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직은 기자처럼 구성원을 관리하라 Part.4 | EP.2
리더에게 자율을 설계한다는 것은
결국 ‘신뢰를 운영하는 일’과 같다.
윤리로 다듬어진 자율은
조직을 단단하게 묶는 가장 강력한 문화적 접착제다.
Part 1. 기자처럼 일하는 사람들(6회)
Part 2. 기자조직의 수평문화(4회)
Part 3. 기자의 경력철학(6회)
Part 5. 기자형 조직의 경영철학(6회)
기자조직은 세상에서 가장 자율성이 강한 직업군이다.
누가 언제 출근하라, 어디를 가라, 어떤 사람을 만나라는 지시가 없다.
기자는 스스로 판단해 움직이고, 자신이 세운 일정표에 따라 하루를 설계한다.
그의 일은 상사의 지시가 아니라 현장의 필요와 사회의 변화가 결정한다.
그래서 기자에게는 ‘자율’이 곧 직업의 기본값이다.
하지만 그 자율은 무한하지 않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선, 즉 윤리(Ethics)라는 울타리 안에서만 유지된다.
윤리를 잃은 자율은 방종이 되고, 자유를 명분으로 한 무책임은 결국 신뢰를 파괴한다.
기자는 언제나 자유롭게 움직이지만, 동시에 가장 강하게 도덕적 긴장감 속에 존재한다.
그가 다루는 것은 단순한 정보가 아니라 사람의 삶과 사회의 진실이기 때문이다.
기자의 자유가 흔들릴 때, 그가 쓰는 문장은 곧장 조직의 신뢰를 흔들고,
하나의 기사로 사회적 파장이 번져나간다.
이 세계에서 윤리는 선택이 아니라, 직업의 생존 조건이다.
뉴커리어 시대의 조직 또한 다르지 않다.
회사가 구성원에게 더 많은 자율을 주는 시대,
그 자유를 지탱할 수 있는 자기 통제(Self-regulation)의 문화가 절실하다.
AI, 원격근무, 프로젝트 단위의 협업이 확산될수록
‘감시보다 신뢰’, ‘지시보다 자율’이 조직의 핵심 운영원리가 된다.
그러나 신뢰는 공기처럼 투명하지만, 언제든 사라질 수 있는 존재다.
리더가 아무리 자유를 강조해도,
그 자유가 책임의 구조로 이어지지 않으면 조직은 금세 무질서로 기운다.
진정한 자율은 통제로부터의 해방이 아니라,
스스로를 다스리는 윤리적 태도에서 비롯된다.
기자가 현장에서 자유롭게 판단할 수 있는 이유는,
그 자유의 뒤편에 ‘정확성’과 ‘공정성’이라는 자율의 윤리가 있기 때문이다.
그는 자유를 누리기 위해 윤리를 선택하고,
윤리를 지키기 위해 자율을 단련한다.
이 순환이 바로 기자조직의 생태 리듬이다.
오늘날의 조직도 결국 같은 질문을 마주한다.
“우리는 자유를 어떻게 관리하고 있는가?”
자율을 단순히 ‘감시의 부재’로 이해한다면,
조직은 곧 ‘책임의 공백’을 경험하게 된다.
자유는 방향이 없을 때 가장 빠르게 무너진다.
따라서 자율의 본질은 자유를 지키기 위한 자기 통제의 철학,
즉 “신뢰를 유지하기 위한 윤리적 시스템”이다.
이것이 바로 기자조직이 오래도록 자율 속에서도 신뢰를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다.
“윤리 없는 자율은 무책임이고,
통제 없는 자유는 혼란이다.”
기자에게 주어지는 가장 큰 권한은 현장 판단의 자율성이다.
그는 데스크의 지시를 기다리지 않는다.
어떤 사건이 벌어졌을 때, 누구를 만나고 어떤 각도로 접근할지를 스스로 결정한다.
현장의 분위기, 인터뷰 대상의 반응, 기사화의 시점까지 모두 기자의 판단에 달려 있다.
이 자유는 기자라는 직업의 매력이자, 동시에 가장 큰 부담이다.
왜냐하면 그 자유는 언제나 책임과 윤리라는 무형의 울타리 안에서만 허용되기 때문이다.
기자의 자율은 ‘무한한 자유’가 아니다.
그것은 보도 윤리(Journalistic Ethics)와 사실 확인의 규율(Fact-checking Discipline) 위에 세워진 조적 자유다.
