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해당하지 않으려는 자식들의 절규
개저씨 혐오는 '개저씨'로 표상되는 일부 중년 남성들에 대한 단순한 불만의 표출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갑인 아버지 세대에 대해 영원한 을일 수밖에 없던 자식 세대의 반란이다.
진화적으로 볼 때 부모자식 간엔 원래 갈등이 있다. 부모와 자식은 대개 자원의 배분을 두고 의견이 엇갈리는데 보통 자식이 더 많은 자원을 원하는 양상을 보인다. 아무래도 자식이 살아가야 할 날이 더 많기 때문일 것이다.
부모 자식의 이러한 관계는 세계 많은 지역의 신화, 문학, 예술에서 부친살해라는 모티프로 나타난다. 부친살해는 전 세계 신화와 동화에서 흔히 나타나는 보편적 주제다. 가장 잘 알려진 것이 바로 오이디푸스 신화일 것이다.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하는, 웬만한 막장드라마 뺨치는 이야기 말이다.
물론 부친살해는 은유다. 현실에서 아버지를 죽이는 행위는 존속살해에 해당하며 가장 무거운 형량이 선고되는 범죄로 취급된다. 오이디푸스도 자신의 죄를 깨달은 뒤 스스로 두 눈을 뽑고 평생을 방랑함으로 죄값을 치르지 않았던가.
그러나 상징적으로 보자면 부친살해는 과거, 혹은 지난 세계와의 단절과 새로운 세계의 시작을 나타내며, 동시에 새로운 세계를 건설할 창조의 주체가 필연적으로 거쳐야 하는 과정을 의미한다. 올림푸스 신들의 우두머리 제우스가 아버지 크로노스를 죽이고 자신의 세계를 연 것은 부친살해의 의미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부친살해는 또한 자식이 주체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하는데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다. 아이는 아버지를 죽임으로써 주체로서의 삶에 한 걸음 다가간다. 아이는 자신의 욕구를 인식하고 이를 적절한 방법으로 충족할 수 있는 주체가 되기 이전의 상태다. 아버지는 아이의 욕구를 규정하고 통제하는 사회의 기존 질서를 의미하는데, 아이는 이 아버지의 존재를 극복해야 자신의 의지로 세상을 살아갈 수 있게 된다.
개저씨에 대한 청년들의 혐오는 우리사회 기득권인 아저씨(아버지와 같은 항렬)들을 향한다는 점에서 부친살해의 동기에서 비롯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대한민국의 청년들은 과연 개저씨들을 죽이고 자신들의 세계를 열 수 있을 것인가.
전망은 밝지 않다. 부친살해가 전 세계적으로 발견되는 모티브임에도 불구하고 한국문화에서는 부친살해의 서사를 좀처럼 볼 수 없다. 한국에서는 역사적으로 자식들이 아버지를 극복한 사례가 극히 드물거나 혹은 권장되는 방식이 아니라는 것이다.
문학박사 김영희에 따르면, 한국의 전설, 설화, 민담에는 부친살해가 아니라 ‘자식살해’라는 모티브가 나타난다. 흉년에 부모를 봉양하기 위해 자식을 죽이거나(손순매아, 동자삼 등) 현재의 질서를 뒤엎을 영웅이 태어나면 부모와 동네 사람들이 후환을 막기 위해 아이를 죽이는(아기장수 설화) 등이다.
한국문화에서 발견되는 자식살해의 서사는 아버지로 표상되는 기존 질서에 대한 순종과 헌신을 의미한다. 자식의 요구에 대한 아버지들의 답은 오랫동안 순종과 헌신이었던 것이다. 효(孝)를 으뜸 가치로 쳤던 한국의 역사에서 부친살해는 상상할 수조차 없는 패륜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리고 자식살해는 청년 세대의 희생을 강요하는 열정페이나 노오력 타령 등으로 21세기가 되도록 반복되고 있다. ‘아프니까 청춘이다’는 말은 청춘이 겪는 온갖 부조리와 아픔을 젊음이라는 이유로 감내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과거의 아버지들이 자식의 순종을 이끌어낼 수 있었던 것은 ‘참고 따라라. 그러면 지금 내가 누리고 있는 것이 언젠가는 네 것이 될 것이다’는 메시지다. 부모를 위해 자식을 죽인 아들은 복을 받는다. 부모를 봉양하기 위해 자식을 생매장하던 손순은 땅을 파다가 돌로 된 종을 캐내고 이 사실이 세상에 알려져 나라로부터 큰 상을 받았고, 세상을 바꿀 아기장수를 죽인 부모와 동네 사람들은 역적의 부모, 역적의 동네가 될 위험에서 벗어났다.
