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해십니다. 오해세요.
올림픽 시즌입니다. 지카바이러스와 치안문제 등 많은 불안요소와 함께 리우올림픽이 개막했습니다. 작년에 왔던 각설이마냥.. 올림픽 시즌이 돌아오면 다시 떠오르는 화제가 있습니다. 바로, 메달 색깔에 연연해하지 말고 최선을 다한 선수들을 응원해주자는 말인데요.
옳은 말씀입니다. 당연히 그래야 하는 것이구요. 저도 100% 동의합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가 나오게 된 배경에 약간 잘못 알려진 사실이 있습니다. 오늘은 그 오해를 바로잡고자 합니다.
연이어 메달 소식이 들려오고 있습니다만 메달의 색깔은 각각 다릅니다. 특히 은메달을 딴 선수들은 울먹이며 금메달을 따지 못해 죄송하다는 말을 반복하는데요. 바로 이 지점이 오해가 발생하는 지점입니다.
많은 분들이 "한국선수들은 은메달을 따면 눈물을 흘리는데 외국선수들은 동메달을 따고도 즐거워한다"며, 이것은 국민들이 선수들에게 금메달을 따오라고 강요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시는 것 같습니다. 거룩한 스포츠의 제전에서조차 성적지상주의에 빠진 저급한 한국인들 때문에 선수들이 은메달을 따고도 즐거워하지 못한다.. 식의 설명인데요.
강준만 선생님 같은 시대의 지식인들께서도 저서에서 언급하시는 걸 보면 '은메달 따고 우는 한국선수와 동메달 따고도 웃는 외국선수'는 꽤 강렬한 대비로 보여졌던 모양입니다. 언젠가부터 성적이 좋지 않아 '죄송하다'는 선수의 인터뷰가 나오면 '죄송해하지 말아요, 우리는 해준 것이 없어요..' 류의 반응이 줄을 잇습니다.
이는 우리사회에 만연한 결과지상주의를 타파하고 중간의 과정과 노력의 가치에 주목하자는 움직임으로.. 물론 바람직한 일입니다만, 그 배경에 있는 오해는 분명 잘못된 것이기에 바로잡아야 하겠습니다.
가장 큰 오해는 '한국선수들만 은메달을 따면 눈물을 흘린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메달 색깔에 따른 선수들의 정서경험은 메드벡과 메데이, 길로비치의 연구(1995)로 밝혀진 보편적 현상입니다. 연구자들은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메달리스트들의 표정을 연구했는데요.
메달이 확정되는 순간의 표정을 분석한 결과, 동메달을 딴 선수들이 은메달을 딴 선수들보다 행복한 표정을 짓는다는 것을 밝혀냈습니다. 연구자들은 23명의 은메달리스트와 18명의 동메달리스트를 표본으로 썼는데 이 중 25명이 미국인(60%)이었습니다. 나머지 16명도 전부 한국선수는 아니었겠지요.
그렇다는 것은 은메달을 따고 우는 것이 한국의 특유한 현상이 아닌 문화보편적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이유는 사회비교의 방향에서 찾을 수 있는데요. 사회비교란 자신을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 것입니다. 이 사회비교의 방향에 따라 경험되는 감정이 달라지는데, 자기보다 잘난(한) 사람과 비교하면(상향비교) 부정적 정서를, 자기보다 못난(한) 사람과 비교하면(하향비교) 긍정적 정서를 경험하게 됩니다.
다시 말해, 은메달을 딴 선수들은 목표했던 금메달을 따지 못했기 때문에(상향비교) 아쉬움과 실망감 등의 부정적 정서를 경험하였고, 동메달을 받은 선수들은 자칫했으면 메달을 따지 못할 수도 있었기 때문에(하향비교) 오히려 만족감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이죠. 국민들의 기대에 충족하지 못해 죄송해서 우는 것이 아니란 말씀입니다.