즉, 기자가 자유롭게 움직이기 위해서는
그만큼 엄격한 자기 검증과 정확성의 기준을 스스로에게 부여해야 한다.
“누가 시켜서 한 일이 아니다”라는 말은 기자 사회에서 결코 변명이 될 수 없다.
스스로 결정했기에, 그 결과 또한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
이것이 기자조직이 말하는 ‘현장 자율의 윤리적 구조(Ethical Autonomy)’다.
기자는 현장에서 수많은 유혹과 압박에 직면한다.
속보 경쟁 속에서 아직 확인되지 않은 정보가 흘러나오고,
관계자의 말 한마디가 여론의 방향을 바꿀 수도 있다.
이때 기자의 자유는 ‘빨리 쓰는 능력’이 아니라 ‘멈출 줄 아는 절제력’으로 평가된다.
확인되지 않은 사실을 단정하지 않고,
아직 명확하지 않은 사건의 진실을 기다릴 수 있는 자기 통제(Self-restraint)가 진짜 자율이다.
즉, 기자의 자율은 결과의 자유(Freedom of Outcome)가 아니라,
과정의 책임(Responsibility in Process)으로 정의된다.
그렇기에 기자조직은 자율을 ‘보상’이 아닌 ‘신뢰의 위임(Delegation of Trust)’으로 본다.
데스크가 모든 기사를 직접 통제하지 않아도,
기자는 자신의 판단이 조직의 신뢰와 직결된다는 사실을 안다.
이 신뢰의 체계가 유지될 때, 조직은 감시 없이도 돌아간다.
기자가 각자의 자리에서 스스로 윤리의 기준을 세우고,
그 기준으로 자신의 기사를 관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자율은 신뢰의 증명서이자, 윤리의 실천력이다.
뉴커리어 시대의 인재 또한 이 구조를 배워야 한다.
오늘날의 조직은 더 이상 ‘명령–보고–결정’의 삼단 구조로 움직이지 않는다.
대신 각 구성원이 프로젝트의 주체로서 판단하고 실행한다.
이때 필요한 것은 ‘누가 시켜야 움직이는 사람’이 아니라,
스스로 결정하고 끝까지 책임지는 사람(Self-directed Professional)이다.
즉, 자율은 개인의 특권이 아니라,
조직이 구성원에게 부여한 신뢰의 책임(Trusted Responsibility)이다.
리더는 그 신뢰를 보장하고, 구성원은 그 신뢰를 지키는 방식으로 조직은 움직인다.
결국 기자의 자율이란 단순한 자유의 권리가 아니라,
신뢰의 의무로 작동하는 윤리적 체계다.
이 구조가 유지될 때만 자율은 혼란이 아닌 질서를 낳는다.
“기자의 자율은 자유의 권리가 아니라,
신뢰의 의무다.”
기자조직의 자율은 결코 무질서 속에서 유지되지 않는다.
그 자유의 배경에는 언제나 윤리 강령(Code of Ethics)이라는 보이지 않는 헌장이 존재한다.
이 강령은 법처럼 강제하지 않지만, 기자라면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신뢰의 약속(Trust Contract)이다.
기자의 윤리는 단순한 행동지침이 아니라,
스스로의 판단을 지탱해주는 내면의 기준이자 자율의 울타리다.
‘사실을 왜곡하지 않는다’,
‘취재원의 익명성을 보호한다’,
‘이해관계를 피한다’,
‘사생활을 존중한다’ —
이 네 가지 기본 원칙만 보더라도,
기자조직이 얼마나 공공적 신뢰를 중심으로 작동하는 직업집단인지를 알 수 있다.
이 윤리 규범들은 겉으로 보기엔 통제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 반대다.
윤리는 기자의 자유를 억제하는 장치가 아니라,
그 자유를 지켜주는 안전장치다.
즉, 윤리가 없으면 자율은 존재할 수 없다.
윤리는 기자가 스스로를 통제하기 위한 내적 질서(Inner Order)이며,
이 질서를 통해 기자조직은 외부의 통제 없이도 신뢰를 유지할 수 있다.
윤리가 무너지면 자율은 가장 먼저 흔들린다.
사실의 조작이나 왜곡, 사익을 위한 취재, 익명 남용 같은 윤리적 일탈이 반복되면,
조직은 즉시 ‘자율 관리’에서 ‘규제와 통제’의 구조로 회귀한다.
