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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선생 Jun 03. 2016

여성혐오의 문화적 기원

성역할 변화에 따른 '극복할 수 있는' 혼란

강남역 화장실 살인사건에 이은 파장이 큽니다. '여성도 안전한 사회'를 꿈꾸며 시작됐던 추모의 장은 어느새 남성과 여성이 맞부딪치는 전쟁터로 변해버렸습니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남과 여는 대립의 대상이 아니라 공존의 주체입니다. 


서로의 잘잘못을 따지는 것은 본질에서 벗어난 일입니다. 우리는 이 사건으로부터 남성과 여성이 함께 살아가는 세상의 단초를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불편함'을 참아내는 인내로부터 시작됩니다.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익숙함을 추구합니다. 그러나 익숙한 것이 모두 좋거나 옳은 것만은 아닙니다.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우리는 불편함에 익숙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한 정신이상자의 범죄를 여성에 대한 혐오범죄로 규정하는 것은 잘못이고, 남성들을 잠재적 범죄자 취급하는 것이 불편하다는 시각이 많습니다. 그러나 이번 사건은 단순한 개인의 범죄라고 보기 힘든 점이 많습니다. 정신이상이라고는 하나 그가 선택한 범죄의 대상은 남성이 아닌, 여성이었습니다. 


범죄의 대상을 선택했다는 점에서 일반 묻지마 범죄와는 다릅니다. 그는 왜 여성을 선택했을까요? 단지 힘이 약해 제압하기 쉬워서? 그것뿐이 아닙니다. 범인은 여성들이 자신을 무시한다며 여성에 대한 혐오를 키워왔습니다. 


즉 범인은 자신의 여성에 대한 분노를 표출하기 위해 피해자의 성별을 미리 선택했던 것입니다. 결코 정신이상자의 묻지마 범행이 아닌 이유입니다. 그렇다면, 이 사건은 왜 개인의 혐오범죄가 아닌 남성의 여성혐오라는 사회적 의미를 갖게 될까요? 


그것은 여성이 범죄의 대상이 되는 것이 한국 사회에서 매우 보편적인 일이기 때문입니다. 아래의 표에는 각국의 살인사건 피해자의 남녀 비율이 나와 있습니다. 여성 10만 명당 피해자 수에서 한국은 다른 나라들을 압도합니다.


이번 사건에서 많은 남성들이 자신은 여성을 혐오하지 않을 뿐더러 오히려 존중하고 배려하기 때문에 남성들을 잠재적 범죄자 취급하지 말라고 하지만, 통계는 그렇지 않습니다. 여성에 대한 온갖 끔찍한 범죄로 인터넷에 오르내리는 인도나 중국보다도 높은 수치입니다.


이런 결과는 한국에서 남성들이 어떠한 조건이 되면 여성에게 범죄를 저지를 수 있는 확률이 다른 나라에 비해 크다는 것으로, 한국 문화의 어떤 점이 한국 남성들이 그러한 범죄를 저지르기 쉽도록 '패턴화'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패턴화는 '공유된' 가치 및 행동의 양식으로 개인의 행동과는 다른 것입니다. 내가 그러지 않는다고 해서 그런 문화가 없다고 말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분명 한국문화는 여성이 범죄의 피해자가 되기 쉬운 문화입니다. 


관건은 이러한 문화의 기원을 밝혀 여성들이 안전하게 살 수 있는 나라, 남성과 여성이 함께 행복한 나라를 만드는 데 있습니다. 나는 그렇지 않으니 이번 사건을 여성혐오로 규정하는 너희들은 남혐이다라는 주장은 현상의 이해와 문제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일부 여성들이 주장하는 남성 책임론도 지나친 면이 있습니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불안과 위협에 노출된 채 살아야 하는 상황을 충분히 이해하고 또 공감합니다만 남성들 개개인을 잠재적 범죄자 취급하는 것은 서로의 감정을 상하게 하고 문제를 본질에서 벗어나게 할 뿐입니다. 