그러면 선수들은 왜 '죄송하다'는 말을 하는 걸까요?
한국 체육은 소위 엘리트 체육으로 발전했습니다. 국가가 주도하여 체육인들을 관리하고 체육인들은 운동에만 전념하는 것이죠. 현대사회에서 스포츠는 여가 및 레크리에이션 이상의 의미를 갖습니다. 특히 국가대항 스포츠(올림픽)는 국위 선양, 국민 통합은 물론 스포츠 성적을 통한 체제의 우월성을 보여주는 효과가 있습니다.
애초에 근대 올림픽이 다시 시작된 시점 자체가 산업혁명으로 근대화를 이룬 서양 제국주의 열강들이 자신들의 우월성을 세계 만방에 드러내던 19세기 말(1896년)이었고, 특히 냉전시대에는 미국과 소련, 그리고 동독이 스포츠로 체제의 우월성을 과시하려고 스포츠에 엄청난 힘을 쏟았었지요. 이 과정에서 많은 선수들이 과도한 훈련과 약물중독 등으로 불행한 운명을 맞았습니다.
한국도 박정희 정권 시절(1966년), 태릉 선수촌을 설립하여 본격적인 엘리트 체육의 길을 걷습니다. 일제시대와 한국전쟁, 개발시대를 겪으면서 사회체육의 저변이 확립되기 어려웠던 한국이 국제대회에서 우수한 성적을 얻는 길은 엘리트 체육밖에 없었겠지요.
그 결과로 한국은 84년 LA올림픽 이후, 86아시안 게임, 88올림픽을 거치면서 세계 10위권의 스포츠 강국으로 우뚝 섰습니다. 여러가지 부작용도 있었지만 엘리트 체육으로 국위를 선양하고 국민 통합을 이뤄낸 측면도 분명 간과할 수는 없습니다. 지금도 우리는 브라질 리우에서 뛰고 있는 우리 선수들의 일거수 일투족에 환호와 열광을 보내고 있지 않습니까. 그 환호와 열광이 단순히 메달만을 향한 것일까요?
그렇습니다. 사회가 성숙함에 따라 엘리트 체육에서 사회체육으로 변환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지만, 한국 체육의 저변은 엘리트 체육이고 그 성과는 올림픽과 같은 국제 체육대회를 통해 나타납니다. 국민들은 고도로 훈련된 선수들의 기량(과 성적)으로 일상의 스트레스를 풀고, 선수들은 메달 획득으로 연금 등의 혜택을 받습니다.
따라서, 좋은 성적을 내지 못한 선수들이 '죄송하다'는 말을 하는 이유는 첫째, 그들이 국민의 세금으로 육성된 체육인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럼 선수들이 카메라에 대고 "국민여러분은 실망하시겠지만 내가 최선을 다했으니 만족합니다"라고 말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죄송하다는 수사는 국민 세금으로 훈련 및 지원을 받은 선수들의 최소한의 예의일 겁니다. 그리고 세금 꼬박꼬박 내고 계시는 한, '해준 게 없다'는 말도 옳지 않습니다. 내가 해줬으니 너는 금메달로 보답하라는 것도 문제가 있지만 내가 낸 세금이 어디로 가는지 정도는 알아야 납세자의 바른 인식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선수들 경기도 보러 가셔야 하니 마무리하겠습니다.
성적이 좋지 못한 선수들이 웁니다.
4년을 누구보다 노력한 선수들입니다. 찰나의 실수로 메달 색이 바뀌거나 입상의 기회를 잃어버렸을 때, 가장 아쉽고 눈물나는 사람이 누구겠습니까? 우리가 성급히 울지말라고 하는 것 또한 그들의 땀과 노력을 무시하는 일일지 모릅니다.
선수들이 아쉬움의 눈물을 흘릴 시간을 주십시오.
그 뜨거운 눈물이 실패를 떨치고 다시 앞으로 나아가는 밑바탕이 될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