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만히 있으라 vs 가만히 있지 않겠다
2014년 4월 16일은 한국인들의 마음에 큰 충격으로 남았습니다. 심리학에서는 정신적 외상을 트라우마라고 하는데 세월호라는 이름의 여객선의 침몰과 배에 탔던 304명의 죽음은 한국인들에게는 또 하나의 트라우마가 되었습니다.
'또 하나'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한국인들에게는 트라우마가 많습니다. 삼풍백화점, 성수대교, 서해훼리호, 대구지하철 참사 등등. 영화 '괴물'에서 묘사된 것처럼 우리는 수많은 합동분향소들을 보아왔습니다. 그 중에서도 세월호 사건이 중요한 이유는 사건의 발생과 이후에 대응하는 국가의 모든 대처 때문입니다.
다른 참사들도 충분히 사전에 막을 수 있었던 인재의 성격이 짙지만, 세월호 만큼 많은 아쉬움과 의문을 남긴 전례가 없습니다. 해운회사의 탐욕과 정경유착, 구조실패를 가져온 콘트롤타워의 부재를 비롯, 사체인양과 사고원인조사를 둘러싼 숱한 의혹들.. 어느 것 하나 밝혀진 바가 없고 누구 하나 책임지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 사건에 대한 사람들의 감정에는 스러져간 생명들에 대한 안타까움, 가족을 잃은 분들에 대한 연민과 함께 한국사회의 모든 시스템에 대한 전방위적인 분노와 실망이 포함됩니다. 그동안 많이 발전했다고 생각했는데 전혀 달라진 것이 없다는 좌절과 내가 살고 있는 나라의 수준이 이 정도밖에 안된다는 자괴감이 그것입니다.
더 큰 실망은 이 시대를 함께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이웃들에게 비롯되었습니다. 사고의 원인을 밝히고 재발을 막아달라는 유가족들과 시민들의 목소리에 이들은, 사고였을 뿐이다, 경제의 발목을 잡는다, 자식 팔아 돈 번다 등 차마 입에 담기 힘든 말들을 쏟아냈습니다.
당신들은 못먹고 못입으면서도 자식들을 위해 희생하신, 엄마와 어버이라는 말이 무색해지는 순간입니다. 문제는 어느덧 이들의 주장을 따라하기 시작한 우리의 진짜 이웃들입니다. 그들은 세월호의 진상규명과 재발방지를 촉구하는 목소리 앞에 '지겹다'고, '이제 그만 좀 하라'고 말합니다.
무엇이 그리 지겹습니까. 무엇을 했다고 그만 하라 합니까. 희생자 가족들과 시민들의 요구는 단순합니다. 원인규명과 재발방지. 밝혀진 것은 아무것도 없고 재발 방지를 위한 어떠한 가시적인 노력도 행해진 바 없습니다. 왜 우리의 이웃들은 우리의 이웃에게 '가만히 있으라' 하는 걸까요.
가만히 있으라
우리를 둘러싼 모든 부조리에 '가만히 있으라'는 명령은 현대 한국을 요약하는 키워드입니다. 몇십년 전의 한국은 가만히 있지 않으면 언제 알 수 없는 곳으로 끌려가 목숨을 잃을지도 모르는 시대였기 때문이지요.
우리의 부모님들은 살아남기 위해서 가만히 계셨고 경제를 살리기 위해서,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 가만히 계시는 것을 체화하셨습니다. 자식들이 잘 살기를 바라는 마음에 우리에게도 가만히 있으라 가르치셨습니다.
문화란 주어진 환경에서 생존하기 위한 최적의 생활방식이고 그것은 교육을 통해 다음 세대로 이어집니다. 루스 베네딕트가 말한 문화의 패턴화가 바로 이것입니다. 그렇게 '가만히 있는 것'은 우리의 문화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다른 이들의 고통에도, 내 자신의 부조리에도 가만히 있는 것이 최선이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가만히 있지 않고 앞에 나섰다가 불이익을 당하는 이들을 너무나도 많이 보아왔으니까요. 세월호 가족들에게 가만히 있으라는 저분들은 어쩌면 더없이 그들을 걱정하시는 분들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제는 가만히 있지 않는 것을 배울 때입니다. 우리의 후손들에게 가만히 있지 말 것을 가르쳐야 할 때입니다.
가만히 있지 않는 것이 우리의 생존을 위해 더 필요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우리는 가만히 있었습니다. 묵묵히 내 할일만 하며 앞만 보고 달려왔습니다. 하지만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가만히 있으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습니다. 흙수저도, 갑질도, N포세대도, 헬조선도..
이것이 우리가 가만히 있지 말아야 할 이유입니다. 가만히 있지 말아서 작은 변화라도 이루어내고, 그렇게 작은 변화들이 모이면 큰 변화도 이루어낼 수 있을 터입니다. 그리고 며칠 전, 우리는 그 작은 변화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았습니다.
4월 16일은 한국인들의 마음에 트라우마로 남았습니다. 그러나 4월 16일은 한국인들에게 하나의 기점이 될 것입니다. 그 날을 계기로 우리는 가만히 있지 않는 법을 배웠으니까요. 그리고 그 날로부터 시작된 변화가 결국 우리를 바꿀 것입니다.
가만히 있지 않는 것.
그것이 2년 전 그날, 차가운 바닷속에서 스러져간 생명들을 기억하는 방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