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 탐구 26] 비트겐슈타인 vs 데리다
저녁 무렵, 한 대학가 카페. 네 명의 청년이 노트북을 펼쳐두고 대화를 이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대화는 목소리보다 스마트폰 화면에서 더 활발하게 오갔다.
“ㅋㅋㅋ 이거 밈 봤어?” 한 학생이 휴대폰을 내밀었다. 짧은 영상 클립 하나가 테이블 위를 순식간에 웃음바다로 만들었다. 그러나 같은 영상을 본 옆자리 학생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게 왜 웃겨? 난 좀 불편한데…”
순간 웃음은 멈췄다. 같은 이미지, 같은 영상인데 누군가에게는 ‘웃음’이고 다른 누군가에게는 ‘불편함’이었다.
또 다른 학생이 끼어들었다.
“요즘 이모티콘도 그래.

하나 보냈는데, 어떤 사람은 친절하다고 받아들이고, 어떤 사람은 비꼰다고 오해하더라고.”
네 번째 학생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해시태그도 마찬가지야. #프리라이프 라는 단어를 쓰면 어떤 사람은 ‘자유로운 삶’을 의미한다고 생각하고, 또 어떤 사람은 ‘무책임한 태도’라고 받아들이지.”
짧은 대화 속에서 드러난 것은 하나의 단어, 하나의 기호가 결코 단일한 의미를 갖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언어는 쓰이는 맥락에 따라, 혹은 읽는 사람에 따라 전혀 다른 뜻으로 변주되고 있었다.
“그럼 언어의 의미는 어디에 있는 걸까?” 누군가 진지하게 물었다.
“쓰이는 맥락에 따라 달라지는 거지.”
“아니야, 언어는 애초에 고정된 의미를 가질 수 없어. 늘 흔들려.”
대화는 점점 철학적 질문으로 흘러갔다. 언어의 의미는 사용 속에서 규정되는가, 아니면 언제나 해체되고 흔들리는가?
이 질문은 사실 새로운 것이 아니다. 20세기 철학의 거대한 두 인물,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과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가 이미 오래전부터 치열하게 고민했던 문제였다.
- 비트겐슈타인은 언어의 의미가 본질적으로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사용 속에서 규칙처럼 작동하는 ‘언어 게임’에 따라 달라진다고 말했다.
- 데리다는 언어가 결코 고정된 의미를 갖지 않으며, 모든 텍스트는 끊임없이 다른 텍스트로 미끄러져 의미가 지연되고 해체된다고 주장했다.
오늘날 청년들이 매일 사용하는 디지털 언어 ― 밈, 이모티콘, 해시태그, 줄임말, 신조어 ― 속에서 이 두 철학자의 목소리가 되살아난다.
이 회차의 여정은 바로 여기에서 출발한다. 비트겐슈타인의 언어 게임과 데리다의 해체라는 두 철학의 틀을 통해, 디지털 언어가 보여주는 새로운 가능성과 혼란을 탐구해보고자 한다.
20세기 언어철학을 새롭게 연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 1889~1951)은 초기와 후기를 가르는 사유의 전환으로 유명하다. 초기에는 언어가 세계를 거울처럼 반영한다고 보았지만, 후기 철학에서는 완전히 다른 관점을 제시했다.
그는 『철학적 탐구(Philosophical Investigations)』에서 “언어의 의미는 사용 속에 있다(meaning is use)”라고 말했다. 이는 언어가 고정된 본질을 가진 것이 아니라, 맥락과 규칙에 따라 의미가 달라진다는 선언이었다.
비트겐슈타인은 이를 설명하기 위해 언어 게임(language games)이라는 개념을 도입했다. 언어는 체스나 축구처럼 각 게임마다 규칙이 다르듯, 사회적 맥락 속에서 다르게 작동한다는 것이다.
같은 단어라도 가정에서, 법정에서, 교실에서 쓰일 때 의미가 달라진다.
언어는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사람들이 어떤 규칙을 공유하고 어떻게 사용하는가에 따라 의미가 결정된다.
즉, 언어란 살아있는 행위이고, 의미는 사용의 장에서 끊임없이 생성된다.
프랑스 철학자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 1930~2004)는 언어에 대한 기존의 모든 안정적 이해를 흔들어놓았다. 그는 해체(deconstruction)라는 독창적 방법을 통해, 텍스트와 언어가 결코 고정된 의미를 갖지 못한다는 사실을 드러냈다.
데리다의 핵심 개념은 차연(différance)이다. 이는 두 가지 의미를 동시에 지닌다.
1. 차이(différence) ― 언어의 의미는 다른 언어와의 차이 속에서만 발생한다.
