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사회에서 좀비의 상징성과 의미
오늘은 납량특집 2탄 좀비 특집입니다. 좀비는 특유의 험악한 비주얼 때문에 싫어하시는 분들이 많은데요. 이 글에서 끔찍한 사진은 최대한 배제하였으니 안심하시고 스크롤을 내리셔도 되겠습니다^^.
좀비(Zombie)란 되살아난 시체를 일컫는 말로 콩고말 은잠비(Nzambi)에서 유래됐다고 합니다. 서인도제도 아이티의 부두교의 사제 보커(bokor)가 사람에게서 영혼을 뽑아내면 그 사람은 지성과 의지를 잃은 좀비가 되어 보커가 시키는 대로 일을 하게 된다고 하죠.
대중문화에서 설정된 좀비는 이와는 약간 다릅니다. 영화나 드라마에 등장하는 좀비들은 여러 가지 이유(의학실험, 유전자 변이, 바이러스 등)로 죽었던 사람이 되살아나 산 사람들을 위협하는 역할을 맡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좀비 캐릭터가 최초로 등장한 영화는 조지 A. 로메로 감독의 영화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1968)'인데요.
핏기없는 (그리고 썩어가는) 피부, 부자연스러운 관절 움직임, 산 사람을 공격해서 물어뜯는 등의 설정이 이 영화에서 나왔고 이후 좀비는 무수히 많은 영화와 게임 등에서 사랑받는 캐릭터가 되었습니다. 고전으로 꼽히는 '새벽의 저주'를 비롯해 '레지던트 이블', '28일 후', '월드 워 Z', '워킹데드', '웜 바디스' 등 유명한 작품들도 많습니다.
문화는 동시대 사람들의 욕망을 투사한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좀비가 현대인들에게 이리도 사랑받는 이유가 분명히 있을 겁니다. '요즘 사람들이 자극적인 것을 좋아해서 좀비물이 많이 만들어진다' 정도로는 충분한 이해라고 할 수 없겠지요.
과연 사람들은 좀비물의 어떤 점에 공감하는 것일까요?
좀비의 가장 큰 특징은 자의식이 없다는 것입니다. 좀비는 내가 누구며 무슨 생각을 하고 누구와 어떤 관계에서 어떤 역할을 하던 사람이라는 의식을 하지 못합니다. 대신 살아야겠다는 생존본능만이 남아서 아무나 닥치는 대로 뜯어먹는 것이죠.
살겠다는 생존본능만 남아있고 행동할 의지도 가치를 판단할 마음도 없는 존재, 좀비가 상징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좀비가 대중문화에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한 시점은 1960년대 후반 이후입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세계가 빠른 속도로 변화하던 시기였습니다.
전쟁의 상처가 회복되어 가고 전쟁 중에 발달한 기술로 사람들의 삶은 풍요로워지고 있었습니다.자가용, 컬러 TV, 냉장고, 세탁기, 라디오 등이 삶의 표준이 된 것이 이 시기였고, 전체주의의 망령이 지나간 뒤로 사람들의 삶은 개인적 욕구의 충족에 초점을 두고 흘러가게 됩니다.
이 시기에 빼놓을 수 없는 것이 히피 문화입니다. 히피는 물질문명을 거부하고 반전, 평화, 자연주의 등을 추구했던 사람들로, 포레스트 검프의 여자친구 제니가 그랬듯이 시간이 지나고 얌전히 집으로 돌아와야만 했지만 히피의 등장은 이 시대의 물질주의 및 과학문명 만능주의에 대한 비판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같은 시기에 등장한 좀비 역시 물질 중심의 현대 문명에 대한 비판이라는 점에서 해석할 수 있을 겁니다. 물질적으로 표준화되는 삶. 더 좋은 차를 사고, 더 좋은 집에 살고, 더 좋은 상품을 사는 것이 삶의 이유가 돼 버린 사람들. 더이상 공동체와 이웃에 대한 문제를 생각하지 않게 된 사람들과 사회에 대한 무의식적인 불안과 공포가 좀비로 형상화된 것이 아닐까요?
좀비의 두번째 특징은 죽은 사람이 살아난다는 점입니다. 과학적으로 말이 안되는 일입니다. 그러나 과학이 엄청난 속도로 발전하던 60년대에 과학의 힘으로 안 될 것은 없어 보였습니다. 세상에 사람이 달 위를 걸어다니리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습니까(1969년 아폴로 11호 달 착륙).
