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를 구분하는 기준에서 개인의 문화성향으로
인류학과는 달리 심리학은 문화를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심리학의 정체성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데요. 요약하자면 심리학이 '과학'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과학은 측정 가능한 대상을 검증 가능한 방식으로 연구하는 것을 기본으로 하는데, 만약 인간의 심리가 문화에 따라 다르다면 측정과 검증 자체가 의미가 없어지지 않겠습니까? 이런 이유로 문화는 오랫동안 심리학의 관심사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심리학에서 문화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하면서 최초로 등장한 문화적 개념이 바로 '개인주의 vs 집단주의'라는 문화구분입니다. '문화성향'이라고도 하지요. 오늘은 이 '개인주의 vs 집단주의'가 어디서 왔는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개인주의 vs 집단주의라는 용어를 처음 쓴 사람은 Hofstede라는 양반입니다. 그는 1980년대에 전세계 IBM 사원들을 대상으로 그들의 문화적 속성을 구분하는 기준을 찾는 연구를 진행했습니다. 그 결과 1)권력거리, 2)개인주의 vs 집단주의, 3)남성성 vs 여성성, 4)불확실성 회피, 5)유교적 노동관 등의 기준을 제시하는데, 개인주의 vs 집단주의는 그 중의 하나입니다.
현대 심리학에서 개인주의(individualism)와 집단주의(collectivism)는 '개인 행동의 준거(reference)가 개인에게 있느냐 아니면 개인이 속한 집단에 있느냐'에 의해 구분됩니다. 자신이 어떤 행동을 하는 이유가 자기 자신에게 있으면 개인주의이고, 자신이 하기 싫은 일도 자신이 속한 집단을 위한 일이라면 하게 되는 것이 집단주의입니다.
그런데 Hofstede의 개인주의 vs 집단주의는 직장이라는 맥락에 한정된 것이었습니다. 그가 사용한 검사 문항들 중 개인주의를 의미하는 것은 (1)개인생활 내지 가족생활을 위한 충분한 시간을 가질 수 있는 직장일 것, (2)마음대로 일하는 방식을 택할 수 있는 자유가 많을 것, (3)하는 일이 도전적일 것, 즉 개인적 성취감을 맛볼 수 있는 것일 것..이고,
집단주의를 의미하는 것은 (4)기술 향상이나 새 기술을 배울 수 있는 연수의 기회가 있을 것, (5)물리적 작업조건들이 좋을 것(통풍과 조명이 잘 되고 작업공간이 충분할 것 등), (6)직장에서 자신의 기술과 능력을 충분히 활용할 수 있을 것 등입니다. 우리가 보통 쓰는 개인주의 vs 집단주의의 개념과는 조금 거리가 있다 하겠습니다.
현재 심리학에서 사용되는 개인주의 vs 집단주의의 의미는 Triandis라는 심리학자가 구성한 것입니다. 그리스 출신인 Triandis는 미국에 유학하면서 미국의 문화와 그리스 문화의 차이에 엄청난 흥미를 느꼈습니다. 매사에 가족이 함께 하고 떠들썩한 그리스 문화와는 달리 미국의 문화는 철저히 개인적이고 또 개별적이었던 것입니다.
Triandis는 개인주의 vs 집단주의 개념을 문화에 따른 상이한 행동양식을 설명하기 위한 개념으로 발전시킵니다. 모든 개인에게는 개인주의 vs 집단주의의 문화적 성향이 있고 특정 성향을 가진 개인의 많고 적음에 따라 개인주의 문화와 집단주의 문화로 구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거시적으로 문화를 구분하는데 쓰이던 개인주의와 집단주의가 개인의 문화적 성향을 나타내는 지표로 쓰이기 시작하면서, 문화라는 인류학적 개념이 심리학적 개념으로 들어오게 된 것이죠. 이후, 개인주의 vs 집단주의는 수많은 연구에서 사용되면서 인간의 행동에 미치는 문화의 중요성을 설파하는 중요한 개념으로 자리매김합니다.