2. 지연(différer) ― 그러나 그 의미는 결코 최종적으로 도착하지 않고, 끝없이 다른 기호로 미끄러진다.
예를 들어, “사랑”이라는 단어를 정의하려 하면 우리는 다른 단어들(열정, 관계, 헌신 등)로 설명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단어들도 다시 다른 단어들로 설명해야 하며, 의미는 끝없이 지연된다. 따라서 언어는 언제나 흔들리고 미완의 상태에 있다.
데리다에게 언어란 본질적으로 불안정하고 다층적인 흔들림의 장이다. 텍스트는 항상 해체될 수 있으며, 의미는 결코 고정되지 않는다.
비트겐슈타인과 데리다는 모두 언어가 고정된 본질을 가진다는 전통적 관념을 거부했다. 그러나 두 사람의 결론은 다르다.
- 비트겐슈타인
언어는 맥락과 규칙 속에서 의미를 갖는다.
언어 게임의 참여자들이 공유하는 규칙이 의미를 형성한다.
따라서 언어는 사용 속에서 안정된 질서를 가질 수 있다.
- 데리다
언어는 규칙으로도 붙잡을 수 없는 무한한 흔들림이다.
의미는 항상 지연되고 해체되며, 최종적 도착점은 없다.
따라서 언어는 근본적으로 불안정하고 다층적이다.
요약하자면, 비트겐슈타인은 언어의 의미를 ‘규칙적 사용’에서 찾았고, 데리다는 언어의 의미가 ‘끝없는 해체’ 속에 있음을 강조했다.
이 두 사상은 디지털 언어의 풍경 속에서 더욱 생생하게 다가온다.
- 비트겐슈타인의 언어 게임은 이모티콘, 밈, 해시태그처럼 특정 맥락에서만 통용되는 디지털 언어의 특징을 설명해준다. 같은 기호라도 다른 커뮤니티에서는 전혀 다른 뜻으로 쓰인다.
- 데리다의 해체는 디지털 언어의 불안정성을 드러낸다. 같은 이모티콘 하나가 친절로 읽히기도, 비꼼으로 읽히기도 하는 것처럼 의미는 언제나 흔들리고 미끄러진다.
즉, 두 철학자는 디지털 시대의 언어 사용을 해석하는 데 서로 다른, 그러나 상호 보완적인 틀을 제공한다.
서울의 한 IT기업 컨퍼런스 홀. 주제는 “디지털 언어, 그 의미는 어디에 있는가?”. 객석에는 대학생, 개발자, 디자이너, 크리에이터 등 청년 세대가 가득했다. 무대 위에는 두 명의 철학자가 자리했다.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과 자크 데리다.
사회자가 마이크를 잡았다.
“오늘 우리는 밈, 이모티콘, 해시태그로 넘쳐나는 디지털 시대에 언어의 의미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를 묻습니다. 비트겐슈타인 선생, 먼저 말씀 부탁드립니다.”
비트겐슈타인은 천천히 말을 이었다.
“언어의 의미는 본질적으로 고정된 것이 아닙니다. 언어는 언어 게임입니다. 사람들이 어떤 규칙을 공유하며 사용하는가에 따라 의미가 생깁니다.
예를 들어,

이모티콘이 어떤 집단에서는 ‘친절’의 의미로 통용되지만, 다른 집단에서는 ‘비꼼’으로 쓰일 수 있습니다. 이는 언어 게임의 규칙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정확한 의미’를 찾기보다는, 그 언어가 사용되는 맥락과 규칙을 살펴야 합니다. 의미는 사용 속에서 살아 있습니다.”
청중 중 몇몇은 고개를 끄덕이며 메모를 했다.
곧이어 데리다가 마이크를 잡았다.
“비트겐슈타인 선생의 말은 흥미롭습니다. 그러나 저는 언어를 그렇게 안정적으로 보지 않습니다. 언어는 규칙으로도 완전히 붙잡을 수 없습니다.
언어의 의미는 언제나 차연(différance) 속에서 미끄러집니다. 어떤 단어를 정의하려 해도, 우리는 다른 단어들로 설명할 수밖에 없고, 그 단어들 역시 다른 단어로 이어집니다. 결국 의미는 끝없이 지연되고 해체됩니다.
예를 들어, #프리라이프 라는 해시태그를 보십시오. 어떤 이에게는 ‘자유로운 삶’이지만, 또 다른 이에게는 ‘무책임’으로 읽힙니다. 규칙을 공유해도, 언어는 그 자체로 흔들리고 다의적입니다. 언어는 결코 고정되지 않습니다.”
