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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선생 Dec 27. 2019

일본인들은 왜 빈 집에 돌아와서도 인사를 할까?

일본인에게 집에 돌아온다는 것의 의미

일본 드라마나 애니를 보다보면 드는 의문들이 많습니다.


일본어에는 특정 상황에 거의 반드시 사용하는 표현들이 있는데요. 예를 들면, 인사말도 오전용(곤니치와), 오후용(곰방와)이 정해져 있고, 밥 먹기 전에는 “이타다키마쓰(잘 먹겠습니다)”라고 말해야 하고 외출할 때는 “이테키마스(다녀올게), 집에 돌아올 때 “타다이마(다녀왔어)”라고 말하는 것 등입니다.     


다년간 일본 드라마와 애니메이션을 보면서 신기하다고 느꼈던 점은 특정 상황의 표현들은 그 상황이 되면 언제나 어김없이 등장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중에서 제가 제일 이상하다고 생각했던 것은 주인공이 아무도 없는 빈 집에 돌아올 때도 “타다이마”라고 말한다는 점입니다.      


“타다이마”는 짝이 있습니다. “오카에리(어서 와)”라는 표현입니다. 돌아온 사람이 “타다이마”라고 말하면 집에서 맞는 사람이 “오카에리”라고 대답하는 것이죠. 그런데 맞아줄 사람이 없는데 “다녀왔어”라고 말을 한다? 아무래도 어색합니다.     


물론 우리말에도 해당 상황에 따르는 표현들이 있습니다만 한국인들은 해당 상황이어도 그런 표현들을 반드시 해야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독자님들 중에도 혼자 사시는 분들 많으실텐데 집에 와서 빈 집에다가 “나 왔어!” 하고 들어오시지는 않잖습니까?      


저도 10년 정도 혼자 살아봤지만 한번도 그랬던 적이 없는 것은 물론 그래야겠다는 생각조차 해 본 적이 없습니다. 우리말에도 “다녀왔어”라는 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죠.     


그런 면에서 한국어는 꽤 융통성 있는 언어인데요. 일본어에서 “타다이마/오카에리”라고 표현해야 하는 상황에서 한국인들은 “다녀왔어, 갔다왔어, 왔어, 나야” 등 어떻게든 내가 “왔다”고만 알리면 됩니다. 맞아주는 사람도 “어서와, 들어와” 뿐 아니라 “잘 다녀왔어? 갔다왔어? 왔어?”와 같이 의문형으로 표현하기도 하고, “고생했네, 수고했어, 밥 먹자” 등 어떻게든 내가 “맞아주고 있음”을 표현하는 식이죠.      


특정 문화에 두드러지는 습관이 있다는 사실은 이러한 행위양식이 해당 문화에서 그만큼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빈 집에 대고 하는 인사말에는 일본인들의 어떤 욕구가 숨겨져 있을까요?     

어렴풋이 이상하다는 생각만 하다가 “타다이마/오카에리”의 의미를 짐작할 수 있었던 것은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이란 영화를 보았을 때였습니다. 2006년에 나온 이 영화는 일본영화답지 않은 과감한 연출로 화제가 되었지만 제가 본 일본 영화 중에 가장 일본적이라 할 수 있는 영화였습니다.     


(*아래 내용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마츠코는 사랑을 간절히 원하는 여성입니다. 몸이 아픈 동생 때문에 한번도 아버지의 사랑을 받아보지 못했고, 우연한 사건에 휘말려 촉망받던 교사에서 나락으로 떨어지는 인물입니다. 몸을 팔다가 결국 살인까지 저지르고 감옥까지 가게 되지만 계속해서 자신을 사랑해줄 사람을 찾아 헤매는 캐릭터죠.     


거듭된 사랑의 실패에 좌절하던 마츠코는 감옥에서 친하게 지냈던 친구를 우연히 다시 만나 즐거운 시간을 보내다가 친구 집에 놀러가기로 하는데요. 친구 집에 도착한 마츠코는 “다녀왔어(타다이마)”라고 말하는 친구를 맞아주는 친구 남편의 “오카에리”라는 목소리에 안색이 굳더니 발길을 돌립니다.     

자신과 달리 친구에게는 집에서 기다려줄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다시한번 마츠코를 절망에 빠뜨렸던 것입니다. 아버지와 동생에게조차 버림받은 마츠코를 맞아줄 이는 세상 천지에 아무도 없었습니다. 결국 마츠코가 평생 찾아 헤맨 것은 돌아갈 집이고 ‘오카에리’라는 말과 함께 돌아온 자신을 맞아줄 누군가였던 것입니다.      


마츠코는 죽어서야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끝까지 사랑에 배신당하고 히키코모리로 살다가 야밤의 공원에서 불량청소년들의 폭행으로 죽게 되는데요. 불의의 죽음을 당한 마츠코의 영혼은 그토록 돌아가고 싶었던 집으로 돌아갑니다.      

그곳에는 이미 세상을 떠난 동생이 마츠코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동생은 힘든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언니에게 “오카에리”란 말을 건네고 마츠코는 웃으며 “타다이마”라고 대답합니다. 세간의 눈으로는 혐오스럽기만 했던 마츠코의 일생은 이 오카에리(어서 와)라는 말을 듣기 위해서였던 것입니다.     


한 영화의 주인공일 뿐이지만 마츠코의 바램에는 일본인들의 욕구가 배어 있습니다.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은 야마다 무네키의 소설을 원작으로, 드라마, 영화, 뮤지컬로 사랑받았으며 개봉 당시 어두운 영화는 흥행하기 어렵다는 관계자들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꽤나 흥행을 했다고 합니다. 어떤 콘텐츠가 널리 사랑받는다는 이야기는 거기에 문화 구성원들이 공감할 만한 요소가 들어 있다는 이야기겠죠.


일본인들의 삶은 집으로 돌아오기 위한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집에 돌아왔을 때의 그 안정감을 한국인들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바깥 세상은 해야만 하는 일들이 가득한 세상입니다. 일본 문화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일에 충실하지 못할 때 주어지는 부담감은 상상 이상입니다.

테니스가 이렇게 위험한 운동입니다

늘 얼굴 맞대는 사람들로부터 하루아침에 손가락질을 받거나 이지메를 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일본인들은 자신들의 삶을 종종 '싸움'으로 묘사합니다. 일본의 애니메이션에는 수많은 종류의 싸움에 나서는 주인공들이 등장합니다.


집이란 전쟁과 같은 바깥 생활에서 지치고 힘들었던 나를 따뜻이 맞아 주는 나만의 공간입니다. 바깥과 안을 구분하는 내 경계 안쪽의 세계.


타다이마란 나를 맞아주는, 그 세계에 대한 인사말일 것입니다.                     

비록 오카에리라고 말해줄 누군가가 실제로 없어도 말입니다.     



**표지 이미지는 KCC 광고의 일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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