이런 자식살해의 모티브는 한국문화 안에서 흔하게 발견된다. 대표적인 것이 사회적 이슈가 있을 때마다 들려오는 “000 때문에 경제가 어렵다” “000도 중요하지만 안보가 우선이다” “너만 가만히 있으면 아무 문제없다” 따위의 이야기들이다. 한국이 더 나은 사회로 나아갈 수 있었던 많은 기회들이 기존 질서의 유지라는 명목 하에 사라져 갔다.
즉, 한국사회는 현실의 안위를 위해 미래의 가능성을 희생하는 방식으로 지속해 온 것이다. 이것이 자식살해의 본질이다. 물론 현실의 안위도 중요하다. 현실의 안위가 있어야 미래도 가능한 법이므로. 하지만 현실의 안위만을 강조하는 문화에서 변화와 개혁은 기대하기 어렵다.
그러나 부친살해는 쉬운 일이 아니다. 현실은 아버지들의 세계다. 아버지들은(아저씨는 아버지의 형제다) 현재의 세상을 구축했고 그 법칙을 지배하고 있다.
자식들과 아버지들의 힘 차이는 이제 막 제다이가 된 루크 스카이워커와 제국군 총사령관 다스 베이더의 차이만큼이나 크다. 그리고 모든 것을 가진 아버지는 자식에게 내 편이 되어 세상을 지배하자고 말한다. 그 제안을 거절하면 기다리는 것은 죽음뿐이다.
부친살해의 스토리가 신화나 전설로만 전해오는 데도 이유는 있을 것이다. 자식들의 반란은 대개 기성세대에 대한 항복으로 마무리된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아이들이 4~6세 경에 겪게 되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동성부모에 대한 동일시로 갈무리된다.
아들의 엄마에 대한 사랑은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아버지의 존재로 좌절된다. 엄마에 대한 마음을 들키기라도 하면 아버지가 자신의 고추를 자를지 모른다는 공포에 사로잡히게 되는 것이다. 절박한 존재의 위기 속에서 아들은 아버지를 흉내내어 내가 아버지 편이라는 사실을 드러냄으로써 공포(거세불안)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이것이 동일시라는 방어기제다.
그러나 부친살해에는 단지 아버지가 가진 것을 차지하겠다는 것 외에도 중요한 욕구가 있다. 그것은 바로 자기정체성의 확립과 실존에 대한 욕구다. 아버지를 죽이는 것은 위험부담이 너무나 큰 반면, 아버지의 말을 따르는 것은 상대적으로 쉽다. 더구나 부와 명예까지 보장된다면 누가 굳이 아버지를 살해하려 하겠는가.
자식들이 이 모든 것을 무릅쓰고도 아버지를 극복하려 하는 것은 스스로 판단하는 주체로 살아가기 위해서다.
라캉은 아이가 부친살해를 실행하지 못하면 아버지의 포로가 되어 별로 바람직하지 않고 생산적이지도 않은 일들에 집착하게 된다고 하였다.
자기를 잃어버린 채 (아버지의) 대의명분에 집착하거나, 관습과 권력(아버지)에 순종하느라 스스로의 생명과 삶을 파괴로 몰아넣는 등의 일이 그것이다. 아버지로 표상되는 법과 질서에 맹목적으로 순응하면서 자신의 개별적 가치를 지켜내기 위한 노력을 포기한다면, 그 삶을 자신의 것이라 말할 수 있을까.
전체주의의 망령이 휩쓸고 간 2차 세계대전 후의 유럽에서 실존주의 철학이 꽃핀 것은 우연이 아니다. 아버지들의 전쟁에서 의미없는 피를 흘려야 했던 아들들이 자신의 진정한 삶에 눈을 돌리게 된 것이다.
지금 우리 사회에 나타나고 있는 개저씨 혐오는 더 이상 아버지들에게 순종하지 않겠다는 자식들의 외침이다. 이러한 반란이 시작된 배경에는 ‘참고 따랐지만 얻어지는 게 없다’는 깨달음이 있다. 언제부터인가 아버지들의 가르침은 더 이상 통용되지 않게 되었다.
아버지의 가르침에 따라 살아왔지만 남는 것은 88만원 세대라는 이름과 갈수록 불평등해지는 사회뿐이다. 아버지들이 당연하게 누렸던 집, 결혼, 가족 등은 더 이상 자식들에게 보장된 미래가 아니다.
이제 자식들은 아버지들의 삶에서 벗어나 자신의 세상을 열어야 한다. 자식들의 반란이 성공할 것인지의 여부는 부친살해 대신 자식살해가 일반적이었던 한국문화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자식들의 마음은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다. 내가 갖지 못한 것을 가진 아버지에 대한 분노의 한켠에는 나도 아버지처럼 되고 싶다는 욕망이 함께 한다. 아버지처럼 되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현실은 자식들에게 두려움과 불안으로 다가온다. 노력에 노오력을 기울여도 도달할 수 없는 아버지라는 존재는 그렇게 부러움과 두려움을 넘어 증오의 대상이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