청중은 술렁였다. “그럼 언어는 애초에 확실한 의미를 가질 수 없다는 건가?”라는 속삭임이 들려왔다.
한 학생이 손을 들었다.
“최근에 어떤 밈을 공유했는데, 친구가 웃지 않고 기분 나빠하더라고요. 저는 웃기다고 생각했는데요. 이런 경우 의미는 어디에 있나요? 제 의도에 있나요, 아니면 친구의 해석에 있나요?”
비트겐슈타인:
“그것은 언어 게임의 규칙에 달려 있습니다. 당신의 집단에서는 웃음을 의미할 수 있지만, 친구의 집단에서는 불편함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언어가 사용된 맥락과 규칙을 파악하는 것입니다.”
데리다:
“저는 이렇게 봅니다. 의미는 애초에 하나로 고정될 수 없습니다. 밈은 본질적으로 해체 가능한 텍스트입니다. 당신의 의도와 친구의 해석은 모두 의미의 일부입니다. 언어는 항상 다르게 읽히고, 그 다름이 본질입니다.”
학생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여전히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비트겐슈타인:
“데리다 선생, 언어가 무한히 해체된다면 우리는 어떻게 소통할 수 있습니까? 규칙을 공유하기 때문에 소통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언어 게임이 없다면 언어는 단순한 혼란일 뿐입니다.”
데리다:
“하지만 선생, 규칙을 공유한다 해도 그 규칙 자체가 언제든 해석되고 흔들립니다. 언어 게임은 결코 안정된 것이 아닙니다. 규칙 속에서도 의미는 미끄러집니다. 소통은 항상 불완전하며, 그 틈새에서 새로운 의미가 생겨납니다.”
청중은 숨을 죽이고 두 사람의 공방을 지켜보았다. 어떤 학생은 “둘 다 맞는 것 같은데…”라고 중얼거렸다.
이번에는 인공지능을 전공하는 대학원생이 마이크를 잡았다.
“저는 챗봇 개발을 하고 있습니다. 같은 질문을 해도, AI가 다른 맥락에서 다른 답을 내놓습니다. 때로는 틀리거나 오해를 불러일으키기도 하죠. 이런 현상은 두 분 중 누구의 설명과 더 가깝습니까?”
비트겐슈타인:
“AI의 답변은 특정한 언어 게임 속에서 학습된 것입니다. 데이터와 규칙이 다르면 결과도 달라집니다. 이는 언어 의미가 사용 맥락 속에서 정해진다는 나의 주장을 잘 보여줍니다.”
데리다:
“그러나 AI의 답변은 또한 언제든 흔들리고 불확실합니다. 같은 질문도 끝없이 다른 해석으로 이어질 수 있죠. 이것이 바로 제가 말한 언어의 해체 가능성입니다. AI 언어는 의미의 불안정성을 극적으로 드러냅니다.”
청중은 박수를 보냈다. AI 언어의 혼란이 두 철학자의 주장을 동시에 증명하는 듯했기 때문이다.
토론이 끝나자 사회자가 마무리했다.
“오늘 우리는 두 거장의 다른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은 언어가 규칙과 맥락 속에서 의미를 갖는다고 했습니다. 데리다는 언어가 언제나 흔들리며 해체된다고 했습니다.
청년 여러분, 이제 질문은 여러분의 몫입니다.
디지털 언어의 세계에서, 여러분은 의미를 규칙 속에서 찾을 것입니까?
아니면 흔들림과 해체 속에서 이해할 것입니까?
밈, 이모티콘, 해시태그가 넘쳐나는 이 시대, 우리는 어떤 언어 윤리를 만들어가야 할까요?”
청중은 박수를 보냈다. 그러나 많은 이들의 눈빛 속에는 새로운 물음이 자리하고 있었다.
오늘날 청년들이 가장 빈번히 사용하는 언어는 텍스트보다 이미지와 상징에 가깝다. 밈(meme), 짤방, 이모티콘, GIF는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대화의 핵심을 대신하는 언어가 되었다.
예를 들어, 같은 ‘

’ 이모티콘이 어떤 대화에서는 “정말 웃겨서 눈물이 난다”는 의미지만, 또 다른 대화에서는 “비꼬는 웃음”이나 “허탈함”으로 쓰이기도 한다. 맥락이 곧 의미를 만든다는 점에서 이는 비트겐슈타인의 언어 게임 이론을 생생히 보여준다.
그러나 이 언어는 동시에 불안정하다. 상대방이 다른 맥락에서 해석하면 오해가 발생한다. 데리다가 말한 것처럼, 언어의 의미는 언제나 흔들리고 미끄러지며 해체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디지털 언어의 또 다른 대표적 현상은 해시태그 운동이다.
