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선생 Feb 12. 2020

나라마다 다른 '변신'의 의미

서양, 일본 그리고 한국 문화에서의 변신

변신(變身)이란 몸을 바꾼다는 뜻입니다. 사실상 사람이 몸이 바뀌는 일은 일어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세계의 여러 문화권에는 변신에 대한 다양한 신화와 전설들이 전해 오는데요. 한 사람이 다른 존재로 모습이 바뀌는 변신 이야기들은 사람들이 갖는 불안과 욕망을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문화와 마음의 관계를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단서를 제공합니다.


오늘은 이 변신에 얽힌 사람들의 심리에 대해 말씀드려볼까 합니다. 크게 서양과 일본, 그리고 한국의 변신 코드의 차이를 살펴볼 예정인데요. 서양도 수많은 나라가 있습니다만 제가 지식이 짧아 '서양'이라고 묶는 것을 양해부탁드립니다. 


제가 동양인인지라 동양문화 안의 차이에는 관심이 많아서 이것저것 많이 들여다봤지만 서양문화의 세세한 구분에는 그다지 밝지 못합니다. 서양문화도 유럽과 북미가 다르고 유럽에서도 남유럽, 서유럽, 동유럽, 북유럽은 제법 차이가 있다는 정도만 알고 있는데요. 그런 차이에 대해서도 언젠가는 다뤄볼 생각입니다^^.


어쨌든, 오늘의 주제로 돌아와서..

서양 변신물의 원형은 뭐니뭐니해도 그리스 신화일 겁니다. 그리스 신화에는 수많은 변신이야기들이 나오는데요. 변신은 주로 신들이(주로 제우스) 바람 피울 때, 또는 신의 저주 또는 축복으로 일어나고 있습니다. 신들의 권능 또는 인간들의 감당할 수 없는 분노나 슬픔 등이 변신의 이유로 묘사되고 있죠.

황소로 변신해 에우로페를 납치하는 제우스

그리스 신화는 서양문화의 모태이기는 하지만 워낙 과거의 이야기인지라 현대의 서양을 이해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물론 지금도 여전히 인간의 보편적 심성에 대한 많은 통찰을 주고 있기는 하지만 말이죠.


비교적 최근의 변신 코드를 이해하기 위해 서양(주로 북미)의 문화콘텐츠에 자주 나타나는 변신물들을 가져와 봤습니다. 고대에 신화가 있었다면 현대에는 책과 영화, 드라마가 있습니다. 모름지기 사람들에게 널리 사랑받거나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설정에는 사람들이 보고싶어하는 뭔가가 숨어있기 마련이죠.


현대적인 변신물의 시초라 할 수 있는 것은 1886년 출간된 <지킬박사와 하이드씨>입니다. 존경받는 의사 지킬박사가 자신이 발명한 약으로 하이드씨라는 사악한 범죄자로 변신한다는 이야기인데요. 이 고전적인 이야기는 인간 내면의 악(惡)이라는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누구나 마음 한 켠에 밖으로 드러내기 어려운 더럽고 위험한 욕망을 가지고 있을텐데요. 정신역동이론가 융(Jung)은 이를 그림자(shadow)라 했습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부분이 밝으면 밝을수록 내면의 그림자는 짙어지기 마련이죠. 이 두 가지 측면이 캐릭터화된 것이 지킬 박사와 하이드씨입니다. 

스스로 인식하기도 어렵고 인식했다 한들 인정하기 싫은 것이 그림자(shadow)입니다. 지킬박사와 하이드씨는 그러한 내면의 그림자가 튀어나와 현실의 자신을 바꿔버릴지 모른다는 불안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구조는 천재 과학자에서 분노로 가득찬 괴물로 변신하는 마블코믹스의 영웅, 헐크에 그대로 반복됩니다.