심리학에서 문화의 영향에 눈을 돌리게 된 것은 1980년대 이후의 일입니다. 2차 세계대전 후, 본격적으로 각국의 문화가 교류하면서 사람들이 실제로 경험한 문화차이에 대한 생각들이 누적된 이후에야 비로소 문화가 심리적 '변인'으로 연구에 반영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다음은, 심리학에서 쓰이고 있는 개인주의와 집단주의의 개념을 조금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비교문화심리학에서 개인주의 vs 집단주의는 엄청 자주, 중요하게 나오는 개념이니만큼 한번 정리해 두시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개인주의 vs 집단주의 문화에서 사람들의 행동은 개인이 맺는 사회적 관계의 종류에 따라 구분됩니다.
계약 vs 천륜
개인주의 문화에서는 사람들은 집단으로부터 더 분리되어 있으며 자율적으로 행동합니다. 사람들의 사회적 행동은 개인적 즐거움을 최대화하려는 것이며, 사람과의 관계는 계약에 의거해 이루어집니다. 만약 관계성을 유지하는 비용이 거기서 얻는 즐거움 이상으로 든다면 그 관계를 끊는 것이 당연시됩니다.
반면, 집단주의 문화에서는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집단의 일부라고 생각하고, 많은 상황에서 개인적 목표보다 집단의 목표를 우선합니다. 사람들의 사회적 행동은 규범, 의무, 책무의 결과로 나타나며 관계를 유지하는 데 터무니없는 비용이 들지 않는 한 사람들은 관계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결혼의 예를 들면, 개인주의 문화 사람들은 결혼도 일종의 계약으로 받아들입니다. 우리나라 결혼식에서도 종종 등장하는 혼인서약서..가 이 개념입니다. 결혼은 두 사람의 이해관계로 성립하는 것이니만큼 그 이해관계가 깨지면 이혼하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와 같은 집단주의 문화에서 결혼은 '인륜지대사'요, 부부는 '하늘이 맺어준 인연'입니다. 부부로서의 의무와 책임이 강조되고, 더이상 관계를 유지하기 어려운 경우에도 '정 때문에', '자식들 때문에' 살아야 한다는 입장이 많이 보입니다.
이익 vs 의무
개인주의와 집단주의의 차이가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사회적 행동의 규정에서입니다. 개인주의 문화에서는 집단과 개인 간에 갈등이 생길 경우, 집단의 목표와는 관계없이 개인이 자신의 목표를 성취하려고 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애초에 집단과 '계약'에 의해 관계를 맺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집단주의 문화에서 개인의 목표는 집단의 목표와 별개가 아닙니다. 집단주의 문화에서 개인은 집단의 의지에 반하는 일 없이, 집단이 기대하고 요구하는 것을 실행해야 합니다. 자신의 의무를 다하고, 사람들이 자신에게 기대하고 있는 일을 하는 것이 당연시 되는 것입니다.
집단주의 문화에서 집단은 계약으로 맺어진 일시적 관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개인주의 문화에서도 사람들은 의무를 실행하지만, 그것이 나에게 이익이 된다고 생각했을 때에만 그렇게 하는 경향이 큽니다. 하지만 집단주의 문화에서는 단기적인 이익보다는 관계의 유지가 더 큰 동기로 작용합니다.
때문에 집단주의 문화에서 사람들이 속하는 내집단의 수는 적고, 크기는 크며, 내집단 성원을 대할 때의 행동과 잘 모르는 사람을 대할 때의 행동이 꽤 달라집니다. 개인의 독특성을 찾고 일관적인 개성을 유지하기보다는 집단 내의 조화를 중시하고 그때그때 자신이 처한 사회적 맥락에 적합한 행동을 해야 하기 때문이지요.
반면에 개인주의 문화 사람들이 속하는 내집단의 수는 많고, 크기는 작으며, 내집단 성원을 대할 때의 행동과 잘 모르는 사람을 대할 때의 행동은 그렇게 다르지 않습니다. 관계 자체가 개인적 필요에 따라 계약적으로 맺어지기 때문입니다. 사회적 행동의 기본이 되는 자기 자신의 독특성을 찾고 그것을 일관적으로 유지하는 것이 중요해 집니다.
이번 글은 개인주의와 집단주의에 대한 기본적 이해를 돕기 위한 글이었습니다. 다음에는 개인주의 vs 집단주의에서 비롯된 심리학의 다른 개념들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심리학에서 문화관련 연구들을 찾아보실 때 도움이 되셨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