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 탐구 28] 슬라보예 지젝 vs 알랭 바디우
토요일 오후, 한 카페 구석에 모여 앉은 청년 네 명이 커피잔을 앞에 두고 대화를 이어가고 있었다.
“난 요즘 스타벅스에서 커피를 마시면서도 좀 묘한 기분이 들어. 컵에 붙은 ‘친환경 종이 빨대’ 덕분에 내가 마치 환경을 지키는 착한 소비자라도 된 듯한데… 사실 알고 보면 그게 다 회사의 마케팅 아니야?”
말을 꺼낸 학생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다른 친구가 곧바로 맞장구쳤다.
“맞아. 나도 비슷한 생각을 했어. 페어트레이드 마크 붙은 초콜릿을 사면 왠지 정의로운 사람이 된 것 같지만, 결국 그 안에도 자본주의 논리가 숨어 있는 거잖아. 우리가 믿는 건 진짜 욕망일까, 아니면 누군가 심어놓은 ‘착한 소비’라는 이미지일까?”
잠시 침묵이 흘렀다. 누군가는 노트북을 열어 SNS를 켜고, 최근에 퍼지고 있는 해시태그 운동을 보여주었다.
“봐, #FreeLife 운동이 요즘 엄청 유행이야. 다들 자유로운 삶을 외치는데… 이게 정말 새로운 진리의 목소리일까? 아니면 또 하나의 유행이자 콘텐츠일 뿐일까?”
그 순간, 대화는 단순한 잡담을 넘어 철학적 질문으로 옮겨갔다.
- 우리가 믿고 따르는 것은 진짜 나의 욕망일까, 아니면 이데올로기가 심어놓은 허상일까?
- SNS에서 번지는 해시태그 운동은 새로운 진리의 사건일까, 아니면 금세 사라질 또 다른 유행일 뿐일까?
이 질문의 무게는 두 철학자의 목소리와 겹쳐졌다.
- 슬라보예 지젝(Slavoj Žižek): “이데올로기는 단순한 거짓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가 욕망하는 방식 자체를 만들어낸다. 심지어 스타벅스 커피 한 잔조차 ‘윤리적 소비’라는 이데올로기 속에 있다.”
- 알랭 바디우(Alain Badiou): “진리는 단순한 유행이 아니다. 그것은 기존 질서를 뒤흔드는 사건 속에서 탄생하며, 그 사건에 충실하려는 주체의 결단 속에서 유지된다.”
카페 구석에서 오간 청년들의 대화는 곧 21세기 철학의 심장부로 들어가는 입구가 되었다. 그들이 던진 물음은 단순히 개인의 취향이나 소비 습관이 아니라, 오늘의 사회 전체를 가로지르는 이데올로기와 진리의 문제였다.
이 회차의 여정은 바로 이 질문에서 출발한다.
지젝의 날카로운 이데올로기 비판과 바디우의 사건과 진리 이론을 통해, 우리는 청년 세대가 마주한 현실을 다시 바라본다. “나는 진짜 내 욕망을 따르고 있는가, 아니면 이데올로기의 시나리오에 따라 움직이고 있는가? 그리고 이 시대에 새로운 진리의 사건은 어떻게 가능한가?”
슬로베니아 출신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Slavoj Žižek)은 현대 사회를 분석하는 데 있어 ‘이데올로기’ 개념을 새롭게 정의했다. 전통적으로 이데올로기는 거짓 의식 혹은 지배 계급이 대중을 속이는 도구로 이해되었다. 그러나 지젝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데올로기는 단순히 우리가 ‘믿는 척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욕망하는 방식 자체를 구성하는 구조”라고 말했다.
그는 라캉의 정신분석학을 빌려 이데올로기를 설명한다.
- 인간은 ‘실재계(Real)’를 직접적으로 경험할 수 없다. 대신 상상계(Imaginary)와 상징계(Symbolic)를 통해 세계를 이해한다.
- 이데올로기는 바로 이 상징계와 상상계에 뿌리내려, 우리가 욕망을 느끼고 행동하는 방식을 규정한다.
지젝은 이를 ‘냉소적 이데올로기(cynical ideology)’라는 표현으로 설명한다. 현대인은 어떤 소비가 허구적임을 알면서도, “그래도 다들 하니까”라며 그대로 따른다.
예: “스타벅스가 환경을 위한다는 건 결국 마케팅이지.” →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스타벅스 커피를 마신다.
예: “정치 캠페인이 보여주기일 뿐이라는 걸 알아.” → 그럼에도 그 행사에 참여해 안심한다.