뱀파이어와 늑대인간, 또 최근 많이 제작되고 있는 좀비물 역시 변신의 코드로 읽을 수 있는데요. 여기에 대해서는 제 다른 글(https://brunch.co.kr/@onestepculture/212)을 참조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짧게 요약하자면 이들도 인간에 내면에 잠재된 악(惡)이 현재의 자아를 잠식할 지 모른다는 불안을 다루고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또 하나 언급할 만한 작품은 프란츠 카프카의 소설 <변신>입니다. 평범한 직장인에서 하루아침에 흉측한 벌레(甲蟲)로 모습이 바뀐 그레고르라는 청년의 이야기인데요. 어려운 가족을 위해 헌신해 왔던 그레고르는 갑자기 벌레로 변했고 가족들에게조차 버림받은 채 딱딱한 껍질 안에서 일체의 소통을 단절한 채 죽어갑니다. 

1915년 출간된 <변신>은 현대 산업사회에서 일과 관계로부터 소외된 인간의 불안을 그려낸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인간은 오로지 일로서 가치를 평가받고 그 가치를 다하지 못하면 하루아침에 벌레 취급을 받게 됩니다. 이 작품 역시 존재에 대한 불안이라는 키워드로 읽어낼 수 있습니다.


서양은 개인주의 문화권으로 분류됩니다. 자기 자신을 타인과는 분리된 독립적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존재로 보는 사람들이죠. 이들은 문화로부터 늘 구체적이고 일관적인 자아상을 갖출 것을 요구받습니다. '나'는 사회적 맥락과는 독립적으로 언제 어디서나 잘 기능해야하죠. 


'나는 독립적이고 일관적인 존재로 잘 기능하고 있는 것일까?'는 개인주의 문화 사람들의 자신의 삶에 대한 근원적 의문일 것입니다. 따라서 존재에 대한 불안(anxiety)이 변신의 주요 원인으로 작용하는 것은 타당해 보입니다.


그러면 다른 문화권은 어떨까요? 제 호기심을 자극한 건 일본이었습니다. 일본에는 수많은 변신로봇들을 비롯하여 <파워레인저>류의 전대물, <요술공주 밍키>같은 마법소녀물, <진격의 거인> 등의 신체변형물 등 변신에 대한 이야기들이 정말 많은데요. 그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변신로봇물입니다. 

기동전사 건담

변신로봇들의 종류는 뭐 당장 생각나는 것만 해도 가오가이거, 그렌라간, 겟타로보 등 셀 수가 없을 지경인데요. 미국 변신로봇 트랜스포머도 그 원작은 일본(다이아크론, 1980)일 만큼 일본은 변신로봇의 원조라 할 수 있습니다.


변신로봇의 특징은 일단 거대하다는 점입니다. 작게는 수 미터에서 마크로스 같은 경우는 수십 킬로미터에 이르죠. 둘째, 그 크기만큼 당연히 엄청나게 강한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뭐 로봇끼리 싸우면 도시 몇 개가 파괴되는 것은 다반사고 심하면 행성같은 것도 막 쪼개집니다.


세번째이자 일본 변신로봇물의 중요한 특징은 사람이 직접 변신하는 게 아니라 조종사로 로봇에 탑승한다는 것이죠. 하지만 조종사와 로봇 사이에는 반드시 싱크로(일치율)가 높아야 합니다. 로봇과 내가 일치되어야 진정한 로봇의 조종사가 되는 것이죠. 바로 이 점 때문에 변신로봇은 일본형 변신물의 전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변신물의 핵심은 정체성의 변화입니다. 한 인물이 전혀 다른 존재로 바뀌는 것이죠. 변신이라는 코드가 일본에서 자주 반복적으로 나타난다는 것은 일본인들에게 변신을 통해 충족해야 하는 욕구가 있다고 짐작할 수 있게 합니다. 그것은 또 다른 내가 되고 싶다는 욕구입니다.


일본의 변신물에서 주인공이 변신한 대상은 매우 강하거나 아름답고 신비한 능력을 갖고 있습니다. 반면 서양권 변신물의 특징은 변신한 모습이 대개 못생겼다는 점입니다. 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고는 하지만 외모는 호감형이라 말하기 어렵죠. 이 점으로 미루어 서양권 변신물에서의 변신한 모습은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받아들이기 힘든 내면의 어두운 측면을 상징한다고 해석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그러나 일본 변신물에서의 변신한 모습은 주인공 내면의 또 다른 자아라기보다는 원래 주인공은 갖지 못했던 외모와 능력을 가진 상태입니다. 크고 아름다운 어떤 것이죠. 아름답진 않아도 엄청 크고 대단한 존재임에는 분명합니다. 이는 자신의 자아가 아닌 이상적 자아, 즉 되고 싶었던 자신의 모습에 가깝습니다. 


