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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선생 Jul 14. 2016

개고기 논란에 종지부를 찍어보자

개는 친구인가 음식인가?

매년 되풀이되는 해묵은 논쟁이 있습니다. 여름이면 어김없이 여러 매체를 장식하는 이 주제는 바로 개고기 식용에 관한 것입니다. 곧 복날이고 하니.. 오늘은 이 주제에 대해 말씀드려볼까 합니다.


개는 인간의 친구일까요? 음식일까요?

세상에는 개를 인간의 친구로 생각하는 사람들과 음식의 한 종류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독자 여러분께서도 둘 중 하나의 입장이실 겁니다.


그런데 개가 반드시 인간의 친구여야 할 보편적이고도 절대적인 이유가 있을까요? 또한 개가 사람이 먹는 음식이어야 할 보편타당하고도 근본적인 이유가 있을까요? 세상에 그런 이유는 없습니다. 단지 '그렇게 생각해 왔던 습관'이 있을 뿐입니다. 즉 개고기 식용에 대한 논쟁은 문화의 문제라는 것이죠.


개와 인간의 관계: 서양 vs 동양

개가 인간의 친구라는 입장은 주로 서양문화에서 발달했고 개가 음식이라는 생각은 대개 동양문화에 널리 퍼져 있습니다. 우선, 각각의 입장이 어떤 과정을 통해 형성되었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개는 1만년 쯤 전부터 늑대와 유전적으로 분리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아마 그 즈음부터 가축화가 이루어졌겠지요. 개는 처음에 인간들의 사냥을 돕는 사냥개로 인간의 삶에 들어왔을 겁니다. 그러다가 사람들의 삶이 다양해지면서 개의 의미도 변해왔겠지요.


서양문화는 유목, 그리고 상업문화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사자, 표범, 늑대, 하이에나 등등.. 온갖 위험한 동물들이 위협하는 초원에서 밤낮없이 양떼를 지키는 것은 외롭고 힘든 일이었습니다. 개는 인간 대신 양떼를 몰아주고 지켜줍니다. 추운 밤에는 양치기 옆에서 따뜻한 체온을 나누어줬겠지요.

양치기 개

장사를 하는 경우에도 그렇습니다. 값나가는 물건들을 창고에 넣고 자물쇠를 잠가도 마냥 안심할 수만은 없습니다. 후각과 청각이 예민한 개는 보관한 상품을 지켜주고 또 먼 장삿길에 동행이 돼 주었을 겁니다. 이러한 배경에서 개는 일단 인간에게 친숙하며 또 도움이 돼 온 존재였습니다.


서양에서도 개가 본격적으로 인간의 친구 반열에 오르게 된 것은 비교적 근대에 들어서입니다. 산업혁명 이후 서양(유럽)인들의 삶은 근본적으로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대규모 공장이 생기면서 도시에 인구가 몰리고 농촌에서는 전통적 공동체들이 사라지게 됩니다. 이에 사람들은 그동안 이웃이나 가족에게서 충족했던 관계나 정서적 욕구들을 채울 길을 잃게 된 것입니다.


점점 산업화 및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사람들 간의 친밀한 관계나 정서적 지지가 줄어들자 이러한 욕구를 대체할 대상을 찾았고, 그 대안으로 떠오른 것이 애완동물(반려동물)이었습니다. 문화적으로 개와 친숙했던 데다 고대로부터 왕이나 귀족들에 의해서 사냥용이나 애완용으로 개를 키운 역사가 있었거든요.

페데리코 2세의 초상, 티치아노 작 (16C)

곧, 애완동물 산업은 급속도로 발전하여 현재에 이르게 됩니다. 고도의 산업화가 이루어지고 사람들의 삶의 모습이 빠른 속도로 비슷해진 2차 세계대전 이후, 서양문화에서는 개는 인간의 친구로 받아들이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친구가 필요했고 개는 사람들의 친구라는 생각이 뿌리를 내렸습니다.