이것이 기자조직이 가장 경계하는 순간이다.
한 명의 윤리적 일탈이 전체의 신뢰를 무너뜨리고,
결국 자율의 기반 자체를 붕괴시킨다.
그 결과, 조직은 자유를 거두어들이고 관리체계를 강화할 수밖에 없다.
이 악순환의 시작점이 바로 윤리의 붕괴(Ethical Breakdown)다.
윤리의 경계는 구성원의 자유를 억압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오히려 자율을 오래 지속시키기 위한 보호막(Protective Framework)이다.
기자조직은 기자에게 무한한 현장 판단의 자유를 부여하지만,
그 자유가 신뢰를 기반으로 할 때만 의미가 있다.
자율을 유지한다는 것은 곧 신뢰를 관리하는 일이다.
윤리 규범은 그 신뢰를 시각화한 형태이며,
이 규범이 무너지면 자율은 더 이상 유지될 수 없다.
뉴커리어 시대의 리더십도 이 구조를 다시 배워야 한다.
오늘날 조직은 개인의 창의성을 보장하기 위해 ‘규제 완화’를 외치지만,
그 자유가 윤리의 기반 위에 놓이지 않으면
결국 다시 통제의 장벽을 세우게 된다.
따라서 뉴커리어형 리더는 “자율을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윤리 구조”를 설계해야 한다.
이 구조는 감시와 통제를 위한 매뉴얼이 아니라,
구성원이 스스로 자신의 일에 책임을 지도록 돕는 신뢰의 플랫폼(Trust Platform)이다.
리더는 “무엇을 하지 말라”고 금지하는 사람이 아니라,
“우리는 왜 이 원칙을 지켜야 하는가”를 설명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윤리는 명령이 아니라 설득이다.
윤리적 조직은 규칙을 두려워하는 집단이 아니라,
원칙의 존재 이유를 이해하고 스스로 적용하는 집단이다.
즉, 윤리는 통제가 아니라 내면화된 자율의 언어(Internalized Language of Freedom)다.
윤리의 경계는 결국 자유를 지속시키기 위한 문화적 합의다.
기자가 신뢰를 잃지 않기 위해 취재원의 비밀을 지키듯,
조직의 구성원도 동료와 고객, 사회의 신뢰를 잃지 않기 위해
스스로 윤리의 선을 긋는다.
그 선이야말로 자율의 기반이며,
이 선을 존중할 때만 자유는 성장의 토양이 된다.
“윤리의 경계는 자율을 제한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율을 오래 지속시키기 위한 보호막이다.”
기자의 세계에서 오보(誤報)는 실수이지만,
왜곡(Distortion)은 윤리의 파괴 행위다.
둘 다 ‘틀린 기사’라는 결과를 낳지만, 그 본질은 완전히 다르다.
오보는 불완전한 정보 속에서 생기는 판단의 오류다.
시간의 압박, 현장의 혼선, 또는 취재원 간의 진술 불일치 등
기자가 감당해야 하는 불확실성(Uncertainty)의 부산물이다.
즉, 오보는 인간적 한계에서 비롯된 실수다.
반면, 왜곡은 다르다.
왜곡은 의도적으로 사실을 비틀고, 맥락을 조작하며,
진실보다 목적을 우선하는 행위다.
그 순간 기자는 더 이상 ‘사실의 전달자’가 아니라
‘현실의 조작자’로 변한다.
그래서 기자조직은 실수는 교정하되,
의도적 왜곡은 단 한 번도 용납하지 않는다.
기자조직이 자율을 유지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그들은 실수를 허용하지만, 왜곡을 용서하지 않는다.
이것이 조직의 윤리적 신뢰선(Ethical Trust Line)이다.
이 선은 기자 개인의 경계를 넘어,
조직 전체의 신뢰를 지탱하는 최소한의 생명선이기도 하다.
즉, ‘실수는 복구 가능하지만, 왜곡은 복구 불가능하다.’
오보는 다시 쓰면 된다.
그러나 왜곡이 드러나면 조직은 신뢰의 기반 자체를 잃는다.
그 순간, 기자조직의 자율은 철저한 규제로 대체된다.
실수는 인간적이다.
그래서 기자조직은 오보에 대해 처벌보다 교정(Correction)을 우선한다.
정정기사(Correction Article)는 단순한 수정이 아니라,
“우리는 여전히 진실을 추구하고 있다”는 신뢰의 선언이다.