#MeToo, #BlackLivesMatter, #ClimateStrike 같은 태그는 단순한 단어 이상이다.
그것은 집단적 경험과 연대를 소환하며, 지역과 세대를 넘어 새로운 언어 게임을 만든다.
그러나 해시태그는 결코 단일한 의미로 고정되지 않는다. 같은 #MeToo도 미국에서는 성폭력 고발 운동으로 읽히지만, 한국에서는 정치적, 문화적 맥락에 따라 전혀 다른 층위의 의미가 덧입혀졌다. 이는 데리다의 차연(différance) 개념을 잘 보여준다. 해시태그는 끊임없이 새로운 의미를 낳으며, 결코 고정되지 않는다.
한국 청년들의 디지털 언어는 신조어와 줄임말이 빠르게 만들어지고 사라진다.
‘만반잘부’(만나서 반가워 잘 부탁해),
‘꾸안꾸’(꾸민 듯 안 꾸민 듯),
‘킹받네’(화난다).
이러한 표현은 특정 세대나 커뮤니티에서 공유될 때만 통용된다. 언어 게임의 규칙을 모르면 전혀 이해할 수 없다. 예를 들어, 중장년층이나 외국인은 이런 표현을 낯설어하고, 때로는 전혀 다른 의미로 오해한다.
이는 비트겐슈타인의 관점을 지지하는 사례다. 언어는 본질이 아니라 사용 속에서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동시에 신조어가 빠르게 소멸하는 현상은 데리다의 관점도 드러낸다. 언어는 항상 흔들리며, 의미는 지속적으로 지연된다.
AI 번역기와 챗봇은 디지털 언어의 새로운 실험장이다.
같은 문장을 입력해도, 번역기는 맥락을 다르게 해석해 전혀 다른 결과를 내놓는다.
챗봇은 동일한 질문에 상황에 따라 서로 다른 답을 준다.
예컨대, 영어 표현 “That’s sick”은 맥락에 따라 “그건 아프다” 혹은 “정말 멋지다”로 번역될 수 있다. 규칙을 학습한 기계조차 언어의 흔들림을 완전히 통제할 수 없다. 이는 언어의 본질적 불안정성을 보여주는 현대적 사례다.
한국 청년들은 디지털 언어를 통해 새로운 소통의 장을 누린다.
짧은 채팅 언어와 줄임말은 빠른 속도의 일상 소통에 최적화되어 있다.
밈과 이모티콘은 복잡한 감정을 짧게 표현할 수 있는 효율적인 수단이다.
그러나 동시에 이 언어는 오해와 단절을 낳는다.
세대 간, 집단 간 언어 게임의 규칙이 다르면 의미가 전혀 다르게 해석된다.
같은 표현이 순식간에 다른 의미로 전환되며, 지속적인 소통의 피로감을 만든다.
결국 디지털 언어는 비트겐슈타인이 말한 ‘맥락적 규칙의 언어 게임’과 데리다가 말한 ‘해체와 흔들림의 언어’가 동시에 작동하는 현장이다.
청년 세대가 매일 사용하는 디지털 언어는 비트겐슈타인과 데리다의 철학을 동시에 증명한다.
- 비트겐슈타인적 통찰: “언어의 의미는 사용 속에 있다.” → 신조어, 줄임말, 밈은 특정 공동체 안에서 규칙이 공유될 때만 이해된다.
- 데리다적 통찰: “언어는 언제나 흔들린다.” → 같은 단어와 기호도 집단에 따라, 맥락에 따라 끝없이 미끄러지며 고정되지 않는다.
즉, 청년들은 언어 게임의 규칙을 통해 소통하면서도, 그 규칙조차 해체되는 현장을 실시간으로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청년 세대는 소통 속에서 두 가지 상반된 욕구를 갖는다.
1. 안정성의 욕구: 모두가 같은 의미로 이해할 수 있는 규칙과 질서를 원한다. 그래야 오해 없이 빠르게 대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2. 자유의 욕구: 언어를 창의적으로 변형하고,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내고 싶어한다. 줄임말, 신조어, 밈은 바로 이 자유의 산물이다.
이 두 욕구는 모순적이지만 동시에 공존한다. 안정성과 자유, 규칙과 해체 사이의 긴장이 디지털 언어 문화를 형성한다.
그렇다면 청년 세대는 어떻게 균형을 찾아야 할까?
