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권과 드라마의 상관관계
대장금의 이영애를 앞세우며 야심차게 제작된 드라마 사임당이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습니다. 전국민이 다 아는 컨텐츠, 2년의 제작기간과 200억이 넘는 제작비, 그리고 사전제작 방식으로 높아진 퀄리티 등을 고려하면 어느 정도의 흥행이 보장된 게 아닌가 싶은데 말이죠.
드라마나 영화가 흥행하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사람들의 관심과 공감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인데요. 시청률이란 우연이든 우연이 아니든 시청자들의 욕구를 정확히 읽었을 때에만 달성될 수 있는 목표입니다. 상품성 있는 재료와 인지도 있는 배우, 천문학적 제작비로도 시청자들의 공감은 쉽게 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드라마가 제작되는 이유가 흥행만은 아닙니다. 인류의 역사에서 예술은 때때로 선전을 위한 도구로 사용되어 왔습니다. 세종대왕께서 음악을 장려하신 까닭도 백성들을 예(禮)로 다스리기 위함이었지요. 조선을 창건한 시조들의 업적을 노래한 용비어천가는 정치적 의도를 담은 노골적인 선전요 그 자체입니다.
왕권의 정당성을 전파해야 했던 왕조시대에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이러한 일이 흔하게 있었습니다. 하지만 현대사회는 어떨까요? 조선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갈 것 없이 가까운 예를 찾아보겠습니다.
연식이 좀 되시는 독자께서는 1990년 KBS2 TV에서 방영된 드라마 '야망의 세월'을 기억하실 겁니다. 7,80년대 개발한국의 전설이었던 이명박 전 현대건설 사장을 모티브로 한 드라마죠. 탤런트 유인촌씨가 이명박 역할을 맡았었습니다.
박정희 정권과 개발독재를 미화한다는 비판도 있었지만 많은 시청자들은 무일푼에서 일어나 고난과 역경을 이겨내고 한국의 발전을 일궈낸 한 영웅의 이야기에 공감했습니다. 드라마는 대박을 쳤고 작중인물의 모델인 이명박의 인기도 같이 올랐죠.
이명박이 정치를 시작하고 서울시장(2002년)과 대통령(2008)까지 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드라마 '야망의 세월'의 영향이 적지 않았을 겁니다. 그 인연이 고마워서였을까요. 유인촌씨는 이명박 정부에서 문화체육부 장관을 지냅니다.
그런데 이명박이 서울시장을 지내던 2004년, 또 하나의 드라마가 제작됩니다. MBC에서 방영된 '영웅시대'. 산업화의 영웅들을 그린, 10여년 전에 제작된 '야망의 세월'의 확장판이라고 할 수 있는 드라마입니다. 여기서는 탤런트 유동근씨가 이명박 역할을 맡았습니다.
전작 야망의 세월보다 시청률은 낮았지만 '영웅시대'는 서울시장이던 이명박에게 '영웅'이라는 이미지를 부여하며 그의 업적을 재조명하는 효과를 낳았고, 드라마가 방영된 3년 후, 청계천 효과와 함께 이명박은 대한민국 17대 대통령이 됩니다.
물론 드라마 두 편이 한 사람을 대통령으로 만들지는 못했을 겁니다. 하지만 드라마에서 그려낸 '영웅의 신화'는 당대 한국인들의 욕망을 훌륭하게 자극했습니다. 빈주먹으로 시작해서 개발시대에 젊음을 보내고 어느 정도 부를 일군 한국인들은 더 큰 성공을 원했고, 그것을 실제로 이룬 한 사람의 정치인에게 자신들의 욕망을 투사했던 것입니다.
한편, 2000년대 초중반, 유난히 많이 제작되었던 대형 사극들의 공통점은 그 출신지 내지는 활동지역이 '북한'이라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굵직한 것들로만 태조왕건(2000), 대조영(2006), 주몽(2006), 연개소문(2007) 등등이 있는데요. 이들이 창업하거나 활동한 나라는 고려, 발해, 고구려입니다.
이러한 경향은 대한민국 15,16대 대통령인 김대중, 노무현 정부가 햇볕정책으로 요약되는 활발한 대북한 외교를 펼친 것과 관계가 있습니다. 이들 드라마들의 제작은 분단 이후로 적(敵)으로만 인식해오던 북한을, 우리와 역사와 문화를 공유하는 한 민족으로 인식하고 통일의 당위성을 드러내려는 시도로 보입니다.