즉, 현대 사회의 이데올로기는 단순히 ‘믿음을 속이는 허구’가 아니라, 우리가 욕망하고 실천하는 방식을 뿌리부터 형성한다. 지젝은 환경운동, 윤리적 소비, 심지어 ‘착한 기업’ 담론조차 자본주의적 이데올로기의 일부라고 비판한다. 진정한 전복은 이 불편한 진실을 직면하고, 허구를 넘어서는 새로운 행위를 통해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프랑스 철학자 알랭 바디우(Alain Badiou)는 20세기 후기 포스트모더니즘이 진리의 가능성을 부정하고, 모든 것을 상대주의와 다원주의 속에 흡수하는 상황에 강하게 반대했다. 그는 “진리는 여전히 존재한다”라고 선언하며, 진리를 새롭게 이해할 틀을 제시했다.
그 핵심은 사건(Event) 개념이다.
사건이란 기존 질서로는 설명할 수 없는 급진적 단절이다.
예: 프랑스 혁명, 피타고라스의 수학적 발견, 근대 예술의 혁신, 사랑이라는 관계의 시작.
사건은 기존 세계의 법칙을 흔들고, 새로운 가능성을 연다.
바디우에 따르면 진리(Truth)는 바로 이 사건에서 발생한다. 하지만 진리는 사건 그 자체에서 끝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사건 이후에 주체가 그것에 충실(Fidelity)하려는 결단이다.
예: 혁명이 단순한 폭동으로 끝나지 않고 ‘새로운 정치적 질서’를 열어갈 때, 그것은 진리가 된다.
예: 사랑이 단순한 감정의 폭발이 아니라, 평생에 걸친 삶의 결단으로 이어질 때, 그것은 진리적 사건이 된다.
바디우는 또한 진리를 보편적(universal)이라고 보았다. 특정 집단, 특정 문화의 전유물이 아니라, 사건에 충실한 모든 이에게 열려 있는 길이라는 것이다.
그는 현대 사회가 상대주의에 빠져 진리를 ‘취향’이나 ‘의견’ 정도로 축소하는 것을 비판한다. 대신, 사건이 열어젖히는 보편적 진리를 지켜내려는 주체의 결단을 강조한다.
두 철학자의 관점을 나란히 세우면, 오늘의 현실을 해석하는 두 갈래 시선이 드러난다.
- 지젝
- 이데올로기는 거짓이 아니라 욕망의 구조.
- 우리는 허구임을 알면서도 여전히 그 허구에 참여한다.
- 진짜 혁명은 이 불편한 구조를 직면하고 기존 질서를 전복하는 행위에서 발생한다.
- 바디우
- 진리는 여전히 가능하다.
- 진리는 기존 질서를 깨뜨리는 사건에서 발생한다.
- 사건 이후 그 진리에 충실하려는 주체의 결단이 진리의 지속성을 보장한다.
즉, 지젝은 우리가 이미 이데올로기적 구조에 사로잡혀 있음을 폭로하고, 바디우는 그 구조 속에서도 새로운 진리를 열 수 있는 ‘사건’의 가능성을 강조한다.
청년 세대가 살아가는 디지털 사회는 이 두 철학의 긴장을 그대로 보여준다.
- SNS 해시태그 운동, 윤리적 소비 캠페인은 지젝이 말한 ‘냉소적 이데올로기’의 전형일 수 있다. 우리는 허구를 알면서도 여전히 참여한다.
- 그러나 동시에 어떤 순간은 바디우적 의미에서 ‘사건’으로 전환된다. 예컨대, 기후위기 시위나 민주주의를 지켜낸 시민 저항은 새로운 주체를 만들고, 보편적 진리의 가능성을 열어젖힌다.
서울의 한 대학 강당. 주제는 “이데올로기와 새로운 진리, 청년 세대의 길”. 객석을 가득 메운 청년들은 커피와 스마트폰을 손에 든 채 진지하게 무대를 바라본다. 두 철학자가 마주 앉았다. 슬라보예 지젝, 그리고 알랭 바디우. 사회자가 마이크를 들었다.
“오늘 우리는 ‘진리와 이데올로기’라는 거대한 주제를 두 철학자의 목소리로 다시 들어보려 합니다. 지젝 선생, 먼저 발언해주시죠.”
지젝이 특유의 제스처와 함께 말을 시작했다.
