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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선생 Apr 06. 2016

투표의 심리학: 누구를 위하여 표를 던지나

묻지마 투표에 담긴 무의식적 기제

총선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선거는 민주주의 국가에서 시민들이 정치에 참여하는 가장 강력한 수단입니다. 선거의 결과에 따라 시민들의 뜻을 정치에 반영할 수 있게 되니까요. 하지만 최근 한국의 선거에서는 우려할만한 투표경향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바로 '묻지마 투표'입니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특정 인물 혹은 정당을 지지하는 경향입니다. 민주사회에서 지지하는 정치인이나 정당이 있다는 것은 당연하고 또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것이 문제가 될 이유는 없습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아래와 같은 태도입니다.


네? 뭐라굽쇼?


나라를 팔아먹어도.. 라니 이게 무슨 말씀입니까. 투표란 시민의 뜻을 대변하여 나라의 일을 할 사람을 뽑는 행위입니다. 어떻게 민주시민의 입에서 나라를 팔아먹어도 특정 당을 뽑겠다는 말씀이 나올 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식의 투표행위는 제대로 된 정치인을 골라내지 못하고 선거의 결과를 왜곡할 뿐 아니라 제대로 된 정책이 입안되고 실행될 수 없게 만듭니다. 한마디로 민주사회의 근간을 뒤흔드는 발언이시란 겁니다. 문제는 이런 식으로 투표하시는 분이 이 분 하나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한국문화에는 도대체 왜 이런 형태의 투표행위가 존재하게 된 것일까요?

오늘은 투표에 즈음하여.. 이 '묻지마 투표'에 담긴 심리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인간은 이성을 가진 합리적 존재입니다. 한편 인간은 놀랄 정도로 비이성적인 행동을 하기도 합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는 어떠한 현상의 이면에는 대개 무의식적 동기가 숨어있습니다.


무의식이란 의식되지 않는 마음의 영역으로 정신역동이론을 창시한 프로이트에 의해 개념화되었습니다. 프로이트는 그 유명한 빙산의 비유를 통해 사람들이 자신도 모르는 채 무의식의 영향을 받고 있음을 역설하였습니다.

수면 아래가 무의식..

프로이트에 따르면 무의식의 상당 부분은 id(원초아; 욕망)와 superego(초자아; 내재화된 도덕, 규범)의 갈등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발생합니다. id와 superego의 갈등은 대개 ego(자아; 조절자)에 의해 중재되는데, ego의 중재로도 해결되지 않는 갈등(예를 들면, 근친상간의 욕구)은 불안이라는 감정을 불러일으킵니다.


불안이란 이 욕망을 계속 품었다가는 내가 이 사회에서 제대로 살아가기 어렵겠구나..하는 감정입니다. 이런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인간의 마음은 방어기제(defense mechanism)를 작동시키는데 대표적인 방어기제가 바로 '억압'입니다. 그러한 욕망 자체를 무의식으로 눌러 버리는 것이죠. 프로이트는 무의식이 이렇게 억압된 욕망들로 이루어져 있다고 보았습니다.


id와 superego의 갈등으로 인한 불안을 해결하기 위해 사용되는 방어기제는 억압 말고도 다양한데요. 저는 '묻지마 투표'의 기저에 이 방어기제가 있다고 봅니다. 다시 말해, 한국인들의 문화적 욕구와 이를 충족시키는 과정이 '묻지마 투표'라는 문화적 현상을 만들어 냈다는 것입니다.

묻지마 투표는 동일시의 결과


동일시(identification)란 불안한 감정을 느끼게 만든 대상과 자신을 같은 편, 혹은 같은 존재라고 믿는 방어기제입니다. 아이들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해결하기 위해 취하게 되는 것이 바로 동일시이죠.


묻지마 투표에서 동일시는 두 가지 경로로 나타납니다.


첫째, 묻지마 투표의 성향을 보이는 분들 중 상당수는 권위주의 정권의 통치를 겪으신 분들입니다. 반공을 국시로 국민들에게 가혹한 통제를 가하던 시절. 말 한마디 잘못 했다가 멀쩡하던 사람이 끌려가서 돌아오지 못하거나 병신이 되어 돌아오는 일이 흔하게 벌어지던 시절.


일제시대, 6.25, 4.19, 5.18 등 트라우마 가득한 현대사를 온몸으로 살아내신 이분들은 '생존'이라는 당면한 목표 앞에서 자신들 위에 군림하던 이들과의 동일시를 (무의식적으로) 선택했습니다. 국가수반과 정부여당에 반대하는 모든 세력을 '국가전복세력'으로 규정하며 탄압했던 권력자들과 같은 태도를 취한 것입니다. 그래야 나와 내 가족이 살아남을 수 있었으니까요.