- 비트겐슈타인의 길: 디지털 언어를 단순한 ‘파괴’가 아니라 새로운 언어 게임으로 이해해야 한다. 세대 간, 집단 간의 규칙을 파악하고 존중한다면 소통의 가능성은 열린다.
- 데리다의 길: 동시에 언어의 불안정성을 인정해야 한다. 언어가 언제든 다른 의미로 해체될 수 있음을 받아들이고, 해체 속에서 새로운 해석의 가능성을 성찰해야 한다.
즉, 규칙을 존중하면서도, 규칙조차 무너지며 새롭게 만들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균형을 찾는 것은 단순히 언어학적 문제가 아니다. 디지털 언어가 사회적 파급력을 가지는 만큼, 언어 윤리의 문제로 이어진다.
해시태그 운동처럼 집단적 힘을 가질 때는 사회 변화를 이끌기도 한다.
그러나 같은 언어가 혐오와 배제의 기제로 쓰일 때는 심각한 상처를 남긴다.
따라서 청년 세대는 언어 게임의 자유를 누리면서도, 그 언어가 타인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를 성찰해야 한다. 비트겐슈타인의 규칙성과 데리다의 해체성을 모두 고려하는 성숙한 언어 윤리가 필요하다.
결국 청년 세대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의 입장을 택하는 것이 아니다.
- 규칙 없는 해체는 혼란으로 이어지고,
- 해체 없는 규칙은 창조성을 잃는다.
청년들은 이 두 축 사이에서 균형을 찾아야 한다. 언어 게임의 규칙 속에서 안정적으로 소통하면서도, 해체와 흔들림 속에서 새로운 의미를 창조하는 힘을 동시에 길러야 한다.
비트겐슈타인과 데리다는 서로 다른 길을 걸었지만, 모두 언어를 단순한 고정된 도구가 아니라 살아 있는 과정으로 보았다.
- 비트겐슈타인은 언어가 언어 게임의 규칙 속에서 의미를 갖는다고 보았다. 규칙이 있기에 소통이 가능하고, 맥락을 이해해야 의미를 파악할 수 있다.
- 데리다는 언어가 언제나 흔들리고 해체되는 과정임을 강조했다. 의미는 결코 고정되지 않고, 다른 기호들 속으로 미끄러진다.
오늘날 디지털 언어는 이 두 통찰을 동시에 드러낸다. 하나의 해시태그, 밈, 이모티콘은 맥락 속에서 의미를 얻지만, 동시에 언제든 새로운 의미로 전환될 수 있다.
청년 세대는 매일 이 두 철학을 몸으로 체험한다.
- 카카오톡의 짧은 이모티콘 하나가 친근함으로도, 비꼼으로도 읽힌다.
- 같은 밈이 어떤 커뮤니티에서는 유머지만, 다른 곳에서는 모욕이 된다.
- 해시태그 운동은 사회적 연대를 만들지만, 동시에 정치적 분열을 일으키기도 한다.
이는 청년 세대가 언어의 안정성과 불안정성, 규칙성과 해체성을 동시에 경험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하나의 답을 고르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는 일이다.
1. 나는 디지털 언어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규칙을 존중하며 안정적 의미를 찾을 것인가, 아니면 흔들림을 인정하며 다층적 의미를 탐색할 것인가?
2. 나는 디지털 언어를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
가벼운 농담으로 끝낼 것인가, 아니면 책임 있는 소통을 위해 성찰하며 사용할 것인가?
3. 나는 어떤 언어 윤리를 세울 것인가?
언어의 자유와 창조성을 누리면서도, 그 언어가 타인에게 남길 상처와 영향에 대해 책임질 준비가 되어 있는가?
청년 세대가 나아가야 할 길은 균형 위에서의 소통이다.
언어 게임의 규칙을 무시하지 않고, 맥락을 존중하며 의미를 이해하는 힘.
동시에 언어가 언제나 해체될 수 있음을 인정하고, 흔들림 속에서 성찰과 창의성을 발휘하는 태도.
이 균형 속에서만 디지털 언어는 단순한 유행어의 집합이 아니라, 새로운 윤리적 소통의 장으로 발전할 수 있다.
비트겐슈타인과 데리다는 서로 다른 답을 주었지만, 오늘의 청년들에게는 공통된 과제가 남는다. 그것은 바로 언어를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라는 자기 성찰이다.
“나는 디지털 언어 속에서 어떤 규칙을 따르며, 어떤 흔들림을 감당할 것인가?”
“나는 언어를 통해 타인과 어떤 관계를 만들며, 어떤 윤리를 세울 것인가?”
이 질문을 붙드는 순간, 디지털 언어는 단순한 기호의 나열을 넘어, 청년 세대가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철학적 실천이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