실제로 이들 드라마는 엄청난 인기를 끌며 화제의 중심에 오르곤 했습니다. 고대사에 대한 관심과 함께 통일에 대한 기대도 한껏 높아졌었지요. 세계 유일의 분단국 국민으로서 지금은 잃어버린.. 북쪽 땅에서 펼쳐지는 장대한 스토리에 이끌리지 않을 사람들은 별로 없었을 겁니다.
그렇다면 18대 박근혜 정권은 어떨까요? 이명박 대통령 재임기간 동안 박근혜는 한나라당(새누리당)의 당대표로서 유력한 차기 대선주자였습니다. 그리고 그 즈음해서 '여성 리더'들에 관한 재평가가 이루어지면서 몇몇 드라마들이 제작되는데요.
그 첫 타자가 드라마 '천추태후(2009)'입니다. 천추태후는 고려 5대 왕 경종의 왕비로 7대 왕 목종의 어머니입니다. <고려사> 등의 정사에서 천추태후는 외가쪽 친척인 김치양과 사통하여 왕실과 나라를 어지럽힌 여인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만, 이 드라마에서는 송과 거란 사이에서 실리외교를 펼친 여걸로 그려집니다.
두번째는 MBC드라마 '선덕여왕(2009)'입니다. 한국사 최초의 여왕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화제를 모았었지요. 김춘추와 김유신을 등용하며 삼국통일의 기틀을 다진 업적이 있습니다만 선덕여왕의 리더십을 강조하기 위한 여러 설정들이 역사왜곡이라는 논란에 불을 지폈습니다.
또 하나 의미있는 사건이 같은 해(2009년)에 있었는데요. 바로 5만원권의 출시입니다. 5만원권에 누가 들어가야 할 것이냐가 뜨거운 이슈가 되었었지만 결국 신사임당으로 결정되었죠. 당시 후보로 거론되었던 위인들에과 함께 신사임당의 자격에 대한 논란이 적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이런 식의 몇 가지 밑작업(?)의 결과였는지 '준비된 여성 대통령'이라는 구호를 앞세운 박근혜는 무난히 새누리당 대선후보가 되고 국정원 댓글사태 등 논란 투성이의 대선을 거쳐 대한민국의 18대 대통령으로 당선됩니다.
우여곡절 끝에 대통령에 취임한 2013년에는 문제의 '기황후'가 방영됩니다. 천추태후와 마찬가지로 기록된 역사적 사실과는 많이 다른 드라마의 전개 때문에 논란을 낳았던 작품입니다. 기황후가 공녀로 끌려가 대원제국의 1황후가 된 입지전적 인물임에는 틀림없습니다만, 그 오빠 기철의 횡포라든가 공민왕을 폐위시키려던 일 등을 보면 딱히 선의를 갖고 큰 뜻을 펼치려 했던 것 같지는 않은데 말이죠..
그리고 그 다음에 나온 것이 드라마 '사임당, 빛의 일기'입니다. 물론 예술가로서의 신사임당은 높이 평가받아야 하고 또한 조선시대 여성으로서 그의 삶이 의미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만, 현 시대의 시청자들이 그의 삶에서 어떠한 영감을 받고 공감을 느낄 수 있을지는 의문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의문들은 시청률로 나타나고 있죠.
근래들어 여성을 주인공으로 한 드라마들이 많이 제작되는 것은 과거와는 달라진 성역할과 성에 대한 인식을 반영합니다. 하지만 몇몇 작품들은 그 이상의 어떤 의도가 있어 보이기도 합니다. 역사상의 여성 리더들을 부각시켜 여성 대통령의 집권을 정당화하려는 누군가의 의도가 작용한 결과일까요? 아니면 그렇게 보이는 작품들만 골라내서 필자가 소설을 쓰고 있는 것일까요?
물론 이 글에서 언급한 모든 드라마가 정권과의 모종의 거래에 의해서 제작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사료가 부족한 역사적 인물이니만큼 사극에서 역사왜곡 논란은 피해갈 수 없는 숙명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매일 접하는 드라마나 영화의 이면에는 우리가 미처 인식하지 못한 의도들이 숨어있는지 모릅니다.
사실상 상업적으로 제작되는 수많은 문화콘텐츠에는 소비자들은 알 수 없는 수많은 메시지들이 감춰져 있습니다. 그것이 의도된 것이든 의도되지 않은 것이든 말이죠. 그러한 메시지들을 찾아내는 것 또한 쏠쏠한 재미가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