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선생 May 16. 2018

일본 애니 주인공은 왜 필살기에 집착하나?

왜 그들은 강함을 추구하는가, 두 번째 이야기

※ 이 글은 '일본의 영웅은 누구인가(https://brunch.co.kr/@onestepculture/230)'에서 이어지는 글입니다.


일본 만화를 보다 보면 꼭 나오는 장면이 있습니다. 바로 주인공이 필살기를 쓰는 장면이지요. ...에네르기파, 진심펀치, 패왕색 패기 등등  익숙한 이름도 많으실텐데요. 심지어 악당들은 주인공들이 필살기를 쓰기 위해 에너지를 모으고, 여러 가지 불필요한 동작들을 하고, 과거를 회상하는 동안 침착하게 기다려줍니다.

원펀맨, 진심펀치

그리고는 주인공의 필살기를 맞고 쓰러지면서 다음과 같은 대사를 남기죠.

"과연 강하구나...", "적이지만 인정할 수 밖에 없군.." 등등

손발이 오그라듭니다만 또 이런 게 일본만화 보는 맛이기도 합니다.


그렇습니다. 일본의 수많은 컨텐츠에 등장하는 필살기의 목적은 주인공의 강함을 돋보이게 하기 위함입니다. 적이 강할수록, 적과의 승부가 치열할수록 주인공에게는 더욱 강력한 필살기가 필요합니다. 주인공이 지거나 죽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면 스토리가 끝나버리니까요..

바람의 검심, 천상용섬

강한 적을 만나 한두 번 져도, 주인공은 재야의 고수를 만나서 혹은 불굴의 의지로 새로운 필살기를 개발하고 다음에는 그 필살기로 마침내 적을 무찔러버리죠. 치고받고 싸우는 만화뿐만이 아닙니다. 건담같은 메카닉물이나 스포츠물에도 필살기는 반드시 등장합니다.


아재들은 익숙하실.. 축구왕 슛돌이;;의 독수리슛을 비롯.. 축구, 배구, 농구, 테니스, 탁구 할 것 없이 필살기들의 종류는 끝이 없죠. 그 상상력도 갈수록 웅대(?)해져서 요새는 뭐 테니스 치다가 시공이 바뀌고 막 그러는 수준이라더군요(테니스의 왕자).

전설의 독수리슛

일본인들의 필살기 사랑은 만화가 아닌 현실에서도 볼 수 있는데요. 특히 스포츠 장면에서 특정 선수의 시그니처 기술이 필살기처럼 애용되는 것입니다. 김연아 선수의 '라이벌'로 유명한 아사다 마오의 트리플 악셀(3.5회전)이 그 대표적인 예죠.

트리ㅍ.. 아 ㄱ

평창올림픽 피겨 남자 싱글에서 금메달을 딴 일본의 하뉴 유즈루의 새 목표는 쿼드러플(4회전)을 넘어 5회전 점프를 성공시키는 것이랍니다. 이미 올림픽을 두 번 제패한 그가 4회전으로도 모자라 5회전 점프에 도전해야 할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럼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 봅시다. 필살기의 본질은,

한 순간에 적을 압도하는 강력한 기술입니다.


그렇습니다. 필살기는 일본인들이 추구하는 '강함'이 극대화된 실체인 것입니다. 강한 것도 그냥저냥 강한 것이 아니라 '압도적'으로 강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일본인들이 추구하는 강함은 '압도적인 강함'입니다. 다음은 지난 평창올림픽 쇼트트랙 여자계주 준결승 경기에 대한 일본 방송의 해설입니다.


미국, 캐나다, 영국 등 서구권 해설진들이 환상적이다, 믿을 수 없다, 대단하다, 놀랍다는 반응이었던데 비해, 일본의 중계진은 '강하다'는 표현을 씁니다. 그것도 '압도적인 강함'이랍니다. 이 표현에서 일본인들에게 필살기가 어떤 의미인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필살기는 주인공을 '압도적으로 강하게' 만들어 주는 기술인 것이죠. 달리 말해 주인공은 상대를 압도할 만큼 강해야 하는 것입니다. 각종 문화콘텐츠의 주인공에게는 결국 해당 문화의 구성원들의 욕망이 투사됩니다. 일본인들은 강한 것으로는 모자라 압도적으로 강해야 하는 모양입니다. 그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요?


일본인들은 '모든 것(사람)은 정해진 곳에서 정해진 역할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강합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로도 수십 년간 근무지를 지켰던 군인들이나 수백 년의 전통을 잇고 있는 장인들이 그 예입니다. 일본인들은 사회적으로 정해진 자기 자리에서 사회적으로 기대되는 역할을 하는 데 익숙하고 또 편안함을 느낍니다.

필리핀의 정글에서 30년을 보낸 오노다 히로(小野田寬郞) 소위

그러나 그렇지 못할 때에는 반대로 상당한 불편감과 불안감을 느낍니다. 이러한 감정은 일본에서 수치(恥, 하지)로 표상되는 것 같습니다. 시험에 떨어지거나 경쟁에서 패한 경우, 하지는 분발을 유도하는 자극이 되기도 하지만 일본인들의 경우에는 자신감을 잃고 우울에 빠지는 원인으로 작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루스 베네딕트의 국화와 칼에 인용된 연구에 따르면, 경쟁은 미국인들을 자극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게 만드는 반면 일본인들에게는 작업 능률을 떨어뜨리는 원인이 됩니다. 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일이 손에 잡히지 않게 되는 것이죠. 경쟁을 외부로부터의 공격이라 생각하여 자신의 일에 전념하는 대신 자신과 공격자의 관계에 주의력을 빼앗기고 마는 것입니다.


이것이 일본인들이 승패가 갈리는 경쟁에 취약한 이유입니다. 실력을 인정받는, 이름있는 사람일수록 자신에게 집중되는 다른 이들의 기대를 잘 알고 또한 자신이 그 기대에 부응해야 함을 무겁게 인식합니다. 그래야 '자신에게 주어진 자리에서 제 역할을 하는' 셈이 되니까요.


그러나 찰나의 순간에 승패가 갈리는 승부의 현장에서 이러한 생각은 집중력을 저해하고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게 하는 걸림돌입니다. 따라서 필살기는 일본인들에게 경쟁의 불안과 패배로 비롯될 수치를 제거해주는 역할을 해 줍니다.

내가 상대보다 압도적으로 강하다면 승부에서 혹시라도 질까봐 걱정하지 않아도 되고 내게 쏟아지는 다른 이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아도 되니까요. 다시 말해, 필살기란 일본인들에게 '내가 내 자리에서 내 역할을 하게 해주는' 도구인 것입니다.


이는 반대로, 일본사회에서 '자기 자리에서 제 역할을 해야 한다'는 압력이 얼마나 큰가에 대한 증거라고 해석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한 사람이 사회에서 자기 역할을 하기 위해 '필살기'까지 필요할 정도니 말이죠.

매거진의 이전글 일본의 영웅은 누구인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