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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선생 Dec 31. 2015

위안부협상에서 나타난 성폭력피해여성에 대한 우리의 태도

한국문화에서 사회적 약자에 대한 일반적 인식

가슴아픈 일이 벌어졌습니다. 말도 안되는 일입니다. 피해자에게는 일언반구도 없이 '국가 간 합의'가 이루어졌습니다. 10억엔이라는 푼돈을 받는 조건으로 소녀상을 철거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앞으로는 일본에 어떠한 책임도 물을 수 없답니다. 다시 거론하면 한국은 국제사회에서 매장당할 것이라고 가해자의 후손이 말합니다. 정부와 여당은 잘된 협상이라 자평하고 대통령은 '대승적 견지에서 이해해 달라'고 합니다. 


누구를 위한, 무엇을 위한 협상입니까. 사과를 받는 이가 이토록 비참해져야 하는 사과가 무슨 사과입니까. 사과하는 자가 '다시 사과하라 그러면 파묻어버리겠다'는 것이 무슨 사과입니까. 왜 정부는, 대통령은 이렇게 비굴한 협상에 응해버린 것일까요.


글을 쓰면서 많이 망설였습니다. 이 무겁고 중대한 일의 논점을 흐리게 될까 두려웠습니다. 


비난받을 이들은 명확합니다. 협상은 파기되어야 하고 협상을 주도한 이들은 책임을 져야 할 것입니다. 사과는 피해자들이 원하는 방식으로 피해자들이 원할 때까지 이루어져야 합니다. 이것이 이 사건에 대한 제 생각입니다. 




하지만 갑자기 어떤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러한 협상을 추진한 이들은 단지 '친일파'일까요?

그래서 친일파를 척결하면 이런 일들은 다시 생기지 않는다고 할 수 있을까요?


국가가 타국 군인들에게 강간당한 피해자들을 외면하고 타국의 손을 들어주었습니다.

양국의 발전된 관계를 위해서랍니다.


이 장면, 어디서 많이 본 거 같지 않으십니까? 


사법부가 의대생에게 폭행당한 피해자를 외면하고 의대생의 죄는 감면해주었습니다.

의대생의 꿈이 좌절되어서는 안되기 때문이랍니다.


어머니가 친아버지에게 강간당한 딸을 외면하고 남편의 편을 들어주었습니다.

너만 조용히 있으면 아무 일 없을 거랍니다.


동네 오빠에게 성폭행당한 딸에게 아버지는 동네 창피하니까 소문내지 말라고 합니다.


청나라에 끌려갔다 온 여인들을 '화냥년'이라 부른 것은 바로 그 여인들의 남편들과, 한 동네 살던 이웃들이었습니다. 


대상은 각각 다르지만 위의 사건들은 구조적으로 동일합니다. 가장 피해자의 편이 되어야 할 이들이 피해자를 외면하고 가해자의 손을 들어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위에서 이러한 종류의 사건들을 질리도록 보아왔습니다. 


물론 분노하는 사람들도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가장 힘이 되어줄 사람들이 손을 놓고 있으니 이러한 현상들은 지속될 수밖에 없습니다. 보다못한 이웃이 경찰에 신고했는데 부모가 가해자에게 푼돈을 받고 합의를 해 버리는 것 같은 일들입니다. 


이번 사태에 대해 SNS으로 퍼지는 넷심은 매우 부정적입니다. 그러나 협상 타결? 후 실시된 조사에서는 잘못했다는 응답이 50.7%, 잘했다는 응답이 43.2%가 나왔습니다(조사-리얼미터).  심지어 조금 전 뉴스에서는 잘했다는 응답이 53%(잘못했다 40%)로 더 많았답니다(조사-SBS).



이것은 조사가 조작된 것일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피해자와 가장 가까운 이들이 피해자들을 외면하는 일들을 너무나 많이 보아왔기 때문입니다. 


성폭력 피해자들에 대한 이런 식의 '문제해결방법'은 아마도 한국의 문화적 행위양식인 듯합니다. 성폭력 피해자들에게 가만히 있으라고 하는 것은 가문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 딸들을 살해하는 명예살인과 본질적으로 같은 동기에서 나오는 행위들입니다. 딸들을 죽이는 것이 어떻게 가문의 명예를 지키는 일이 될까요? 