반면, 동양은 농경문화에 기반하고 있습니다. 한번 씨를 뿌리면 추수때까지는 논이나 밭에 꼼짝 않고 있는 농작물의 특성상 농경문화에서는 딱히 지켜야 할 재산이 없었습니다. 또한 공동체 내에서의 조화와 협동이 중요했기 때문에 이웃을 도둑으로 의심하는 것도 바람직한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농경문화권의 사람들에게도 저 옛날 수렵시절부터 가축화된 개들이 있었습니다. 딱히 지킬 것은 없었지만 동네에 그렇게 있었지요. 그래서 농경문화에서 개는 약간 '잉여의', '흔해빠진', '쓸데없는' 등등의 의미를 갖습니다. 예를 들면, 우리말에 많은 욕이 '개'로 시작하고 있고요.. 과일같은 것도 사람이 먹기 나쁘게 작고 맛이 없으면 '개'를 붙였습니다(예, 개복숭아, 개살구).

이암의 모견도

그런데 농경문화에서는 여름에 일이 많습니다. 비가 많고 날이 뜨거워 잡초가 많이 올라오는데 이걸 제때 뽑아주지 않으면(김매기) 벼가 제대로 못 자라버리니까요. 장마나 태풍 등 풍수해로 논물이 넘치거나 벼가 쓰러진 걸 세우는 것도 이때입니다.  


마침 양식이 모자라지는 때가 또 여름입니다. 일이 많아 힘쓸 데가 많은데 배는 고프지 기운은 없지.. 인도와는 달리 우리는 소를 먹긴 했지만 배고프다고 농사짓는 소를 함부로 잡아먹을 수는 없습니다. 돼지나 닭도 큰 일 있을 때나 맛볼 수 있는 스페셜 푸드구요.


그때 사람들의 눈이 간 곳이 동네에 잉여롭게 돌아다니고 있는 개들입니다. 개는 딱히 번식을 시킬 필요도 없고 음식을 해먹일 필요도 없이 흔하게 존재하는 단백질원이었던 것입니다. 더구나 동의보감, 본초강목, 향약집성방 등에 소개되고 있는 개고기의 효능은 여름철 떨어진 기력을 보충하고 활기를 찾는데 그만이죠. 때문에 병에서 회복하는 환자들에게도 많이 먹였습니다.



논쟁은 여기서부터...

이런 이유로 동양 농경문화권에서는 개가 음식의 의미를 갖게 된 것입니다. 동양이나 서양이나 각자 자신들의 주어진 조건에 충실하게 살다보니 생긴 의미이고 습관입니다. 여기에는 어떠한 보편적이고 절대적인 이유도 없습니다. 그런데 왜 매년 개고기 논쟁이 되풀이될까요?


개고기 반대론 쪽의 입장은 개가 인간의 친구이니 먹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불결한 사육환경이나 비인도적 도축, 비위생적인 유통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근본적인 이유는 개가 인간의 친구라는 것이죠. 그렇지 않다면 개고기를 먹지 말아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가 먹는 소고기나 돼지고기, 닭고기처럼 위생적인 환경과 인도적 도축을 위한 제도를 마련하면 될 일입니다. 그러나 개고기 반대론 측은 그것이 아니라 육식의 대상으로서의 개를 금지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이유는 개가 인간의 친구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식의 주장을 하는 이들에게 적절한 답변이 있습니다.

우리가 먹는 것은 친구가 아닙니다.


세상에 친구를 어떻게 먹습니까? 우리가 먹는 것은 친구가 아닙니다. '고기'로서의 개인 것이죠. 수십, 수백, 수천만 마리씩 인간에게 먹히고 있는 소, 돼지, 닭들은 왜 먹습니까? 그들에게는 '친구'라는 의미가 부여돼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친구를 먹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가 소를 먹지만 평생 소와 친구처럼 지내온 워낭소리의 할아버지께서 바로 그 소를 드실까요? 돼지를 반려동물로 키우는 사람은 그 돼지는 먹지 않을 겁니다. 그러나 삼겹살집에 가서 다른 돼지고기는 잘 먹겠지요.

