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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선생 Jan 29. 2021

괴물의 문화심리학

미국  vs  일본의 괴물영화 비교

괴물은 영화의 좋은 소재입니다. 볼거리를 주거든요. 사실 볼거리야말로 영화산업의 핵심입니다. 영화는 사람들에게 볼거리를 제공하기 위해 발전해왔죠. 그러나 볼거리만 갖고는 안됩니다. 스토리가 있어야죠. 관객을 끌어당기는 스토리 없이는 아무리 화려한 특수효과로 떡칠을 해도 손익분기점을 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괴물이 나오는 영화들은 사람들을 끌어들일 만한 이유를 갖추게 되었습니다. 어떤 괴물이, 언제, 어디서, 왜 나와서 무엇을 하느냐가 중요해졌습니다. 그리고 그 이유는 문화에 따라 다를 것입니다. 각 문화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욕망과 두려움의 포인트가 모두 다르기 때문입니다.


이번 글에서는 여러 문화를 대표하는 괴물영화에 나오는 괴물들을 대상으로 괴물에 투영된 각국 사람들의 마음을 읽어내 보고자 합니다. 여러 문화라고는 했지만 사실 우리가 가장 많이 접할 수 있는 미국과 괴물영화 하면 빼놓을 수 없는 일본의 괴물영화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괴물영화의 원조는 미국입니다. 일찌감치 영화산업이 발달한 미국은 관객들에게 더 화려하고 멋진 볼거리를 주기 위해 영화에 괴물을 등장시킬 생각도 제일 먼저 했습니다. <쥬라기 공원>시리즈가 나오기 70년 전, 1925년에 이미 공룡이 나오는 <잃어버린 세계>가 개봉했고, 1933년 괴물영화의 원조 <킹콩>이 등장합니다.


그 후로 <죠스, 1975>, <쥬라기 공원, 1993> 등이 전설적인 괴물영화의 계보를 잇고 있고 그 외에도 <엘리게이터, 1980>, <아나콘다, 1997>, <딥 블루 씨, 1999> 등 뭐 많습니다. 미국 영화에 나오는 많은 괴물들은 공통점이 있는데요. 바로 자연의 거대한 힘을 상징한다는 것입니다.

원시의 섬에서 살던 거대 고릴라 킹콩이 현대문명의 한복판 뉴욕에서 벌이는 애절한 싸움은 인류가 문명의 발달을 빌미로 파괴해 온 대자연의 아픔을 상징합니다. 인간은 끝없는 욕심으로 자연을 파괴하고 이미 멸종한 동물들을 되살리거나(쥬라기공원) 인위적으로 새로운 종을 만들어(쥬라기월드, 딥 블루 씨) 자연을 거스르죠. 


대부분의 영화에서 인간들은 그 댓가를 치릅니다. 인간이 이룩한 것들은 모두 사라지고 인간들을 응징(?)한 괴물들은 다시 자연으로 돌아갑니다. 물론 괴물의 패배로 끝나는 영화들도 있습니다만 인간의 탐욕과 현대문명에 대한 비판, 자연의 순환 등에 대한 메시지는 빠지지 않죠.

미국의 괴물에는, 애초에 인간의 손이 거의 닿지 않은 거대한 대륙을 하나하나 개발하고 그 땅에서 최고 수준의 과학문명을 일궈온 미국인들이 무의식적으로 갖고 있을 자연에 대한 태도가 반영되어 있는 듯 합니다. 자연에 대한 경외감, 끝없는 인간의 욕망, 파괴되어 가는 자연에 대한 연민, 그리고 인간으로서의 죄책감 같은 것들 말이죠.


다음으로 일본의 괴물영화를 보겠습니다. 미국에서 리메이크 되기도 한 <고질라, 1954>가 일본 괴물영화의 원조라 할 수 있겠습니다. 일본식으로 '고지라'는 탄생 이후 많은 일본인들의 사랑을 받았는데요. 수십 년간 수십 편의 영화가 제작될 만큼 일본을 대표하는 괴물입니다.

우선 고지라는 미국의 괴물영화와 같이, 자연을 훼손한 인간에 대한 자연의 응징이라는 측면에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거대 괴물이 등장하고 도시를 부수게 된 이유에 대한 설명이죠. 또한 바다 밑에 잠들어 있던 고지라가 깨어나게 된 계기나 고지라의 몸에서 뿜어내는 방사능 등은 두 번의 원폭을 경험한 일본인들의 잠재적 공포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해석이 타당해 보입니다. 


그러나 일본인들의 고지라 사랑에는 그보다 더 심층적인 욕구가 숨겨져 있는데요. 고지라에 대한 일본인들의 태도는 '경외감'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고지라는 두려운 가운데 우러러보고 심지어 사랑할 수 있는 대상입니다. 


