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선생 Nov 12. 2017

대혐오 시대, 해법은?

뻔한 결론, 하지만 새로운 방법

언제부턴가 우리사회에 혐오가 만연하고 있습니다. 김치녀 한남충은 이미 역사가 오래되었고.. 맘충, 빠충, 틀딱충, 급식충, 설명충, 리얼충 등등.. 자고 일어나면 OO충 하나가 생겨있는 느낌입니다. 


맘충, 빠충이란 공공장소에서 자기 아이를 제대로 케어하지 않는 부모를 일컫는 말이고, 틀딱충은 노인들을 비하하는 말로 틀딱은 '틀니 딱딱'에서 왔습니다. 급식충은 급식을 먹는 중고등학생들을 칭하는 말이죠. 


남성이 여성을, 여성이 남성을, 청년은 노년을, 노년은 청년을 혐오하는 듯합니다. 만인의, 만인에 의한, 만인에 대한 혐오. 대혐오시대라는 말이 어색하지 않을 지경입니다.

요즘 젊은이들 사이에서 많이 쓰이는 ‘극혐’이란 표현도 그렇습니다. 문자그대로 지극히 혐오스럽다는 뜻의 이 말은 매우 일상적인 맥락에서도 흔하게 사용되는데요. 맘충 극혐, 틀딱충 극혐.. 뿐만 아니라 날이 더워도 극혐, 밥이 맛이 없어도 극혐, 누가 꼴보기 싫어도 극혐이 나옵니다. 


극혐이란 태도를 점수로 나타내는 척도의 극단에 있는 표현입니다. 보통이다, 그저 그렇다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런 최상급 표현이 일상용어에 그대로 사용되고 있다니.. 말 그대로 혐오의 일상화라고 할 수 있는데요.

대한민국은 왜 혐오에 빠지게 되었을까요.

     

혐오는 두려움, 슬픔, 행복, 등의 기본 정서 중에서도 인간의 삶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종류의 감정입니다. 정서를 적응에 따르는 생물학적 반응으로 보는 입장에 따르면, 혐오는 썩은 음식을 먹었을 때(disgust) 혹은 감염된 상처나 독충 등을 보았을 때 느껴지는 거부의 반응에 가깝습니다. 


심리학자 로진(Paul Rozin)은 혐오는 오염물의 체내화라는 관념에 초점을 둔 복잡한 인지적 내용을 지니고 있다고 주장하는데요. 역겨운 대상 그 자체만이 아니라, 그것이 자신의 몸 안으로 들어올 경우 일어날 수 있는 결과들(예, 질병, 감염, 사망 등)을 상상함으로써 혐오가 구체화된다는 것입니다.


즉, 혐오가 강렬한 이유는 혐오를 불러일으키는 대상이 나와 내가 속한 집단의 생존에 위협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썩은 음식이나 토사물의 냄새를 맡거나 뱀, 거미, 전갈 등을 봤을 때 어떤 반응이 자연스러울지는 상식적인 일입니다. 진저리를 치며 그것을 뿌리치지 않으면 내 생명이 위험해질 수 있으니 말이죠.


사실 ‘◯◯충’이란 단어에도 혐오라는 정서가 짙게 배어있습니다. 예로부터 벌레는 인류의 생존을 위협해 온 존재죠. 사람들은 벌레의 모양을 보거나 생김새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혐오감이 들도록 진화해왔습니다.

극혐...

지역차별, 사자모욕, 범죄 인증 등으로 사회문제화된 일간베스트 회원을 일컫는 일베충에서 시작된 ◯◯충 시리즈는 한남충, 급식충, 설명충, 맘충에 이르기까지.. 최근 들어 급속도로 퍼지고 있습니다. 


이런 ◯◯충 중에는 일베충..처럼 실제로 사회적 위협을 야기하는 부류도 있으나 개중에는 설명충(뭐든지 설명하려고 드는 사람)처럼 단순히 자신의 선호나 취향에 맞지 않는 이들을 지칭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혐오의 의미가 대상과 영역을 떠나 불쾌감을 주는 행동 전반으로 확장된 모양새입니다. 


그러나 혐오는 단순한 선호의 문제가 아닙니다. 독일의 문화학자 빈프리드 메닝하우스는 혐오를 ‘동화될 수 없는 타자성을 거부하는 자기 주장의 고조’로 정의합니다. 쉽게 말하자면, 혐오란 나와 같지 않은 이들과 가까워지는 것을 원치 않는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자연히 혐오에는 비하와 멸시, 차별이 뒤따르는데, 이는 썩은 음식이나 벌레를 뿌리치고 멀리하려는 동기와 근원적으로 같습니다. 사람들은 위생상 배설물, 시체, 썩은 음식 등의 불쾌한 물질을 처리해 왔으며, 비슷한 이유로 혐오감을 주는 특정 집단이나 오염물로 인식되는 것들을 지닌 사람들을 기피하도록 가르쳐왔습니다.