두번째의 동일시는 대다수 국민들의 순수한 욕망에서 기인합니다. 문화심리학이 밝혀낸 한국인의 대표적 문화적 동기는 '잘 살고 싶다'는 것입니다. 현대 한국의 극적인 성장은 한국인들의 잘 살아 보자는 욕구가 없었으면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문제는 잘 살고 싶다고 해서 모두가 잘 살 수는 없는 현실에 있습니다.


누구는 잘 사는데 왜 나는 잘 살지 못하는가. 나는 잘못 살고 있는 것이 아닐까, 나는 실패자가 아닐까하는 불안에서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는 점을 확인받고자 내가 되기를 바라는 이들에게 자신을 동일시합니다.


몸 하나 누일 공간도 없으면서 강남의 아파트값 하락을 걱정하고, 하루 먹을 끼니가 없으면서도 대기업 오너 가족의 상속세를 챙기는 이들이 진정 원하는 것은, 강남의 아파트에서 자식에게 물려줄 상속세를 계산하고 있는 자신들의 모습이 아닐까요.


자신의 모든 모습을 정당화하는 '자아통합의 욕구'


이러한 동일시의 과정을 한층 강화하는 또 하나의 무의식적 동기는 '자아통합의 욕구'로 추정됩니다. 정신역동이론가 에릭슨은 성격발달단계를 8단계로 나누었는데, 그 중 노년기의 발달과제가 자아통합입니다.


노인들은 살아온 날들을 회상하면서 자신의 인생이 어떤 인생이었는지 의미를 부여하고 죽음을 준비하는데, 만약 자신이 실패한 인생을 살았다면 곧 다가올 죽음 앞에서 인생 잘못 살았다는 절망감이 들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노인들은 자신의 인생에 성공적이라는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과거의 부정적인 기억들을 재조정하여 분리, 분열되었던 자아상을 통합하려는 노력을 기울입니다. 노인분들이 많이 하시는 "내가 젊었을 적에는.."으로 시작하는 옛날이야기들의 기능이 이것입니다.


현재 한국의 노인들이 살아오신 시대는 한국 현대사의 트라우마란 트라우마가 모조리 집약된 그런 시대였습니다. 과거의 자신의 모습이 늘 밝고 희망찰 수 없었던 시대였습니다. 인생의 의미를 찾아야 하는 노년에 어두웠던 과거의 기억은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일 것입니다.


자아통합의 욕구는 강하고 또 끈질깁니다. 부정적이었던 과거의 사건들은 재정의되고 성공적인 현재를 정당화하기 위해 재조직됩니다. 어느 것 하나 넉넉하지 않았던 가난한 삶은 가족과 이웃의 정(情)으로 포장되고 국가가 개인의 삶을 통제하던 시절의 기억은 통금시간을 어기고 사랑하던 그녀와 사랑을 속삭이던 추억으로 변모합니다.


살아남기 위해 내렸던 모든 결정과 더 잘 살기 위해 취했던 모든 행동들은 '그나마 이렇게 발전한 나라'를 만들기 위한, 그래서 너희들을 '남부럽지 않게 가르치고 키운' 당신들의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그땐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 시절을 안 살아본 너희들은 모른다.

다 너희들을 위한 것이었다.

그분들의 '묻지마 투표'는 험난한 세상을 치열하게 살아온
당신들 자신에게 돌리는 위로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무의식적인 동일시는 어느새 의식적인 수준의 도식과 태도로 굳어졌습니다. 가지고 있는 도식과 태도가 확고할수록 사람들은 다른 종류의 정보를 받아들이는 데 인색해집니다. 같은 정보일지라도 정보가 제공되는 방식에 따라 의사결정에 크게 영향을 받게 됩니다(틀 효과). 선거때마다 확인되지 않은 흑색선전이 판을 치는 이유입니다.


그분들이 살아온 시대가 국가와 다른 목소리를 내었다가는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운 시대였기에 그분들의 선택을 비난하기는 어렵습니다. 누구에게나 목숨은 소중한 법이니까 말입니다. 정말 잘 살아보고 싶다는 욕망을 탓하기도 뭐합니다. 저부터도 좀더 폼 나게 잘 살아보고 싶은 욕망에서 자유롭지 못하니까요.


하지만, 그 욕망의 추구가 지금 여기,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을 위한 올바른 선택에 장해가 되는 일이기에 우리는 그 아프도록 순수한 욕망을 다시 들여다 볼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이 땅은 나 하나 뿐만 아니라 나의 가족과 이웃과 후손들이 앞으로도 계속해서 살아갈 곳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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