은 종종 ‘피로 사회’의 벽에 부딪히며, 제도 정치와의 연결 고리가 약하다.


- 푸코의 관점에서 청년 세대는 ‘규율 권력의 실험대’ 위에 놓여 있다. 학점 경쟁, 스펙 관리, 취업 준비 같은 과정은 권력이 청년을 길들이는 장치다. 동시에 청년들은 그 규율을 전복하고 저항하는 방식으로, 몸과 일상의 언어를 정치적 행위로 변환한다.






5) 사례에서 드러난 질문



이 모든 사례가 우리에게 남기는 질문은 단순하다.


- 청년들은 어떻게 새로운 공론장을 지켜낼 것인가?

- 권력의 규율 속에서도 자유로운 주체로 설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 소통의 피로와 정치적 무력감을 넘어, 청년들은 어떻게 자신들의 미래를 설계할 수 있을까?


계엄을 멈춘 불빛, 헌재 앞의 단식, 그리고 SNS에 남겨진 수많은 글과 이미지. 이 모든 장면은 한국 사회의 권력과 소통의 문제를 보여주면서도, 동시에 청년 세대가 미래를 향해 질문을 던지는 방식이기도 하다.









청년이 권력과 자유 사이에서 균형을 어떻게 찾아야 하는가





앞선 사례와 분석에서 우리는 한국 사회의 현실 속에서 권력과 자유의 긴장이 어떻게 드러나는지를 확인했다. 계엄 사태에서 드러난 국가 권력의 폭주, 탄핵 정국 속에서 펼쳐진 집단적 갈등, 그리고 청년들의 SNS 기반 참여는 모두 민주주의가 여전히 역동적인 실험대 위에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 경험들은 동시에 청년들에게 무거운 질문을 남긴다.
“권력의 작동 속에서 자유를 어떻게 지킬 것인가? 그리고 자유의 외침이 현실적 변화를 낳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가?”






1) 하버마스의 시선 – 자유는 ‘대화의 공간’에서 유지된다



하버마스의 소통적 합리성은 청년 세대가 처한 현실에 중요한 길잡이가 된다. 자유는 단순히 억압의 부재가 아니라, 의견이 들리고 논거가 검증되는 과정 속에서만 의미를 가진다.
청년들은 SNS 해시태그 운동, 기후위기 시위, 대학 토론회 등에서 새로운 공론장을 창조해왔다. 하지만 이러한 목소리가 제도 정치와 연결되지 않는다면, 결국 “외침은 있었으나 변화를 만들지 못했다”라는 좌절로 끝나게 된다. 하버마스적 관점에서 청년 세대의 과제는 자발적 공론장을 제도적 통로와 연결하는 다리를 만드는 것이다. 그 다리를 통해서만 자유는 공허한 구호가 아니라 사회적 제도와 법적 장치로 뿌리내릴 수 있다.






2) 푸코의 시선 – 권력은 일상 속에서 작동한다



푸코의 분석은 다른 경고를 던진다. 그는 권력을 단순히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지배가 아니라, 학교, 직장, 병원, SNS, 심지어 가정 속에서 미시적으로 작동하는 규율로 이해했다.
청년들의 삶은 바로 이런 미시 권력의 교차점 위에 있다. 학점 경쟁, 취업 스펙, 기업의 성과 관리, SNS에서의 자기 관리까지—청년들은 자신도 모르게 권력의 규율에 길들여진다. 자유를 외치는 동시에, 내면 깊숙이 권력이 심어놓은 ‘스스로 검열하기’의 습관에 익숙해지는 것이다. 푸코의 통찰은 청년들에게 “권력은 제도 너머, 네 일상 속에 있다”라는 사실을 자각하게 만든다.






3) 균형의 모색 – 청년 세대의 두 가지 실천



따라서 청년이 권력과 자유 사이에서 균형을 찾는 길은 두 가지 실천에 달려 있다.


- 첫째, 공론장의 재구성. 청년들은 자신들의 목소리를 단순한 분노의 외침이 아니라, 논거와 사실을 기반으로 한 담론으로 발전시켜야 한다. 이는 하버마스가 말한 ‘더 나은 논거가 힘을 가지는 사회’를 가능케 한다.

- 둘째, 일상의 권력 인식. 청년들은 권력을 국가 제도나 정치적 사건에만 국한시키지 말고, 자신의 삶을 규율하는 보이지 않는 장치들을 인식해야 한다. 자기 검열, 경쟁 압박, 데이터화된 자기 이미지가 어떻게 자유를 제약하는지를 깨닫는 순간, 청년은 비로소 자유의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할 수 있다.






4) 질문으로 남는 과제



결국 이 중간 지점에서 남는 물음은 단순하지 않다.

권력은 필요하다. 그러나 그 권력이 민주주의와 시민의 자유를 파괴하지 않도록 어떻게 감시하고 조율할 것인가?

자유는 필요하다. 그러나 그것이 단순한 개인의 방종이 아니라 공동체와 연결된 책임 있는 자유로 자리 잡으려면 어떤 노력이 필요한가?