일본 문화는 상당히 경직된 문화입니다. 사회에는 지켜야 할 규범들과 해야 할 의무들이 가득하고  해야 할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거나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하게 되면 주위 사람들에게 괴롭힘을 당하거나 말할 수 없는 수치(恥)를 느껴야 합니다.

      

이런 문화 속에 사는 사람들은 주어진 일에 충실한, 정해진 일 외에는 생각하기 어려워하는 제한적인 자아상을 갖게 됩니다. 주의가 타인에게 있으며 타인이 시킨 일을 수동적으로 행하는 자아를 문화심리학에서는 대상적 자기라고 부릅니다. 일본문화에서 일본인들은 자신은 이러한 존재라는 생각을 갖고 거기에서 비롯된 욕망과 불안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현실의 나로서는 절대로 할 수 없는 일들을 가능하게 해주는 크고 압도적인 존재가 되고 싶다는 욕망이 발생하는 것이죠. 변신한 나는 강하며 내게 주어진 모든 의무들(친구들을 지킨다든지.. 세상을 구해야 한다든지)을 수행할 수 있게 됩니다. 


변신한 주인공의 고민도 차이가 있습니다. 서양권 변신물의 주인공들이 서로 다른 두 개의 자아 사이에서 어떤 내가 진짜 나인지를 고민한다면 일본 변신물의 주인공들은 별로 그런 고민이 없거나, 하더라도 달라진 자신의 역할을 어떻게 받아들일지를 고민하지 어떤 자아가 진정한 자아인지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에반게리온은 로봇은 아닙니다만..

사실 변화한 정체성과 이전 정체성 사이의 혼란은 일본 변신물의 중요한 주제 중 하나입니다. 신지는 자신이 왜 에반게리온의 조종사가 되어야 하는지 끝까지 혼란스러워했고, <도쿄 구울>의 카네키나 <진격의 거인>의 에렌도 자신이 왜 구울 혹은 거인이 되어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지만 결국 동료를 위해서나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 그 정체성을 받아들이게 되는 과정을 보입니다.     


이는 '나'는 다른 이들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존재라는 인식과 관련있다고 생각됩니다. 독립적이고 일관적인 자기를 유지해야 하는 개인주의 문화와 상황에 따라 다른 역할을 수행해야 하는 집단주의 문화에서 개인이 느끼게 되는 불안과 공포가 ‘변신’이라는 상징적 방식을 통해 표출되는 것이죠.     


그런데 한 가지 의문이 남습니다. 자신이 수행해야 하는 서로 다른 역할 사이에서의 고민이 집단주의 문화에서 보편적인 것이라면, 동양의 다른 나라에서도 비슷한 내용의 문화컨텐츠가 좀더 보편적이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러나 아시다시피 변신물은 일본이 본향입니다.   


한국에도 변신로봇 만화들이 있지만 그 안에서 주인공들은 위와 같은 고민을 하지는 않습니다. 물론 우리나라 변신로봇물들의 시청자들은 대개 어린이들이라는 점도 있겠지만 근본적으로는 로봇을 통해 보고자하는 지점이 다르기 때문이 아닐까 한데요.

우리나라의 변신로봇 만화들은 주인공이 탑승하는 방식보다는 트랜스포머처럼 로봇 자체에 인격(로봇격?)이 부여된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최근에 나온 <또봇>이나 <카봇>같이 말이죠. 얘들은 주인공들의 '친구'지 주인공들이 나와 일치시켜야 할 대상으로 등장하지는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한국문화에서 변신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요?

글이 많이 길어진 관계로 이 내용은 다음 시간에 말씀드려야 할 거 같네요^^.

매거진의 이전글 일본인들은 왜 빈 집에 돌아와서도 인사를 할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