기자는 실수했을 때 다시 취재 현장으로 돌아가
오류의 원인을 밝히고, 새로운 사실을 확인하며,
‘리라이팅(Rewriting)’을 통해 진실에 접근한다.
이 과정이 바로 윤리적 복원력(Ethical Resilience)이다.
그러나 왜곡은 다른 차원의 문제다.
왜곡은 실수가 아니라, 선택의 결과다.
‘사실보다 편견을 선택한 것’,
‘진실보다 이익을 택한 것’,
‘윤리보다 목적을 앞세운 것’이 바로 왜곡이다.
이때 조직의 신뢰는 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전체 시스템의 붕괴로 이어진다.
기자조직이 왜곡을 ‘윤리의 배신’으로 간주하는 이유다.
뉴커리어 시대의 조직도 같은 원리를 따라야 한다.
자율을 강조하는 조직일수록,
실수를 허용하는 대신 의도적 무책임(Intentional Irresponsibility)에는 단호해야 한다.
프로젝트의 실패는 학습이지만,
거짓 보고나 책임 회피는 조직의 문화를 붕괴시킨다.
즉, 실수의 복귀는 가능하지만, 왜곡의 회복은 불가능하다.
리더는 실수를 기록하고 분석하는 문화를 장려해야 한다.
그 기록이 곧 조직의 학습 데이터베이스가 된다.
반면, 의도적인 조작과 왜곡에는 즉각적 단죄가 뒤따라야 한다.
그것이 자율을 지키기 위한 윤리적 방화벽(Ethical Firewall)이다.
이 균형이 바로 진짜 자율의 조건이다.
‘실수를 기록하는 문화’와 ‘왜곡을 단죄하는 원칙’이 함께 존재해야
조직은 신뢰를 잃지 않고 자유를 유지할 수 있다.
오보는 배움의 기회지만, 왜곡은 존재의 위기다.
오보는 고쳐 쓸 수 있지만,
왜곡은 조직의 언어를 처음부터 다시 세워야 한다.
“오보는 다시 쓰면 된다.
그러나 왜곡은 조직을 다시 세워야 한다.”
자율이 강해질수록, 내부의 통제는 느슨해진다.
이는 모든 창의적 조직이 마주하는 고질적인 역설이다.
기자조직 역시 마찬가지다.
기자들은 스스로 주제를 정하고, 취재 방식을 선택하며, 기사 문장을 구성한다.
이 과정에서 누구도 그들의 손을 붙잡지 않는다.
하지만 그 자유가 무한히 확장되는 순간,
조직의 신뢰는 위태로워진다.
따라서 기자조직은 자율을 존중하면서도,
그 자율이 공적 신뢰의 기준을 벗어나지 않도록 하는 내부의 윤리적 구조(Ethical Structure)를 설계했다.
그 핵심이 바로 편집 시스템(Editing System)이다.
기자는 자유롭게 쓴다.
그러나 그 기사가 세상에 나가기 전,
반드시 데스크(Desk) — 즉, 편집 리더 — 의 마지막 검토를 거친다.
이 과정은 통제가 아니라 공동 책임의 절차다.
기자의 이름으로 쓰인 기사라도,
그 안에는 데스크의 윤리적 판단과 조직의 가치 기준이 함께 들어 있다.
즉, 편집은 검열(Censorship)이 아니라 공적 신뢰의 필터(Public Trust Filter)다.
기자의 자유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오히려 이 과정을 통해 자유가 더욱 단단해진다.
편집은 자유를 억제하는 과정이 아니라,
그 자유가 세상에 책임 있게 전달될 수 있도록 다듬는 과정이다.
이 구조는 자율과 통제의 균형을 이루는 조직의 핵심 장치다.
데스크는 기자의 글을 수정하거나 삭제하는 권력이 아니라,
“이 기사가 사회적으로 책임질 수 있는가?”를 판단하는 윤리적 심사관(Ethical Editor)이다.
그는 문장을 고치는 사람이 아니라,
조직의 명예를 지키는 최종 필터다.
이 편집 시스템이 존재하기에,
기자들은 자유롭게 사고하고 쓸 수 있다.
그들은 자신이 쓰는 모든 문장이
공적 윤리의 기준을 통과할 것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 믿음이 바로 신뢰 기반 자율(Trust-based Autonomy)의 핵심이다.
뉴커리어형 조직에서도 이 원리는 그대로 적용된다.