“여러분, 우리는 늘 이렇게 생각하죠. 이데올로기란 거짓, 기만, 속임수라고. 하지만 저는 말합니다. 이데올로기는 우리가 욕망하는 방식 자체입니다.
예를 들어, 스타벅스 커피를 마시며 ‘친환경 빨대’를 쓴다고 합시다. 우리는 그것이 단순한 마케팅이라는 걸 압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커피를 마시며 안도감을 느낍니다. ‘나는 착한 소비자야’라는 환상을 즐기는 거죠.
바로 이 지점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허구임을 알면서도 그 허구를 따른다. 이것이 제가 말하는 냉소적 이데올로기입니다.”
객석이 술렁였다. 어떤 학생은 웃으며 속삭였다. “나도 그랬는데…”
곧 이어 바디우가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지젝 선생의 분석은 흥미롭지만, 너무 부정적입니다. 그렇다고 모든 것이 허구라면, 우리는 무엇을 믿을 수 있습니까?
저는 말합니다. 진리는 여전히 가능하다. 진리는 일상의 허구를 넘어서는 사건(Event) 속에서 발생합니다. 그것은 기존 질서로는 설명할 수 없는 급진적 단절입니다. 프랑스 혁명, 새로운 과학적 발견, 사랑의 시작 ― 이런 것들이 사건이지요.
그리고 중요한 것은, 그 사건에 충실(Fidelity)하려는 주체의 결단입니다. 혁명이 단순한 폭동이 아니라 새로운 정치적 질서를 여는 이유는, 그 사건에 충실한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인생의 진리가 되는 이유는, 두 사람이 그 사건을 끝까지 지켜내기 때문입니다.”
한 학생이 손을 들었다.
“요즘 SNS에서 해시태그 운동이 많이 일어납니다. #MeToo, #ClimateStrike 같은 것들이요. 그런데 이게 진리의 사건인지, 아니면 그냥 유행인지 헷갈립니다.”
지젝이 먼저 대답했다.
“좋은 질문입니다. 저는 이런 운동도 자본주의적 이데올로기에 쉽게 포섭된다고 봅니다. 해시태그를 달고, 좋아요를 누르는 순간 우리는 ‘나는 정의로운 사람’이라는 만족을 얻습니다. 그러나 그 만족은 종종 구조를 바꾸지 못합니다. 다시 말해, 혁명적 사건이 아니라 소비된 이미지로 끝날 수 있습니다.”
바디우가 곧바로 반박했다.
“물론 많은 경우가 그렇습니다. 하지만 때로는 해시태그 운동이 새로운 주체를 만들어냅니다. 수많은 여성들이 #MeToo를 통해 침묵을 깨고, 서로의 목소리를 이어가며 사회를 바꾸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유행이 아니라, 사건이 열어젖힌 진리라 할 수 있습니다.”
청중은 고개를 끄덕였다. 한쪽에서는 냉소, 다른 한쪽에서는 가능성.
지젝이 목소리를 높였다.
“바디우 선생, 당신의 낙관은 위험합니다. 우리는 자꾸 진리라는 단어에 도피합니다. 하지만 현실에서 대부분은 이미 이데올로기에 포섭되어 있습니다. 심지어 ‘혁명’조차 상품이 됩니다. 티셔츠에 프린트된 체 게바라 얼굴을 보세요. 혁명은 소비의 아이콘이 되어버렸습니다.”
바디우가 미소를 지으며 응수했다.
“지적은 옳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진리가 없다고 단언할 수는 없습니다. 사건은 언제나 도래합니다. 문제는 우리가 그것을 인식하고, 끝까지 충실하려는가입니다. ‘혁명’이라는 단어가 상품화될 수도 있지만, 동시에 실제로 세상을 바꾸는 혁명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것을 구별하는 것이 철학의 역할입니다.”
이번엔 공학을 전공하는 학생이 질문을 던졌다.
“AI가 만들어내는 담론도 이데올로기일까요? 요즘은 ‘AI 윤리’, ‘AI가 인류를 구원할까’ 같은 이야기가 넘쳐나는데, 이게 진리인지 허상인지 모르겠습니다.”
지젝:
“AI 담론 역시 이데올로기의 한 형태입니다. 기업들은 AI를 마치 새로운 구세주처럼 포장하면서, 동시에 소비를 확대합니다. 우리는 그 허구를 알면서도 ‘미래를 위한 투자’라는 이름으로 따르죠. 전형적인 냉소적 이데올로기입니다.”
