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선생 Oct 26. 2016

군중(群衆)에 대한 오해

귀스타브 르봉과 시민사회의 사이

시위나 인터넷 여론으로 대표되는 군중의 움직임을 우리는 가끔 목격합니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는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부정적인 생각을 갖고 있는 것 같습니다. '군중은 무지하다, 군중은 위험하다, 군중은 선동되기 쉽다' 등등인데요. 


언젠가부터 이러한 생각들이 마치 상식처럼 받아들여지면서, 어디든지 사람들이 몰려 있는 것을 보면 좀 문제가 있는 것 같고, '저런 데' 휩쓸리지 않아야 쿨한 지식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는 모양입니다. 


따라서 많은 사람들이 뭐를 하고 있으면 자연스럽게 '저 무지한 군중들이 또 누군가에게 선동돼서 위험한 짓을 벌이려 하는구나'하고 생각하게 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과연 군중은 그런 존재들일까요?


군중에 대한 이러한 부정적인 생각의 뿌리는 프랑스의 귀스타브 르봉이라는 학자에게서 비롯되었습니다.

귀스타브 르봉(1841~1931)

르봉은 '군중심리학'이라는 저서로 알려진 학자인데요. 다음은 인터넷에 떠돌아다니는 르봉의 어록입니다.


"군중은 진실을 갈망한 적이 없다. 구미에 맞지 않으면 증거를 외면해 버리고 자신들을 부추겨주면 오류라도 신처럼 받드는 것이 군중이다. 그들에게 환상을 주면 누구든 지배자가 될 수 있고 누구든 이들의 환상을 깨버리려 들면 희생의 제물이 된다."


분명 르봉은 이렇게 말한 것은 맞습니다. 그는 군중의 특징으로 무의식성과 피암시성, 그리고 충동성, 변덕, 과민함을 꼽았습니다. 군중은 무계획적이고 자신도 모르는 욕구에 의해 움직이며 누군가의 어떠한 메시지에 의해 조종받기 쉽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군중에 대한 르봉의 생각은 '그래서 군중은 무지하고, 위험하다'는 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의 '군중심리학'을 딱 요기까지 이해하는 것은 대단한 오해이자 오독(誤讀)입니다. 마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읽고 프로이트는 성(性) 밖에 모르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하고 마찬가지죠.


애초에 르봉은 왜 군중에 주목했을까요?

르봉은 프랑스 대혁명(1789) 이후의 혼란기 프랑스에서 활동했던 학자입니다. 우리는 프랑스 대혁명으로 왕과 귀족 중심의 구시대의 질서(앙시엥 레짐)가 무너지고 곧 시민사회가 열렸다고 생각하지만 시민사회는 그렇게 간단하게 오지 않았습니다.


루이 16세와 마리 앙트와네트를 처형하면서 민주화를 이뤄냈던 프랑스 시민들은 불과 10년 후 왕보다 한 술 더 뜬 '황제'를 옹립하는 기행(?)을 보여줍니다. 이때 황제가 된 사람이 그 유명한 나폴레옹(1769~1821)아니겠습니까? 심지어 그의 조카(나폴레옹 3세)도 제위에 오릅니다.


1789년 대혁명으로부터 1871년 파리 코뮌까지 프랑스는 두 번의 쿠데타(1804, 1852)와 두 번의 혁명(1830, 1848), 네 번의 전쟁을 거치며 왕정복고와 혁명을 반복하는 그야말로 혼돈의 카오스였습니다. 


혼돈의 시대 한복판에서 르봉은 군중(群衆)을 이러한 흐름을 이끌어가는 중심 세력으로 보았습니다. 르봉은 군중의 비합리적이고 충동적인 면을 지적한 동시에, 사회변화의 동력으로 작용하는 군중의 힘과 가능성에 주목했습니다. 


혁명과 같은 사회변화에 군중이 개입하는 순간 이론가들이 예측하거나 계획한 방향과는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기 시작하지만 이는 결과적으로 거스르기 힘든 역사의 물결이 됩니다. 마치 거대한 강물이 이리 쏠리고 저리 쏠리고 하지만 결국 바다로 흘러가는 것처럼 말이죠.


결국 르봉이 강조하는 것은 이러한 군중을 이해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군중이 무식하고 멍청하니까 그들을 무시하자가 아니라, 그런 엄청난 잠재력을 가지고 있는 군중이 어떤 욕구를 갖고 어떤 이유에 의해 움직이게 되는지를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 군중심리학의 본질인 것입니다.


과거의 군중과 지금의 군중

군중은 비합리적이고 충동적이며 선동되기 쉽다는 식의 얄팍한 이해는 특히 현대사회를 이해하는 데 크나큰 장애가 됩니다. 우선, 르봉이 살았던 시기의 군중과 지금의 군중은 다릅니다. 가장 크게 다른 점은 바로 군중이 보유하고 있는 정보의 양(과 질) 입니다. 