일부 이슬람 문화권과 인도에서 나타나는 명예살인의 기본논리를 결혼제도와 관련한 인류학적 이론들로 추정해 보았습니다. 첫째, 집단들은 생존가능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다른 집단들과 동맹을 맺어야 합니다. 둘째, 집단들은 동맹의 댓가로 여성을 교환했습니다(쉬운 예로, 정략결혼). 


이 두 가지 사실에서 아래와 같은 논리가 나옵니다.


1. 여자가 강간당한 것(남편 아닌 남자과 성관계를 한 것)은 흠이다(다른 집단에게 시집보낼 수 없다).

2. 그것은 여자의 흠이기도 하고 그 여자가 속한 집단(가문)의 흠이기도 하다(관리를 제대로 못했다).

3. 흠이 있는 여자는 교환가치가 없으니(다른 집단에 시집보낼 수 없으니) 제거한다.

4. 그 여자가 속한 집단이 그 일(제거)을 직접 하게 되면.. 그 집단은 다른 집단으로부터 '저 집단은 (교환가치를 지닌 상품으로서의) 여자관리를 잘 한다'는 평판을 얻게 되며, 

5. 그러한 평판(저 집단의 여자들은 믿을 만하다)은 결국 그 집단의 생존가능성을 높이게 된다. 


그러니까 명예살인과 위안부 협상 타결, 그리고 성폭력 피해자들에 대한 한국인들의 태도는 집단(집안, 가문, 국가)의 생존가능성을 높이기 위해서 오랜 시간 동안 만들어져 온 문화적 문제해결 방식인 것입니다. 


이걸 조금 거칠게 표현하자면, '너만 가만히 있어주면(죽으면) 우리가 산다'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한국에서 이러한 말은 단지 성폭력 피해여성들에게만 향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 생존을 위협한다고 지각되는 거의 모든 것에게 드러나는 공격적 생존법칙입니다.


조직의 문제를 밖으로 알리는 '내부고발자'에 대한 한국의 문화적 해결방식을 떠올려 보십시오. 공익을 위한 제보였음에도 결국 매장당하고 나쁜 평판을 받는 것은 내부고발자 자신입니다. 그리고 그를 가장 욕하는 것은 그와 함께 일했던 동료들입니다. 학생운동, 시민단체, 노동운동 등에 대한 많은 이들의 시각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왜 문제를 만드느냐, 너만 입다물고 있으면 된다"

"개인적인 피해는 안타깝지만 대승적인 차원에서 덮고 지나가자"

"경제도 어려운데 언제까지 그런.. 문제로 발목을 잡을 것이냐"


우리는 그렇게 입을 다물고 대승적 차원으로 문제들을 덮어가며 세월을 지내왔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의 문화가 되었습니다. 이번에 불거진 위안부 협상은 성폭력 피해자를 비롯한 사회적 약자들에게 우리가 취해왔던 문화적 태도가 드러난 것 뿐일지도 모릅니다. 


한국인들이, 한국문화가 생존을 최우선으로 하는 가치를 갖게 된 것은 아마도 근현대 한국의 가슴아픈 역사에서 비롯된 일일 것입니다. 생존이라는 목표는 문화를 이루는 가장 중요한 동기입니다. '살기 위해서' 만큼 절실한 이유도 없을 것입니다. 구한말 열강의 침탈과 일제강점기, 한국전쟁과 독재정권을 거치며 한국인들처럼 살기 위해서 최선을 다한 사람들이 또 있을까요?


하지만 단지 '살아간다는 것' 이상의 가치를 찾으려 했고 추구해 왔기에 인간사회는 조금씩 나아져 왔다고 생각합니다. 생존은 여전히 중요한 가치입니다만, 더욱 중요한 것은 '함께 사는 것'입니다. 다른 이들의 희생 위에서 나만 잘 살겠다는 생각은 결국 나의 삶마저 위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위안부 할머님들의 아픔은 그분들만의 아픔이 아닙니다.

대승적 차원에서 그분들의 아픔이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은 곧, 나의 아픔도 누군가의 대승적 차원에 의해 묻혀져 버릴 수 있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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