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위주의적 리더십의 종언
2016년 프로야구 개막 이래 한화처럼 많은 화제를 뿌리고 있는 팀이 없습니다. 아직 시즌 초반이지만 한화는 3승 14패, 승률 .176이라는 성적으로 10개 팀 중 10위에 머물고 있는 중입니다.
한화의 연패와 승률이 이슈가 되는 것은 한화가 최근 2,3년 간 엄청난 돈을 들여 팀을 리빌딩?했기 때문입니다. FA에 나온 실력있는 선수들을 고액으로 사들여 당장이라도 우승을 바라볼 수 있는 전력을 꾸렸습니다.
한화 선수들의 몸값은 102억 1000만원으로 국내 프로야구 구단 중 1위입니다. 억대 연봉을 받는 선수가 20명이 넘습니다. 물론 그만한 연봉을 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검증된 실력을 갖춘 선수들입니다. 그러한 선수들이 모인 한화는 왜 기대 이하의 성적에 그치고 있는 것일까요?
최근 들려오는 한화의 소식들은 팀 내에 심각한 문제가 있음을 보여줍니다. 바로 소통의 부재입니다. 올해부터 투수코치를 맡았던 고바야시 코치가 불과 3개월만에 일본으로 돌아간 것은 이러한 소통의 문제를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것은 김성근 감독의 리더십에서 기인합니다.
김성근 감독은 야신(野神)이라 불릴만큼 야구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치밀한 전략, 카리스마 있는 지도력으로 유명한 분입니다. 88년 꼴찌였던(7위/7개팀) 태평양을 이듬해인 89년 3위에 올려놓는 것을 시작으로, 95년 꼴찌(8위/8개팀)였던 쌍방울, 2000년대 초반 하위권을 헤매던 SK도 김성근 감독 영입 후, 단기간에 타 팀들이 두려워하는 강호로 변모했습니다.
분명 김성근 감독의 리더십은 훌륭했고 또 의미있었습니다. 그러면 그의 리더십에 어떤 변화가 생긴 것일까요? 프로야구를 떠난 이후에도 김성근 감독의 리더십에는 문제가 없어 보였습니다.
김성근 감독은 SK를 그만둔 후 고양 원더스라는 독립야구단을 지도했는데, 기본기도 갖추어지지 않았던 선수들을 가르쳐 프로구단들의 2군이 참여하는 퓨쳐스리그에서 2012년 20승 7무 21패(승률 .488), 2013년 27승 6무 15패(승률 .643), 2014년 43승 12무 25패(승률 .632)의 성적을 기록합니다.
2군이라고는 하지만 밥먹고 야구만 해 온 프로선수들 사이에서의 독립구단의 이런 성적은 경이적이었고, 선수들의 야구에 대한 열정과 함께 김성근 감독의 지도력은 '파울볼'이라는 영화로 제작되었을 만큼 세간의 주목을 끌었습니다.
수년 동안 하위권을 맴돌았던 한화팬들의 열망과 함께 2015년 한화 감독으로 부임한 이후에도 김성근 감독의 신화는 계속되는 듯 했습니다. 이기기 위한 작전, 예측할 수 없는 승부. 뒤지고 있는 경기를 뒤집고 지더라고 끝까지 따라붙은 한화의 경기는 팬들에게 '마리한화'라는 별명까지 얻을만큼 짜릿하고 중독적이었습니다.
김성근 감독의 리더십에 대한 말들이 나오기 시작한 것은 그때부터였습니다. '벌떼야구'로 요약되는 변칙적 투수운용, 타순이 무의미한 번트작전, 경기에 진 날이면 행해지는 특타와 수비훈련.. 프로야구팀이 아니라 고등학교 야구팀이냐는 비아냥이 들려왔음에도 김성근 감독은 꿋꿋이 자신의 방식을 고수했습니다.
6위로 아쉽게 2015년 시즌을 마감한 2016년의 한화는 그 어느때보다 높은 기대를 받았습니다. FA시장에 나온 수십억대 몸값의 베테랑들로 지적돼 온 약점을 보완하며 모든 전문가들에게 우승후보로 꼽혔던 한화입니다. 그러나 시즌 개막 후의 한화는 그러한 전망을 무색케 하는 팀이 되어 있었습니다.
감히 제가 야구에 대해서 김성근 감독에게 충고를 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럴만한 자격도 능력도 물론 없구요. 제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리더십에 대한 말씀입니다. 리더는 단지 그룹을 이끌고 가는 사람이 아닙니다. 구성원들의 역량을 극대화하여 설정한 목표를 이루게끔 하는 이가 리더입니다.
리더십의 관점에서, 김성근 감독은 카리스마형 리더입니다. 그의 권위는 절대적입니다. 반론은 용납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설정한 목표를 위해 선수들은 기계의 부속처럼 작동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여러가지 불이익(특타, 벌투, 2군행 등)을 당하게 됩니다.
이러한 김성근 감독이 특히 강조하는 것은 정신력입니다. 한화에 부임한 이후, 선수들의 정신자세를 지적하는 김성근 감독의 말과 늘어난 훈련량에 쩔쩔매는 선수들의 기사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오늘 이야기하고자 하는 포인트가 바로 여기입니다.