오늘날 많은 기업들이 자율근무제, 프로젝트형 협업, 원격 의사결정 등
‘자유’를 핵심 가치로 내세운다.
하지만 진짜 자율은 통제가 사라진 상태가 아니라,
윤리적 검증이 내재된 시스템(Embedded Verification System) 안에서만 지속된다.
구성원이 자유롭게 일하되,
그 결과물이 조직의 철학과 사회적 책임에 부합하는지를 검증하는 절차가 필요하다.
이 절차가 없으면, 자율은 결국 무책임으로 변질된다.
결국 자율의 딜레마는 “누가 통제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리더가 구성원을 감시하느냐,
혹은 구성원이 스스로를 통제하느냐의 이분법을 넘어서야 한다.
진짜 질문은 이것이다.
→ “어떻게 신뢰할 수 있는 구조를 설계할 것인가?”
기자조직은 편집 시스템을 통해 그 해답을 보여준다.
신뢰를 시스템화하면,
자율은 더 이상 리스크가 아니라 조직의 성장 메커니즘(Growth Mechanism)이 된다.
즉, 리더는 사람을 통제할 필요가 없다.
대신 신뢰가 작동하는 구조를 설계하면 된다.
그 구조 속에서 사람들은 스스로 윤리적으로 움직인다.
“자율의 딜레마는 통제의 문제가 아니라,
신뢰를 설계하는 문제다.”
편집자형 리더십의 본질은 지휘가 아니라 감각이다.
기자조직에서 리더(데스크)는 구성원 위에 군림하지 않는다.
그는 모든 기사에 ‘최종 승인’을 내리는 순간,
권한이 아니라 책임의 무게를 함께 짊어진다.
따라서 진짜 편집 리더는 “무엇을 지시하느냐”보다
“무엇을 허용하느냐”로 평가받는다.
그의 판단 한 번이 기자의 경력, 조직의 신뢰, 나아가 사회의 공공성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이때 필요한 것이 바로 윤리적 감수성(Ethical Sensitivity)이다.
윤리적 감수성이란 법규를 잘 아는 능력이 아니라,
상황의 맥락 속에서 ‘무엇이 옳은가’를 직관적으로 감지하는 능력이다.
그것은 매뉴얼보다 빠르고, 규정보다 깊다.
기자조직의 리더에게 윤리는 선택이 아니라 생존의 감각이며,
자율을 맡길 수 있는 리더의 최소한의 조건이다.
기자조직의 리더가 보여주는 윤리 감수성의 세 가지 특징은 다음과 같다.
① ‘사실’보다 ‘맥락’을 중시한다.
리더는 단순히 팩트의 정확성만을 확인하지 않는다.
그는 기사 한 줄이 사회에 어떤 파장을 일으킬지,
그 문장이 특정 집단이나 개인에게 어떤 인상을 남길지를 함께 고려한다.
맥락을 읽는다는 것은 곧 사실 너머의 책임을 본다는 뜻이다.
윤리 감수성이 낮은 리더는 “사실이면 되지”라고 말하지만,
감수성이 높은 리더는 “이 사실이 어떤 의미로 읽힐까?”를 묻는다.
이 차이가 조직의 신뢰 수준을 가른다.
② 권한보다 ‘책임의 무게’를 인식한다.
편집자는 기사를 승인할 수 있는 ‘결정권’을 갖지만,
동시에 조직 전체의 신뢰를 함께 지켜야 하는 공동 책임자(Co-Guardian)이기도 하다.
윤리 감수성이 높은 리더는 권한을 행사할 때마다
그 뒤에 따라올 ‘공적 파장’을 의식한다.
그는 권력을 사용하기보다, 권한의 결과를 감당할 준비가 되어 있다.
이러한 리더는 구성원에게 두려움이 아닌 신뢰를 남긴다.
그의 승인 한마디가 ‘통제’가 아니라 ‘보증’으로 받아들여진다.
③ 구성원의 실수에 ‘비난’이 아닌 ‘복귀의 기회’를 제공한다.
기자의 세계에서 오보는 일종의 통과의례다.
리더는 실수를 단죄하지 않는다.
대신 “다시 써라, 이번엔 더 정확하게 써라”라고 말한다.
그 말 속에는 질책보다 회복의 신뢰(Trust for Return)가 담겨 있다.
윤리 감수성이 높은 리더는 실수 속에서도 성장의 가능성을 본다.