바디우:
“하지만 AI가 만들어내는 혁신이 진리의 사건으로 이어질 가능성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사건이 인간을 새롭게 정의하고, 보편적 가능성을 여는가입니다. 단순한 상품이 아니라, 인간 삶을 근본적으로 재구성하는 순간이 있다면 그것은 진리의 사건입니다.”
사회자가 마이크를 잡았다.
“오늘 두 철학자는 서로 다른 길을 제시했습니다. 지젝은 우리의 욕망 자체가 이데올로기에 의해 형성된다고 말했고, 바디우는 사건과 주체의 충실 속에서 진리가 여전히 가능하다고 했습니다.
청년 여러분, 이제 질문은 여러분의 몫입니다.
여러분이 믿고 따르는 것은 진짜 욕망입니까, 아니면 이데올로기가 심어놓은 허상입니까?
SNS와 AI 시대에 우리는 어떤 사건을 진리로 붙들 수 있을까요?
결론은 내려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 질문을 붙드는 것이, 오늘 우리 세대가 시작해야 할 철학적 실천일 것입니다.”
청중은 박수를 보냈다. 그러나 그 눈빛 속에는 여전히 무거운 물음이 남아 있었다.
오늘날 청년들의 일상은 수많은 윤리적 소비 캠페인으로 채워져 있다. 커피 한 잔에도 ‘친환경 빨대’, 초콜릿 한 조각에도 ‘공정무역(Fair Trade)’ 로고가 붙는다. 표면적으로는 사회적 가치를 고려한 행동처럼 보이지만, 지젝의 시각에서 보면 이는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이데올로기적 환상이다.
우리는 그것이 마케팅임을 알면서도 여전히 그 제품을 소비하며 안도감을 느낀다. ‘나는 좋은 소비자야’라는 자기 위안은 욕망을 정당화하는 장치다. 이는 바로 냉소적 이데올로기의 전형이다. 허구임을 알면서도 허구를 따르는 것이다.
그러나 바디우의 시각에서 본다면, 윤리적 소비도 전부 허상으로 치부할 수는 없다. 만약 이러한 실천이 구조적 변화를 촉발하는 사건으로 발전한다면, 그것은 진리의 가능성을 내포할 수 있다. 예컨대, 소비자 운동이 실제로 노동자의 권리를 보장하고 기업의 구조를 바꾼다면, 이는 단순한 유행이 아니라 사건에 충실한 행위가 된다.
SNS 시대를 대표하는 해시태그 운동은 지젝과 바디우의 논점을 동시에 드러낸다.
- 지젝적 관점: 해시태그 운동은 종종 ‘좋아요’와 ‘공유’의 반복으로 소모된다. 참여자들은 정의로운 행동을 했다는 만족감을 느끼지만, 실제 구조는 크게 바뀌지 않는다. 이는 이데올로기의 소비화다.
- 바디우적 관점: 그러나 어떤 경우에는 해시태그 운동이 침묵을 깨고 새로운 주체를 탄생시킨다. #MeToo 운동이 대표적이다. 개인의 고발이 사건으로 번져 수많은 여성들이 연대하고, 법과 제도가 변하기 시작했다. 이는 진리의 사건이 열리는 과정이었다.
즉, 해시태그 운동은 단순한 유행으로 소멸할 수도 있고, 사건으로 진리의 가능성을 열 수도 있다. 차이는 참여자들이 그것에 얼마나 충실하게 머무르는가에 달려 있다.
한국 사회의 최근 장면들도 이 논의를 보여준다.
- 대통령 탄핵 심판을 둘러싼 찬반 농성은, 지젝적 시각에서 보면 시민들이 각자 ‘정의’라는 이데올로기 속에서 움직이는 현상일 수 있다. 서로의 주장을 ‘진리’라 믿지만, 사실은 권력의 틀 안에서 관리되는 게임일 뿐이라는 것이다.
- 그러나 동시에, 계엄령 사태에서 시민들이 응원봉을 들고 트럭을 막아선 사건은 바디우적 시각에서 진리의 순간이다. 기존 질서가 시민을 억압하려 했을 때, 새로운 주체가 스스로를 드러내며 자유를 지켜냈기 때문이다.
같은 ‘광장’이라도, 어떤 순간은 이데올로기의 반복이 되고, 어떤 순간은 진리의 사건이 된다.
AI가 불러온 미래 담론 역시 이 두 철학의 프리즘 속에서 다르게 보인다.
-지젝의 시각: “AI 윤리”나 “AI가 인류를 구원할 것” 같은 말은 종종 기업의 마케팅에 불과하다. 우리는 그 과장이 허구임을 알면서도, 미래에 대한 불안을 달래기 위해 따르고 있다. 이는 새로운 기술 이데올로기다.