이번 사건으로부터 교훈을 얻고, 남성과 여성이 공존하는 미래의 대한민국을 위해 개인으로서의 남성이 아닌, 여성에게 범죄를 저지르는 남성들을 패턴화하는 "문화"에 집중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여혐의 문화적 기원

여성혐오는 전통적 성역할에서 기원을 찾을 수 있습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전통적 사회는 대부분 가부장 제도를 유지했습니다. 인류의 역사상, 그것이 집단의 생존에 유리했기 때문이었지요. 구성원들의 안녕을 보장해 줄 현대적 국가시스템이 정립되기 이전까지, 수(십)만년의 시간동안 인간들은 부족단위로 생존을 추구해왔습니다.


과학과 기술이 발전하기 전, 먹을 것을 구하고 전쟁에 나가 싸우는 등 생존을 위한 중요한 업무들은 남성들의 일이었고 그 결과 남성중심의 가부장적 질서가 확립됩니다. 이러한 사회에서 남성은 바깥일을 해서 가족을 보호(부양)하고 여성은 집 안에서 아이를 낳아 기르고 살림을 하는 전통적 성역할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여기에 별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남자가 힘을 쓰고 적과 싸우는 것이, 여자가 아이를 낳아 기르는 것이 '효율적'이었기 때문입니다. 생존에 급급한 상황에서 그 이외의 옵션을 생각할 여지가 없었던 것이지요. 그러나 성역할의 구분은 대부분의 사회에서 여성이 남성보다 못하다는 인식과 여성의 남성에 대한 종속을 가져오게 됩니다.


산업혁명 이후, 생산기술이 발전하고 치안, 보건, 복지 등의 사회시스템이 갖추어지면서 이러한 전통적 성역할에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가정의 생존을 위해 남성만 일을 할 필요가 없어진 것이지요. 이러한 사회변화에 따라 여성의 교육수준이 높아지고 직업선택의 폭이 넓어지고 성역할의 변화가 일어납니다.


하지만 이러한 변화에 대한 남성들의 저항은 거셌습니다. '여자가 나댄다', '재수없다', '여자는 수준이 낮아서 사회활동을 할 수 없다' 등의 일베에서나 나올 주장들이 19세기 유럽남성들의 평균적인 인식이었습니다. 현재 유럽의 양성평등은 권리를 찾기 위한 수많은 여성들의 희생이 있은 다음에 가능할 수 있었습니다. 


인류의 역사에서 여성들이 참정권을 갖기 시작한 것이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의 일입니다(스위스 같은 나라는 1971년이 되어서야 여성의 참정권을 인정합니다). 그만큼 사람들이 오랜 시간동안 남성 우월의 가부장적 질서에서 살아왔다는 뜻입니다. 


한국의 경우

우리나라는 어떨까요? 서구가 200년 이상에 걸쳐 이루어낸 사회경제적 변화를 불과 5,60년에 따라잡은 한국이지만 문화적 인식의 변화 속도는 그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이것을 한국인들의 책임이라고 하긴 어렵습니다. 말이 5,60년이지 한국의 현재는 200년 이상의 시간이 압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당연하게도 전통적 가부장 시대의 성역할에 대한 인식이 상당 부분 남아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전통적 성역할이란 '남자는 바깥 일을 하고(나가서 돈을 벌어 가족을 부양하고), 여자는 집안일을 한다(출산, 육아, 살림)'는 것입니다. 


한국에서 이러한 성역할에 실질적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 이후의 일입니다. 80년대만 해도 '현모양처'가 꿈인 여성들이 많았지요. 사회활동을 하는 여성들이 증가하고 있었지만 직장에 다니는 여성들도 결혼해서 아이를 낳으면 퇴사하는 것이 당연했던 분위기였습니다. 

 

그러다가 97년에 IMF가 터지면서 수많은 가장들이 직장을 잃었습니다. 더이상 남자들의 노동만으로는 가정의 경제가 유지되지 않는 시대가 열린 것입니다. 많은 어머님들이 비정규 저임금 노동시장으로 몰렸고 이러한 상황이 지속되면서 여성들이 사회활동이 점차 당연하게 생각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제한된 일자리를 여성들이 공유하게 된 것입니다. 과거 여성들의 학력이 낮았던 시절, 여성들은 주로 저임금 노동집약형 일자리나 일용직 등의 일자리밖에 구할 수 없었지만, 남아선호가 사라지고 출산율이 줄면서 점차 고학력 여성들이 '남성들의 영역'에 진출하는 것이 본격화된 것이죠.