이 둘의 관계는 친구입니다.

이렇듯 식용과 비식용의 경계는 그 동물과 우리의 '관계'에서 비롯됩니다. 그런데 왜 개만은 그런 개별적 관계에서 벗어나 보편적으로 우리가 먹지 말아야 하는 것일까요? 다시 말해, 왜 개고기 반대론자들은 나와 친구가 아닌 개도 먹어서는 안된다는 주장을 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무리한 요구입니다. 내가 A라는 사람과 친구라고 해서 B에게도 A가 친구일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물론 B가 A를 잘 소개받고 마음이 맞아서 둘이 사귈 수는 있겠죠. 하지만 그것은 B의 의지에 달린 문제입니다. 내가 B에게 A랑 사귀어라 말아라 할 권리는 없다는 말씀입니다.


한 가지 덧붙이겠습니다. 개가 인간의 친구라면 인간은 개를 과연 친구로서 대접하고 있을까요?

강아지 공장이라고 들어보셨을 겁니다. 사람들이 원하는 품종을 만들기 위해 개고기로 사육되는 개들만큼이나 비참한 환경에서 죽을 때까지 짝짓기만 하는 개들이 있습니다.


인간이 원하는 털색깔, 귀의 모양, 주름, 다리 길이를 얻기 위해 현존하는 품종의 수많은 개들이 유전적 질병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개 짖는 소리가 시끄럽다고 성대를 제거하거나 발정기때 지저분하다고 생식기관을 제거하는 경우도 많지요. 친구가 목청이 크면 성대를 제거하십니까? 친구가 이성을 과하게 쫓아다닌다고....


제 입장은 개고기를 반드시 먹어야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문화 이해는 서로 다른 문화가 공존할 길을 찾자는 것이지, 나는 옳고 너는 틀렸으니 넌 그거 하지마라고 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기억해주시기 바랍니다.


한국에서도 반려동물의 의미가 변화하고 있습니다. 가족과 이웃, 공동체의 의미가 퇴색하여 더이상 인간관계에서 정서적 지지를 충족하는 것이 쉽지 않은 환경이 되었습니다. 자연스럽게 나에게 사랑과 애정을 주는 존재를 친구로 받아들이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나와 같은 집에 살면서 나와 삶을 나누는 존재는 친구입니다. 그리고 그 대상이 개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의 선택이었을 뿐이지 개가 인간의 친구어야 한다는 절대적이고 보편적인 이유를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간의 반려동물산업으로 개들의 사육조건, 번식력, 수명, 생활방식 등이 인간의 요구에 맞게 개발되었기 때문에 개가 인간의 친구라는 자리에 가장 가까울 수 있었던 것이지, 인간의 친구는 고양이나 거북이, 물고기로부터 소나 말, 돼지, 닭, 소라게나 달팽이도 될 수 있다는 것이죠.

인간의 친구 달팽이 (꺄르륵)

개고기 식용의 문제는 결국 어디까지나 나와 관계를 맺은 대상과의 문제입니다. 나와 친구로 만난 대상은 안 먹는 것이 당연하고 음식으로 만난 대상은 먹으면 그뿐입니다. 다만 어쩔 수 없이 다른 동물의 고기를 먹어야 하는 인간의 입장에서 보다 위생적인 사육과 도축, 유통환경의 정비는 반드시 이루어져야 하겠습니다.


근본적인 문제는 서양문화가 동양문화보다 모든 면에서 우월하다고 보는 진화론적인 인식입니다. 우리도 (서양처럼) 발전했으니까, 더이상 그런 거 먹지 않아도 먹을 거 많으니까 개고기를 먹지 말자는 사람이 많습니다. 글쎄요. 그러면 왜 어떤 나라는 수렵채집 시절에나 먹던 달팽이를 먹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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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팽이 사진출처: 네이버 '마리안' 님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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