청년 세대는 어떻게 ‘디지털 공론장’과 ‘현실 제도 정치’를 연결할 수 있을까?






5) 청년이 던져야 할 새로운 균형의 답



이 해설이 던지는 핵심은 분명하다. 청년 세대는 권력의 감시자이자 자유의 창조자라는 이중적 역할을 동시에 떠안고 있다. 권력의 규율을 직시하면서도, 새로운 공론장을 통해 자유를 확장해야 한다. 균형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청년 스스로 매 순간 만들어가는 실천이다.











결론 및 성찰 – 청년 세대가 던져야 할 최종 질문





권력과 자유, 소통과 규율. 하버마스와 푸코가 남긴 철학적 긴장은 단순한 학문적 논쟁이 아니다. 그것은 지금 청년 세대가 매일의 삶 속에서 부딪히는 질문이다. 광장에서의 집회, 온라인 해시태그 운동, 대학 강의실의 토론, 취업을 위한 자기소개서 한 줄까지—청년들의 현실은 권력과 자유가 끊임없이 교차하는 무대다. 그렇기에 이 장의 결론은 청년 세대에게 최종적인 질문을 던지는 것으로 귀결된다.






1) 권력 앞에서 청년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푸코가 보여준 통찰은 여전히 유효하다. 권력은 단순히 ‘위에서 내려오는 법과 명령’이 아니라, 청년들의 일상적 선택과 습관 속에 내재한 규율로 작동한다. 스마트폰 속 알고리즘은 무엇을 읽고, 무엇을 믿고, 어떻게 행동할지를 미묘하게 지배한다. 대학의 학점제도, 기업의 인재 평가 시스템, SNS의 자기 브랜딩 문화는 청년들에게 자유롭게 살라고 말하면서도 동시에 특정한 방식으로만 살아가도록 몰아간다.
따라서 청년 세대가 던져야 할 첫 번째 질문은 이것이다.
“나는 진정 나의 의지로 살아가고 있는가, 아니면 보이지 않는 권력의 규율 속에 길들여지고 있는가?”






2) 자유는 어떻게 확보되는가?



하버마스의 목소리는 또 다른 지점을 일깨운다. 자유는 고립된 개인의 선언에서 끝나지 않는다. 자유는 함께 모여 대화하고 논거를 검증하는 과정 속에서만 제도적·사회적 의미를 가진다. SNS에 글을 올리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 목소리가 공론장으로 확장되고, 논리와 근거를 통해 설득력을 얻을 때 비로소 자유는 사회적 힘이 된다.
따라서 청년 세대가 던져야 할 두 번째 질문은 이것이다.
“나는 나의 자유를 단순한 외침으로 남길 것인가, 아니면 대화와 설득을 통해 사회적 변화로 연결할 것인가?”






3) 권력과 자유의 균형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권력은 억누르기도 하지만, 동시에 질서를 가능하게 한다. 자유는 해방을 주기도 하지만, 동시에 무책임으로 흐를 위험도 있다. 따라서 권력과 자유의 균형은 결코 한 번의 결정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그것은 매 순간의 실천 속에서 다시 세워져야 한다.
청년 세대는 이 지점에서 세 번째 질문을 던져야 한다.
“나는 오늘의 삶 속에서 권력에 저항하는 동시에, 자유를 책임 있게 행사하고 있는가?”






4) 최종 성찰 – 청년의 몫



결국 하버마스와 푸코의 대화는 우리에게 두 가지 서로 다른 길을 보여주었지만, 청년 세대에게 남는 메시지는 하나다. 자유는 권력의 빈틈에서만 피어나는 것이 아니라, 권력을 직시하고 그것을 대화와 성찰로 견제할 때에만 지속될 수 있다.
따라서 청년 세대가 내일을 설계하기 위해 던져야 할 최종 질문은 다음과 같다.


- “나는 지금 권력의 질서를 따르는가, 아니면 그것을 성찰하며 나의 길을 개척하는가?”

- “나의 자유는 단순한 구호에 그치는가, 아니면 사회적 책임과 연결된 자유인가?”

- “우리는 어떤 균형 위에서 미래를 세워갈 것인가?”






맺음말



이 물음에 대한 답은 단순하지 않다. 그러나 질문을 품는 순간, 청년 세대는 이미 하버마스와 푸코의 철학적 길 위에 서 있는 것이다. 권력의 미시적 작동을 감지하고, 동시에 공론장에서 대화를 통해 더 나은 논거를 찾으려는 노력—이 두 가지가 함께 갈 때 청년의 자유는 비로소 살아 숨 쉬게 된다.
따라서 결론은 명확하다. 청년 세대야말로 권력과 자유의 균형을 묻고, 그 답을 실천으로 만들어낼 가장 중요한 주체다. 이 질문을 품고 살아가는 순간, 청년들은 단순히 권력의 피지배자가 아니라, 자유와 미래의 설계자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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