60년대 생명공학 분야의 성취는 놀라웠습니다. DNA가 실험실에서 합성되고(1958), 살충제 및 새로운 곡물 품종의 개발로 녹색혁명이 일어나 식량위기가 해결됩니다(1964). 1965년에는 사람과 생쥐의 세포가 융합되었으며 1971년에는 최초로 유전자가 합성됩니다.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난다는 좀비의 설정은 과거부터 이어진 시체 공포에 신(神)의 영역이었던 생명을 과학의 힘으로 조작할 수 있다는 데서 오는 불안이 덧붙여진 것으로 보입니다. 인간이 이렇게까지 할 수 있다니.. 이렇게까지 해도 될까? 이러다 무슨 일 나는 거 아니야? 인류의 과학수준이 이전 시대에 비해 급격히 발전하던 19세기(1818년)에 나온 '프랑켄슈타인'의 불안과도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겠습니다.
제가 중학교 2학년때 처음으로 봤던 좀비영화 '좀비오'나 밀라 요보비치의 '레지던트 이블' 시리즈의 좀비들이 이같은 케이스입니다. 이 영화들에서 좀비는 미친 과학자 또는 양심없는 기업이 과학의 힘으로 창조해낸 괴물이죠. 그리고 그 끝은 매우 좋지 않습니다.
미 국방부는 최근 좀비 창궐로 인한 혼란에 대응하는 매뉴얼을 만들어 교육중이라는데요. CONOP 8888로 알려진 이 매뉴얼은 인명보호, 좀비퇴치, 질서회복의 3단계로 이루어져 있다고 합니다. 좀비가 단순히 영화적 상상력으로 만들어진 괴물이 아니라 현대의 과학기술로 등장할 수 있는 실질적 위협이라고 보고 있는 셈이죠.
최근 좀비물에 많이 반영되고 있는 좀비의 세 번째 특징은 누구나 좀비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좀비는 대개 원인을 알 수 없는 바이러스에 의해 발생하는데 좀비에게 물리는 것으로도 전염됩니다. 그런데 일단 좀비가 되고나면 자의식을 잃고 생존본능만 나타나기 때문에 방금 전까지 나의 가족, 친구, 이웃이었던 사람이 좀비가 되어 내 생명을 위협하는 상황이 벌어집니다.
가장 편안하고 익숙한 공간에서의, 가장 소중하고 사랑하는 이들로부터의 공포. 이것이 좀비의 진정한 공포입니다. 이러한 면은 특히 미드 '워킹데드'에 잘 묘사돼 있습니다. 좀비가 돼버린 아들과 딸, 동생, 친구와 이웃이 내 살점을 노리고 달려들때 그들의 머리에 칼을 꽂아야 한다는 것은 어떤 기분일까요..
워킹데드가 방영을 시작한 것은 2010년입니다. 2007년 발생한 서브프라임 모기지(주택담보대출) 사태로 미국이 한창 휘청거리던 때였지요. 제가 하필.. 2009년과 10년에 미국에 있었는데 분위기 장난 아니었습니다. 회사들이 망해나가고 멀쩡하던 사람들이 (회사에서 짤려 집 대출금을 못 갚아) 하루아침에 집에서 쫓겨나는 일이 비일비재했지요.
익숙했던 공간은 낯선 곳이 되어 버렸고 어제까지 살가웠던 친구와 이웃들은 나의 불행에 어떠한 도움도 주지 않습니다. 그들 또한 언제 거리로 쫓겨나 하루 먹을 것을 걱정해야 할 지 모르는 신세니까요. 어딘가 익숙한 풍경 아닙니까? 워킹데드가 묘사하는 좀비로 뒤덮인 세상이 바로 내가 살고 있는 현실인 것입니다.
풍요롭고 안전했던 사회에서 분리되어 당장의 배고픔을 걱정해야 하는 좀비는 경제위기(혹은 경제의 구조적 문제)로 직장에서 내몰려 가족과 이웃을 잃고(혹은 포기하고) 눈앞의 생존에 매달려야 하는 현대인들을 상징합니다.
경제학자 소스타인 베블런이 지적한 것처럼, 생존에 급급하게 되면 다른 부분에 눈을 돌릴 여유가 사라집니다. 당장 내가 굶어죽게 생겼는데 이웃이 뭐고 연대가 뭐란 말입니까. 자신이 힘들어진 구조적 이유를 파악해 그것을 고쳐나가기보다는 단지 내가 원하는 것을 가진 대상에게 적대감을 표출할 뿐입니다.(뭔가 떠오릅니다..)
법과 도덕, 윤리, 신앙 등 이전까지 작동했던 사회의 유지 원리들은 모두 힘을 잃고 오로지 약육강식의 법칙만이 지배하는 좀비들의 세상. 이곳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발버둥치는 생존자들에게는 날마다 대답하기 어려운 물음들이 던져집니다.
내가 살아남기 위해서 누구를 먼저 희생시킬 것인가?
다른 생존자들을 만났을 때 그들과 협력해야 할까, 다 죽이고 그들의 것을 차지해야 할까?
살아남기 위해서 하는 모든 행위는 정당화될 수 있는가?
어떻습니까.
좀비들의 세상은 스크린 속에만 존재하는 것일까요?
한국영화 '부산행'의 개봉에는 이유가 있어 보이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