일부 지식인들만이 지식을 독점했던 18, 19세기의 군중들과 인터넷과 IT기술의 발달로 거의 모든 사람들이 원하는 정보를 얻을 수 있게 된 21세기의 군중들이 같은 수준으로 무지하고 충동적이며 선동되기 쉬운 사람들일까요?


물론 인터넷에 떠도는 수많은 정보들이 모두 진실은 아니며 정보의 홍수 속에서 가치있는 정보를 취사선택할 수 있는 능력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위험성은 소위 전문가들에게도 동일하게 작용하죠. 군중들은 넘쳐나는 정보 속에서 거짓 정보에만 놀아나고 오직 전문가들만 제대로 된 정보들을 바탕으로 이성적인 판단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었을까요?

이런 분의 존재는 전문지식인이 군중보다 낫다는 증거가 될 수 있을까요?

21세기의 군중 안에는 엄청나게 다양한 사람들이 존재합니다. 학자도, 엔지니어도, 각 분야의 전문가들도 있지요. 이들은 발달된 네트워킹 기술을 가지고 다양한 이유에 따라 무리를 지으며 놀랍도록 여러가지 일들을 해 낼 수 있습니다. 


집단지성과 시민사회

이러한 현대 군중들의 성격은 집단지성이라는 말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집단지성은 1910년대 곤충학자인 윌리엄 휠러가 개미의 사회적 행동을 관찰하면서 처음 제안한 개념으로서, '우리는 나보다 강하다'는 말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집단에서 이루어지는 정보의 공유와 상호작용이 개인의 능력(물론 지적인 능력을 포함한)을 초월할 수 있다는 것인데요. 특히 피에르 레비는 집단지성의 작용에 있어서 사이버 공간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인터넷은 국경과 장소, 시간을 초월하여 정보와 의지와 행동을 묶어낼 수 있는 도구이기 때문이지요. 


인터넷은 확인되지 않은 정보로 선동꾼들이 판을 치는 위험한 공간이 아닙니다. 제가 접하고 있는 바, 인터넷은 각 분야의 전문가들에 의해서 정보의 선별과 분류가 이루어지고 있고, 학습과 교육, 참여와 운동이 일어나고 있는 현장입니다. 일부 사람들이 우려하는 지나친 선동과 선전, 도를 넘는 비방이나 폭력에 대해서도 만만찮은 비판과 자정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SNS를 인생의 낭비라고 폄하하거나 군중들의 배후를 의심하며 모든 일에 선동 운운하는 이들은 자신들을 둘러싼 환경의 변화에 애써 눈감고 있는 것일까요? 환경이 변하면 삶의 방식이 변하고, 삶의 방식이 변하면 인간의 의식이 변합니다. 그것이 문화가 변화하는 방식이지요. 지금은 르봉이 살았던 시대가 아닙니다.


현대사회에서 군중은 시민입니다. 시민들은 국가의 통제 대상이 아닌 주체로서 정치와 경제, 교육과 문화 등 사회의 모든 일에 대해 논의하고 문제를 발견하고 더 나은 해법을 찾는 이들입니다. 하버마스가 이야기한, 비판적 지성을 갖춘 시민사회의 주체들이죠. 


무지한 군중들이 선동돼서 위험한 짓을 벌이려 한다..는 식의 이해는 결국 한 가지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나랏일은 높으신 분들이 알아서 할테니 멍청한 백성들은 주어진 일에나 충실하라는 것이죠. 이런 생각은 봉건시대에도 용납될 수 없는 생각이었습니다. 2차대전 중의 군국주의 일본이나 일부 독재국가에서나 가능한 사고지요.


사회의 부조리와 문제들에 눈감고 자신의 본분(?)을 다하는 것이 더 살기 좋은 사회를 만든다면 계속 그렇게 살아도 괜찮겠지요. 하지만 내 일이 아니라고 내 주위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눈감았던 결과는 무엇입니까? 우리가 모든 권력을 위임했던 이들이 누구를 위해 그 권력을 사용해 왔는지 지금 우리는 처절하게 그 민낯을 목도하고 있지 않습니까?


미래는 군중의 시대입니다. 군중을 어떤 존재로 보느냐에 따라 우리의 미래는 달라질 것입니다.


심리학자도 모르는 심리학 이야기3

르봉은 후대 학자들에 의해 사회심리학과 정치심리학의 아버지로 일컬어지고 있습니다. 군중의 집단무의식에 대한 그의 생각은 프로이트와 융의 정신분석학으로 이어졌으며, 미국 사회심리학의 아버지 고든 올포트에게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당연히 문화심리학의 관심사 및 연구주제와도 관계가 깊습니다. 르봉의 '군중심리학'을 이어받아 '군중의 시대'를 쓴 프랑스 사회심리학자 모스코비치는 사회적 표상이론(Social representation theory)으로 문화심리학 연구의 한 방향을 제시한 분이죠. 


그럼에도 심리학 개론에서 르봉의 이름조차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은 매우 미스테리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