- 바디우의 시각: 그러나 AI가 단순히 상품의 차원을 넘어 인간의 삶을 재구성하고, 새로운 정치적·사회적 관계를 열어젖힌다면, 그것은 사건이 될 수 있다. 예컨대 AI가 소수자 권익 보호나 교육 불평등 해소에 결정적 역할을 한다면, 이는 진리적 차원을 가진다.
청년들은 이 모든 현상 속에서 두 가지 상반된 경험을 한다.
한편으로는 ‘내가 하고 있는 모든 선택이 이미 이데올로기에 포섭된 게 아닐까?’라는 냉소.
다른 한편으로는 ‘어쩌면 지금이 진리의 사건을 만들 기회일지도 모른다’는 희망.
결국 중요한 것은, 청년 세대가 무엇을 사건으로 붙잡고, 얼마나 충실하게 그 사건을 지속할 수 있는가이다. 진리는 사건을 통해 열리지만, 사건에 머무르려는 주체의 결단이 없다면 곧 사라진다.
- 지젝적 시각: 현대 사회의 거의 모든 움직임은 이데올로기적 구조 속에 포섭된다.
- 바디우적 시각: 그러나 그 구조 속에서도 새로운 사건과 진리의 가능성은 열린다.
- 청년 세대: 이 두 시각 사이에서 냉소와 희망을 동시에 경험하며, 어떤 사건에 충실할지를 묻는 존재.
지젝과 바디우는 같은 시대를 살며 서로 교류했던 철학자이지만, 현실을 해석하는 방식은 극명하게 갈라진다.
- 지젝은 모든 실천이 결국 이데올로기에 포섭된다고 폭로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욕망조차 사실은 시스템이 심어놓은 것이다.”라는 그의 진단은 냉혹하다.
- 바디우는 진리의 가능성을 포기하지 않는다. “사건은 언제나 도래하며, 그 사건에 충실하려는 주체가 있을 때 진리가 열린다.”는 그의 주장은 희망을 건다.
청년 세대는 바로 이 두 입장의 교차점에 서 있다. 일상 속에서 소비·정치·미디어가 모두 이데올로기의 장치처럼 보이지만, 동시에 어떤 순간은 삶을 송두리째 바꾸는 사건으로 체험된다.
지젝은 청년들에게 불편한 진실을 직시하라고 요구한다.
“나는 알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따른다.” 이것이 냉소적 이데올로기의 핵심이다.
환경 캠페인, 윤리적 소비, SNS 운동이 때로는 자기 위안에 불과함을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지젝의 사유는 단순한 비관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이 불편한 구조를 직면할 때 비로소 전복의 가능성이 열린다.”고 말한다. 즉, 청년 세대가 냉소를 깨고 자기 욕망의 뿌리를 다시 묻는 순간, 새로운 행위의 가능성이 태어난다.
바디우는 청년들에게 또 다른 메시지를 던진다.
- 진리는 ‘사건(Event)’ 속에서 발생한다. 그것은 기존 질서로 설명할 수 없는 급진적 단절이다.
- 그러나 사건이 진리로 남을 수 있는지는 오직 주체의 충실(Fidelity)에 달려 있다.
즉, 청년 세대는 사건을 ‘스쳐 지나가는 유행’으로 소비할 것인가, 아니면 삶의 결단으로 붙잡을 것인가의 기로에 서 있다. #MeToo 운동, 기후위기 저항, 민주주의를 지켜낸 광장의 경험은 모두 사건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을 끝까지 이어가는 충실한 실천이 없다면, 금세 소멸하는 유행으로 사라질 것이다.
청년 세대가 마주한 과제는 이 두 입장을 어떻게 균형 있게 붙잡느냐에 있다.
- 지젝의 통찰을 받아들여 나의 욕망과 선택이 이미 이데올로기의 구조 안에 있다는 사실을 냉정히 인정해야 한다. 그래야 허위의식에 빠지지 않는다.
- 동시에 바디우의 희망을 따라, 사건을 진리로 만들 용기를 가져야 한다. 그것이 유행으로 사라지지 않도록 충실하게 머무는 실천이 필요하다.
이 균형 속에서만 청년 세대는 단순히 냉소적 비판자에 머무르지 않고, 동시에 맹목적 낙관론에도 빠지지 않는다.