여기에서 남성들의 혼란이 나타납니다. 

'왜 이렇게 여자들이 설치고 다니지? 여자들은 집에서 애 보고 밥 하는 거 아니었어?'

남성들의 분노는 우선 여성 운전자들에게 나타났습니다. 운전에 서툰 여성 운전자를 비웃는 '김여사'란 표현이 그것입니다.


'김여사'의 본질은 여자가 집에 안 있고 차를 몰고 나온데 대한 남성들의 분노입니다. 사람들은 원래 익숙한 것을 추구하는 존재입니다. 낯선 것을 보면 두려워하고 공격하려 하지요. 남자의 것이던 운전의 세계에 뛰어든 여성들이 일차적으로 공격의 대상이 된 것입니다.

밥 해놓고 나왔다..

김여사는 여성 사회진출의 시작을 의미합니다. 여성의 사회진출이 일반화되면서 회사, 공직, 법조계, 군대 등 남성들이 독식했던 영역들은 빠르게 줄어들었습니다. 여성들 특유의 집중력과 사회적 인정을 향한 오기가 그 속도를 더하게 한 측면도 있지요.


이제 남성들은 불안을 느낍니다. 자신들이 설 자리가 없어져 간다는 불안이지요. 지속되는 불황과 고용시장 불안정으로 가뜩이나 어려워진 취업시장에서 경쟁력을 잃는 남성들이 속출하면서 성역할에 대한 혼란은 여성에 대한 혐오의 형태를 띄게 되었습니다. 


일베라는 특정 사이트를 통해 여성혐오가 가시화된 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최근 우리사회에 나타나고 있는 분노범죄의 희생자가 주로 여성이라는 점은 여성혐오가 일부 또라이들의 일탈이 아닌 우리사회의 구조적 문제라는 점을 시사합니다. 


경쟁에서 밀려난 남성들이 자신의 실패를 여성에게 돌리고 그에 대한 분노를 표출하는 것이 여성에 대한 분노범죄의 본질인 것입니다. 이러한 패턴의 범죄가 늘어나는 데에는 남성에게도 작용하고 있는 전통적 성역할에 대한 부담감도 한 몫을 했지요. 


'남자가 능력이 있어야지', '남자라면 처자식 정도는 먹여살려야 하는 거 아냐?', '남자가 찌질하게...' 

우리 사회에는 여성의 성역할에 대한 고정관념 만큼이나 남성에 대한 고정관념도 강하게 존재합니다. N포세대, 흙수저로 대변되는 현 상황에서 남자로서 느끼는 성역할에 대한 부담감에 여성들의 변화된 성역할에 대한 인식이 충돌한 것이 여성혐오라는 사회적 현상인 것입니다.


따라서, 여성혐오를 '능력도 없는 찌질한 남자들이 드러내는' 여성에 대한 박탈감에서 비롯된 분노..로 규정하는 것은 전통적 성역할의 또 다른 희생자인(희생의 정도는 다르겠습니다만..) 능력없는 남성들을 남성이라는 이유로 다시 한번 매도하는 것입니다. 그들도 경쟁에서 도태되고 싶어 도태된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제가 드리고자 하는 말씀은 첫째, 여성혐오가 일부 찌질한 남성들의 문제가 아닌 사회변화와 전통적 성역할 변화에 따른 구조적인 문제라는 것이고, 둘째, 한국문화의 미개성과 후진성에서 기인하는 '노답적인' 상황이 아니라 세계 대부분의 나라가 겪었고 또 겪고 있는 '과정상'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여성혐오는 반드시 극복해야 할 문제이며 또 극복할 수 있는 문제입니다. 남성과 여성이 모두 행복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모두의 지혜를 모아야 할 때입니다. '강남역 살인'이라는 사건을 계기로 남성과 여성의 성역할과 공존에 대해 긍정적인 인식의 변화를 이끌어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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