역사적으로 혐오는 특정 집단과 사람들을 배척하기 위한 강력한 무기로 이용되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인종혐오죠. 히틀러는 유태인을 더럽고 냄새나는 열등한 종족, 독일사회의 기생충이라 선동했고, 노예해방 이후 150년이란 세월이 무색하도록 미국에서는 여전히 흑인에 대한 차별이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인종혐오가 사라지지 않는 이유는, 어떤 집단에 대한 혐오감을 표출함으로써 내집단의 우월감을 확인하고, 당면한 문제에 대한 불안감을 해소하는 등의 심리적 이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회에든 불만을 가진 이들은 있기 마련이고 이러한 불만은 가장 찾기 쉬운 대상에게 표출됩니다. 


인종은 피부색, 머리카락, 눈동자 등 외모로 확연히 구분되는 특징 때문에 쉽게 이러한 편견의 대상이 되어 왔지요.  현재 한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대혐오도 기본적으로 같은 메카니즘에서 비롯된다고 생각됩니다. 적당한 희생양을 찾아 자신의 불만을 표출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한국에서의 혐오는 그 대상이 외모로 구별되는 외부인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몹시 다양하다는 특징을 보입니다. 누가 누구랄 것 없는 혐오의 분출, 그야말로 만인의, 만인에 의한, 만인에 대한 혐오라는 점이죠. 


이러한 혐오현상의 이유로 두 가지를 꼽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첫째는 현 시대 한국인들이 그만큼 힘들고 불만스럽다는 것이겠고, 둘째는 우리가 가진 문제해결 방식의 문제입니다.


다행스럽게도(?) 최근 몇 개월 동안 한국은 끝이 보이지 않던 터널을 조금씩 빠져 나오는 느낌입니다. 하루아침에 모든 것이 바뀌기는 어렵겠습니다만 우리의 오늘은 분명 어제보다는 나아지고 있습니다. 그런 희망으로 내 주변부터 조금씩 변화를 이루어간다면 점차 살 만한 세상이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두 번째, 우리의 문제해결 방식입니다. 나에게 해를 끼치거나 마음에 들지 않는 상대를 만나면 한국인들은 그들을 적으로 규정하고 철저히 배척하는 경향을 보입니다. 너희들과 같은 하늘 아래 살 수 없다는 식이죠. 


이런 방식은 아마도 분단 이후의 치열한 대립의 역사 때문일 것으로 추정됩니다. 한국인들은 '나와 다른' 상대와 갈등을 해결하는 제대로 된 방법을 배울 기회가 없었습니다. 심지어 상대를 적으로 규정하고 적의를 드러내지 않으면 우리편이 아니라고 의심받을 지경이었죠. 이런 방식은 그렇게 우리의 문화가 되었습니다.

지금 세상에 만연한 혐오는, 사람 사는 세상이라면 충분히 일어날 수 있고 또 해결할 수 있는 갈등에 대한 우리의 태도입니다. 공공장소에 아이를 데려가는 것이, 중고등학생들이 생소한 말투를 쓰는 것이, 나잇값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 그들을 이 사회로부터 격리시켜야만 될 정도로 큰 문제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결국 혐오란, 갈등을 보는 우리의 시각에서 비롯됩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갈등들을 보다 원만하게 해결하는 방법은 없을까요? 


확실한 것은 혐오가 이에 대한 해답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떤 이들과 같이 있기조차 싫은 마음으로 갈등을 해결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사실 답은 간단합니다. 상호이해의 폭을 넓히고 갈등에 대해 논의할 수 있는 공감대를 만드는 것이죠. 하지만 그게 말처럼 쉬웠다면 우리 사회에 혐오가 만연할 일도 없었을 겁니다. 



상호이해라는 것은 상대를 나와 동등한 관계로 인정할 때 비로소 시작될 수 있습니다. 상대를 사람이 아닌 벌레(蟲)로 규정하는 순간, 상호이해는 물 건너간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혐오의 시대를 종식시키는 것은 우리 주변의 사람들을 나와 같은 사람으로 보는 것부터 출발합니다. 광화문에서 성조기를 드는 노인들도, 식당에 아이를 데려오는 엄마 아빠도, 중고등학교에서 급식을 타 먹는 친구들도 다 나와 다를 것 없는 사람입니다. 


그들의 행위가 때로는 이해할 수 없고 때로는 누군가에게 피해도 주겠지만, 달리 생각해보면 나의 행위도 누군가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짓일 수 있고 누군가에게는 폐가 될 수 있는 일입니다. 사람들이 살아간다는 것이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갈등이 있으면 해결하면 되고 이해가 안되면 이해해 보려는 노력이라도 해야 합니다. 그들은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무작정 선을 긋고 편을 나눈다면 그 순간 공존의 가능성은 사라지고 맙니다. 

문화심리학은 나와 다른 존재를 나와 같은 사람으로 보게 만드는 시각을 제공합니다. 우리와 다른 문화를 가진 사람들이 미개인이 아니고 야만인이 아니듯이,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적이나 벌레가 아니라는 생각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제가 '한선생 문화심리학'을 연재하는 이유입니다. 

다른 문화를 이해하는 법에 익숙해지면 결국 내 옆에 있는 사람도 이해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