균형은 결국 자기 질문에서 시작된다. 청년 세대는 매일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내가 지금 따르는 것은 진짜 나의 욕망인가, 아니면 시스템이 설계한 욕망인가?”
“내가 경험한 사건은 단순한 유행인가, 아니면 진리의 시작인가?”
“나는 그 사건에 얼마나 충실하게 머무를 준비가 되어 있는가?”
이 질문을 붙들 때, 청년들은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히지 않으면서도, 새로운 진리를 열어가는 주체가 될 수 있다.
지젝이 드러낸 냉혹한 구조와 바디우가 제시한 진리의 희망은 서로 모순이 아니라, 청년 세대가 동시에 붙들어야 할 두 축이다.
하나를 부정하면 냉소에 갇히거나, 허망한 이상주의에 빠진다.
두 축을 함께 붙드는 순간, 청년들은 현실을 비판적으로 성찰하면서도, 새로운 진리를 만들어갈 용기를 가질 수 있다.
결국 균형은 단순한 타협이 아니다. 그것은 비판과 실천이 동시에 작동하는 삶의 태도다. 청년 세대가 이 균형을 붙드는 순간, 이데올로기의 벽을 뚫고 새로운 진리의 길로 나아갈 수 있다.
지젝과 바디우의 대립은 단순히 철학적 논쟁이 아니다. 그것은 오늘날 청년 세대가 매일 체감하는 삶의 풍경이다.
- 우리는 지젝이 말한 것처럼, 허구임을 알면서도 따르는 냉소적 이데올로기 속에 살고 있다. SNS의 해시태그, 윤리적 소비, AI 담론 모두 그 예다.
- 동시에 우리는 바디우가 강조한 것처럼, 어떤 순간에는 새로운 가능성이 열리고, 사건의 진리가 우리를 부른다. 촛불집회, #MeToo 운동, 민주주의를 지켜낸 광장의 경험이 그렇다.
청년 세대는 이 두 현실을 동시에 살아간다. 그래서 이 질문은 그 어느 때보다도 절실하다. “나는 지금 무엇을 믿고, 무엇을 따르고 있는가?”
지젝의 통찰은 청년들에게 불편한 성찰을 강요한다.
“내 욕망은 진짜 나의 것인가, 아니면 시스템이 만들어준 것인가?”
“나는 허구임을 알면서도 편안함 때문에 따르고 있지는 않은가?”
바디우의 통찰은 또 다른 요구를 던진다.
“나는 어떤 사건을 진리로 붙들 것인가?”
“그 사건에 충실하게 머무를 용기와 결단을 갖추고 있는가?”
이 두 철학자의 목소리는 청년들에게 자기 욕망의 성격과 자기 실천의 결단을 동시에 묻는다.
청년 세대가 이 시대에 던져야 할 최종 질문은 세 가지로 정리된다.
1. 욕망의 질문:
“내가 지금 추구하는 것은 나 자신의 욕망인가, 아니면 이데올로기의 시나리오인가?”
2. 사건의 질문:
“내가 경험한 사건은 일시적 유행인가, 아니면 진리의 시작인가?”
3. 충실의 질문:
“나는 그 사건에 얼마나 오래, 얼마나 진정성 있게 머무를 준비가 되어 있는가?”
이 질문들을 회피하지 않고 붙드는 순간, 청년들은 냉소에 머무르지 않고 새로운 길을 만들 수 있다.
결국 청년 세대에게 필요한 것은 비판과 실천이 동시에 작동하는 태도다.
지젝처럼 이데올로기의 벽을 꿰뚫어보고,
바디우처럼 사건의 진리에 충실할 용기를 내는 것.
이 태도는 단순한 철학적 이상이 아니다. 그것은 오늘도 카페에서, SNS에서, 광장에서, 그리고 직장에서 청년들이 선택해야 하는 구체적 삶의 방식이다.
지젝과 바디우의 논쟁은 결론을 내리지 않는다. 하지만 오히려 그것이 중요한 지점이다. 철학은 완성된 답을 주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질문을 남기는 일이기 때문이다.
오늘의 청년 세대가 붙들어야 할 질문은 이것이다.
“나는 지금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 있는가, 아니면 진리의 사건을 붙들고 있는가?”
“내가 살아가는 방식은 냉소의 반복인가, 아니면 충실한 결단인가?”
이 질문을 던지고, 답을 찾아가는 과정 자체가 곧 새로운 진리를 만들어가는 길이다. 청년 세대는 그 길 위에서, 자신만의 욕망과 사건, 그리고 충실의 철학을 써 내려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