실제로 고지라는 좋은 역할로도 많이 나오는데요. <고지라 대 아무개...> 등의 영화나 그런 류의 영화를 리메이크하여 최근 개봉한 미국영화<고지라 2014>에서도 나쁜 괴물과 싸워 지구를 지키는 착한 존재로 묘사되죠. 

나쁜 놈?을 물리치는 고지라

어떤 무기로도 상처입지 않고 방사능과 열선이라는 사기적인 능력까지 갖춘 고지라 앞에서는 아무리 강한 적도 어떠한 저항도 무의미할 따름입니다. 일본인들은 이렇게 '압도적으로 강한' 대상을 창조하고 이를 우러러보는(?) 습관이 있습니다. 


일본 언론은 야구나 축구 등에서 유망주가 나오면 대번 '괴물'이라는 수식어를 붙이고 영웅화하는데 괴물은 일개 인간이 상대할 수 없는 압도적으로 강한 존재기 때문입니다. 

괴물 오타니 쇼헤이

일본인들이 강함을, 그것도 압도적인 강함을 추구하는 이유는 제 다른 글 '일본 애니 주인공은 왜 필살기에 집착하나(https://brunch.co.kr/@onestepculture/231)'를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간략히 요약하자면, 개인의 사회에 대한 무거운 책임을 강조하는 일본문화에서 마음의 부담을 이겨내고 자신에게 주어진 사회적 역할을 다하기 위해서는 '강해져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 고대의 거대 괴물은 '고대 거신병', 거인 등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일본의 중요한 문화코드인데요. 크고 거대한 압도적으로 강한 존재에 대한 동경은 그것이 고대, 즉 예전에 존재했던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렇다는 얘기는 현재에는 그렇게 크고 압도적인 존재가 없다는 이야기겠지요.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의 고대 거신병
<천공의 성 라퓨타>의 고대 거신병

과거에는 존재했으나 현대에는 사라진, 혹은 잊혀진 것. 그것만 깨어나면 지지부진한 현재를 일거에 뒤집을 수 있는 존재. 강하지도 않고 더더욱 압도적이지도 않은 현재의 일본인들은 과거의 존재들을 동경합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저는 일본인들의 '고대'에 대한 동경에서 일본의 강대했던 시기, 제국주의 시절에 대한 향수가 읽힙니다. 과거에 대한 동경은 현실에 지친 현대인들에게 흔히 나타나는 욕구입니다. 하지만 일본의 경우, 그 과거는 일본이 '강했던 시절'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재고할 여지가 있는데요.


역사적으로 일본이 강대했던 시기에는 그 힘이 '바깥'을 향했기 때문입니다. 대동아공영권 등의 허울좋은 말로 포장되기는 했지만 강대한 일본의 야욕 앞에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받았던 시기였음이 분명합니다.


최근 방영된 <진격의 거인>의 한 에피소드에서 이러한 분석을 지지할 만한 내용이 나옵니다. <진격의 거인>은 거인 외에도 ‘벽 안의 세계’와 ‘벽 밖으로부터의 위협’이라는 대단히 일본적인 코드를 갖고 있는 작품인데요. 해당 에피소드는 이제껏 주인공들을 위협했던 거인의 정체에 대한 부분입니다.     

<진격의 거인>의 초대형 거인

적이라고만 생각했던 거인들은 사실 벽 안에 사는 사람들과 같은 존재였다는 것이죠. 고대에 강하고 완벽한 문명을 건설했던 그들은 전쟁에서 패배한 뒤, 영광스러운 과거를 잊고 벽 안에 갇혀서 비굴하게 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강하고 완전했던 거인이라는 스스로의 정체성을 되찾아, 과거를 치욕스럽게 기억하지 말고, 다시 거인들이 주인되는 세상을 열자.. 뭐 이런 주장이 숨겨져 있는 셈인데요. 바로 여기가 ‘진격의 거인’의 문제가 드러나는 지점입니다. 


진격의 거인 최근 스토리에서 드러나는 거인의 역사와 그에 대한 주인공들의 인식은 징용, 위안부 등 식민지 국민들에게 저지른 일과 패전의 역사를 잊고 군사대국화를 꿈꾸고 있는 작금 일본의 행보와 놀랄 정도로 유사합니다. 


물론 제가 예로 든 것은 몇 개의 애니메이션일 뿐이고 강했던 과거를 동경하는 일본인들의 무의식적 욕망이 군국주의로의 회귀로 이어질지는 모르겠지만, 불행했던 역사를 경험한 이웃의 입장에서는 불안한 느낌을 지우기 어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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