그는 ‘실수를 숨기지 않게 만드는 리더’,
즉 투명한 실패의 공간을 열어주는 사람이다.
뉴커리어 시대의 리더에게 이 윤리 감수성은 더욱 절실하다.
조직의 경계가 사라지고, 자율이 개인 단위로 분산된 지금,
모든 리더는 더 이상 통제할 수 없는 세계 속에서
‘윤리적 공감(Ethical Empathy)’으로 사람을 이끌어야 한다.
윤리를 지침으로 강요하는 리더는 두려움을 낳지만,
감수성으로 윤리를 제시하는 리더는 자율을 낳는다.
즉, 윤리는 강제의 언어가 아니라 감각의 언어(Sensory Language)여야 한다.
리더의 말 한마디, 표정 하나, 판단 한 번이
조직의 도덕적 공기를 바꾼다.
윤리 감수성이 높은 리더 아래에서는 구성원이 스스로 판단하고,
감시 없이도 책임을 다한다.
리더가 보여주는 태도의 정직함(Integrity of Attitude)이
조직 전체의 신뢰 수준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그는 “이건 규정상 안 된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대신 “이건 우리답지 않다”고 말한다.
그 한 문장은 조직의 윤리를 가장 자연스럽게 설명하는 문장이다.
“윤리를 감각하는 리더만이 자율을 위임할 수 있다.”
기자조직은 자율의 상징이자 윤리의 최전선에 서 있는 집단이다.
그들은 자유롭게 취재하고, 스스로 판단하며, 자신만의 관점으로 세상을 기록한다.
하지만 그 자유는 결코 방임이 아니다.
기자의 자유는 ‘사실에 대한 충성’이라는 윤리 위에 존재한다.
그 자유가 진실로 향하지 않는 순간, 기자의 모든 권한은 의미를 잃는다.
그래서 기자조직의 자율은 권리가 아니라 공적 신뢰(Public Trust)를 지키기 위한 의무다.
즉, 기자의 자율은 자기표현의 자유가 아니라,
공동체를 대신해 진실을 증명해야 하는 책임의 자유(Responsible Freedom)다.
뉴커리어 시대의 조직 역시 이 원리를 그대로 따른다.
자율을 강조하는 기업일수록, 그 자율이 작동하기 위한 윤리적 기반이 더 단단해야 한다.
자율이란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혜택이 아니라,
스스로 책임질 수 있는 사람에게만 허락되는 신뢰의 자격이다.
스스로 목표를 세우고, 결과를 감당하며,
윤리적 기준을 내면화한 사람만이 진정한 자율의 주체가 된다.
그렇기에 자율과 윤리는 대립되지 않는다.
오히려 서로를 지탱하는 조직의 두 축(dual axis)이다.
자율이 윤리 없이 작동하면 방종이 되고,
윤리가 자율 없이 강화되면 억압이 된다.
기자조직은 이 균형을 통해 자유를 유지한다.
자율이 개인의 창의성을 키운다면,
윤리는 그 창의성이 사회적 신뢰로 전환되도록 돕는다.
결국 자율은 윤리의 내부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
윤리가 자유를 제한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유를 오래 지속시키는 구조물이다.
이 원리는 오늘날 모든 조직에 적용된다.
조직의 신뢰는 제도나 규칙에서 시작되지 않는다.
그것은 “스스로의 양심을 경영하는 문화”,
즉 개인의 윤리적 자각이 모여 만들어진 집단의 태도에서 비롯된다.
리더가 구성원을 통제하는 대신,
그들의 판단을 신뢰하고 책임의 기회를 부여할 때,
조직은 통제 없이도 질서를 유지한다.
이때의 질서는 외부 강제가 아닌 내면의 규율(Inner Governance)로 작동한다.
기자조직이 오랜 세월 자유로운 동시에 신뢰받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리더에게 자율을 설계한다는 것은
결국 ‘신뢰를 운영하는 일’과 같다.
윤리로 보장되지 않은 자유는 결국 혼란을 낳고,
책임으로 뒷받침되지 않은 자율은 언제든 붕괴한다.
반대로, 윤리로 다듬어진 자율은
조직을 단단하게 묶는 가장 강력한 문화적 접착제다.
자유를 주는 리더가 아니라,
자유를 감당할 수 있는 조직을 만드는 리더가
결국 진짜 편집자형 리더다.
“자율은 신뢰의 다른 이름이다.
그리고 신뢰는 책임의 또 다른 표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