한국인들은 '투혼', '정신력'이라는 말에 익숙합니다. 뜻을 세우면 못할 일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성공하지 못하는 사람을 가리켜 정신력이 약하다고 비난합니다. 노력이 부족하다고 합니다. '하면 된다'는 말이 틀린 말은 아닙니다. 안하면 될 일도 안되는 거니까요.
36년의 일제 강점기에서 벗어난 이후, 곧바로 터진 전쟁으로 한국은 잿더미가 되었습니다. 한국인들은 '0'에서부터 모든 것들을 시작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무것도 없었기에 일단 했습니다. 하니까 뭔가 나왔습니다. 당연합니다. 아무것도 없었으니까요.
봐라, 하면 되지 않느냐. 황무지에서 우리는 나라를 세웠다.
없는 것을 새로 만드는 것은 힘든 일입니다. 시행착오가 있을 수밖에 없고 부작용이 나타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한국인들은 '정신력' 하나로 그 과정을 버텨냈습니다. 수많은 시행착오와 부작용은 '결과'라는 이름아래 묻혀져 갔습니다. 한국문화에서 카리스마형 리더에 대한 선호와 '정신력'에 대한 무한한 강조는 이 과정에서 나온 산물입니다.
그러나 카리스마에 대한 의존과 정신력의 강조는 시스템을 무시하고 가시적 성과에 목을 매는 사회를 만듭니다. 시스템 없이도 내가 해보니 됐었거든요. 눈에 보이는 성과를 위해서는 법도 원칙도 같이 사는 이웃도 무시하게 만듭니다.
오로지 정신력에 의지해서 살아온 사람들은, 특히 성공한 사람들은 다른 이들의 말을 듣는 방법을 모르며 다른 이들의 아픔에 공감하지 못합니다. '나는 정신력으로 이겨냈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이 정신력 약한 이들의 투정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입니다.
열정페이, 아프니까 청춘이다, 노력이 부족해, 나는 그러지 않았다. 우리는 구성원들의 희생을 당연히 여기는 수많은 '리더'들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한국사회는 발전했고 우리는 더 행복해졌을까요?
김성근 감독의 리더십은 경제개발 5개년 계획과 같은 '비상상황'에 적합한 리더십입니다. 프로야구가 아직 정착하지 못했던 시절, 김성근 감독은 훈련되지 않은 선수들을 카리스마로 휘어잡아 빠른 시간에 소기의 성과를 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한화에서 그의 리더십이 먹혀들지 않는 이유는 지금이 2016년이기 때문입니다.
프로야구는 한국에 완전히 정착했습니다. 선수관리와 작전 등의 영역은 각 분야에서 경험을 쌓아온 코치들이 분담하고 있고, 김성근 감독을 야신의 반열에 오르게 했던 전력분석도 이제는 그만의 영역은 아닙니다. 선수들의 기량도 그 옛날 태평양이나 쌍방울을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자신의 실력으로 수억대의 연봉을 받는 직업야구인이 현재의 한화 선수들입니다.
이런 상황에 대한 '비상시국형' 리더십의 결과는 지금 한화의 성적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시즌 초반입니다. 어떤 이는 더 지켜보자고 말합니다. 돈 많이 받는 한화 선수들이 정신력이 빠져서 그렇다고 합니다. 더 다그쳐야 한다고 말입니다. 며칠 전, 한화 선수단은 단체 삭발을 감행했습니다. 한국문화에서 삭발은 정신력을 다잡는 일종의 의식입니다. 과연 그들에게 부족했던 것은 정신력이었을까요?
눈물겨운 삭발투혼으로 그제는 7연패를 끊고 승리를 거두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선수들의 비장한 투혼으로, 시즌 후반이면 한화는 한국시리즈 우승자가 되어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런 식의 성적을 얼마나 지속할 수 있을까요?
김성근 감독의 지금과 같은 리더십이 계속된다면 한화는 좋은 성적은 거둘 수 있을지 모르지만 매일같이 등판해야 하는 투수들의 선수생명은 짧아질 것이고, 밤늦도록 특타를 하고 펑고를 받으며 두발의 자유조차 보장되지 않는 불행한 삶이 계속될 것입니다.
선수들이 돈을 많이 받으니까 그 어떤 대우도 받아들여야 할까요? 경기의 피로도 풀지 못한 채 사랑하는 가족도 만나지 못하고 밤늦도록 야구장에서 공을 받고 방망이를 휘두르는 모습이 한화의 승리를 바라는 팬들의 마음일까요?
그래서 우리는 김성근 감독의 실패를 바라야 합니다.
한화 선수들은 프로선수로서의 자부심을 갖고 행복하게 야구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한화는 선수들의 정신력과 희생으로 승리하는 팀이 아니라 잘 짜여진 시스템의 힘으로 승리하는 팀이 되어야 합니다. 김성근 감독 개인이나 한화 야구단에 악감정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우리가 사는 사회가 좀더 나아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팀의 승리를 위해 선수들의 불행쯤은 가볍게 여길 수 있는 사회는 더 나은 사회가 아닙니다. 자신의 일에 자부심을 갖고 즐겁게 훈련하는 선수들이 팀의 승리를 위해 힘과 지혜를 모을 수 있는 사회가 더 나은 사회라고 저는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