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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선생 Nov 07. 2018

영호는 왜 개를 싫어했나?

개가 된 자신을 발견할 때...

이창동 감독의 1999년 작 박하사탕은 한국 현대사의 거친 물결 속에 휩쓸린 한 남자의 이야기다. 영화를 잘 모르는 사람들도 설경구가 철교 위에서 “나 다시 돌아갈래!”라고 처절하게 외치는 장면은 익숙할 것이다.


주인공인 영호(설경구 분)는 구로공단에서 일하는 젊은 청년이다. 이름없는 들꽃을 찍는 사진가가 되고 싶었던, 첫사랑이 편지에 넣어 보내준 박하사탕을 하나하나 모으던 순수한 청년은 인생의 질곡을 거치며 점점 ‘개저씨’로 변해간다. 


식당 종업원의 엉덩이를 쓰다듬고, 거래처와의 통화에서 허세를 떨거나, 회사의 여사원과 바람을 피우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며 일을 핑계로 가족을 방치하는 나이든 영호의 모습은 개저씨 그 자체다. 

그런데 영호는 개를 싫어한다. 아내가 키우는 개를 걸핏하면 구박하고 걷어찬다. 개에 대한 영호의 증오는 가뜩이나 애정없는 결혼생활이 더 빨리 파국으로 치닫는 계기가 되었다. 

영호는 왜 개를 싫어했던 것일까?     


경찰시절 영호의 별명은 ‘개’였다. 영호는 민주화 운동을 하다 잡혀온 대학생들을 고문하는 경찰이었는데, 그가 취조실의 욕조 앞에서 개처럼 으르렁거리면 겁에 질린 대학생들은 울음을 터뜨리곤 했다. 


순수했던 영호가 경찰이 된 계기는 영화에서 명확히 언급되지 않는다. 아마도 군인으로서 지키지 못했던 한 생명을 경찰이 되어서 지켜내고 싶었던 건 아니었을까. 


개는 순수한 내면을 가진 영호가 사회에서 맡아야 했던 역할을 위해 뒤집어쓴 가면(페르소나)이었다. 영호에게 개는 또 다른 자신의 모습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영호의 개에 대한 미움과 증오는 곧 자신에 대한 부정이었다. 그러나 부정하고 싶어도 개는 이미 자신이 되어 버린 지 오래다. 돌이키기에는 이미 너무 멀리 와 버렸다. 


자살을 결심한 영호는 마지막으로 이혼한 아내가 사는 집에 들른다. 문도 열어주지 않고 왜 왔냐고 묻는 아내에게 영호는 ‘개가 보고 싶어서’라는 대답을 마지막으로 발걸음을 돌린다. 


개가 보고 싶어서..라는 영호의 말은 그동안 방치했던 아내에게 하는 열적은 변명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죽음을 앞두고 마지막으로 떠올랐을 가족, 그가 마지막까지 보고 싶었던 개는 가족과 함께 있는 자신의 모습이 아니었을까.


영호는 결국 이 시대를 살아온 아저씨들이다. 그들에게도 꿈이 있었고 순수한 마음이 있었다. 그러나 하루하루 힘겹게 살다보니, 살아내다 보니 예전의 순수한 청년은 어느새 추레한 개가 되어있다. 


개저씨들은 자신의 모습에 만족할까? 세상 무서울 것이 없는 개저씨들도 자기가 개라는 사실에 만족할 리는 없다.      

내면의 자아와 밖으로 드러나는 자아가 일치하지 않으면, 혹은 어떤 계기에서든지 그것을 인식하고 나면, 자아는 혼란에 빠진다. 영호는 그 혼란을 극복하지 못하고 철교에 올랐다. 자살만이 분열된 자아에 대처하는 방법이었던 것이다.


현재의 내 모습은 이제까지 내가 해 온 선택의 결과다. 영호에게도 다른 선택의 길이 없지는 않았다. 군에서 제대한 뒤 경찰이 아닌 다른 직업을 선택할 수 있었고, 원치 않는 고문을 해야 했을 때 경찰을 그만둘 수 있었다. 

그리고 자신을 기다려준 순임에게 돌아갈 수 있었고 들꽃 사진을 찍으며 살아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영호는 결국 개로 살아가는 선택을 했다. 

물론 시대의 흐름과 사회의 압력에서 개인이 주체적인 삶을 사는 것은 쉽지 않다. 현대 심리학이 밝혀냈듯이, 인간은 외부적 조건과 사회적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사람들은 내가 왜 이러는지조차 모르고 어떤 선택을 하거나 결정을 내린다. 그리고 결과와 상관없이 나중에는 그러한 선택이 옳았다는 쪽으로 정당화를 한다. 하지만 정당화를 할 수 있다고 해서 그것이 바람직한 삶이라고 할 수는 없다. 


인간이 인간일 수 있는 이유는 자신에게 주어진 외부적 조건과 상황에 순응하지 않고 스스로의 존재의미를 찾아가는 데 있다. 좋은 조건에서 괜찮게 살아가는 건 누구나 할 수 있다. 지하실에 물만 뿌려놔도 곰팡이는 잘 자란다. 열악한 조건에서 힘들게 사는 것도 의미는 좀 다르지만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실존은 그런 것이 아니다. 


실존은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것과는 거리가 있다. 멋지게 폼 나게 사는 것도 아니다. 실존은 스스로 찾아낸 살아야 하는 이유를 붙잡고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다. 


영호는 실존적 주체로서의 삶을 살지 못했고, 분열된 자아에서 비롯된 혼란을 죽음으로 마무리지을 수밖에 없었다. 자살이야말로 그가 주체로서 내린 최초이자 최후의 결정이었지만 그의 주체로서의 삶은 너무도 짧았다.      

살면서 마주쳤던 수많은 선택의 순간, 원했던 원하지 않았던, 아저씨들은 개로서 살아가는 선택을 했고 그 결과는 개저씨라는 지금의 모습이다. 그리고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었다고 스스로의 모습을 정당화하며 오늘도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다. 


개저씨들은 자신의 선택에 만족하고 있을까?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을 정당화한다고 해서 곧 현실이 만족스러워지는 것은 아니다. 진짜 뻔뻔한 일부 개저씨들이 아니고서야 자신이 개저씨로 불린다는 사실이 마음에 들 아저씨들은 없을 것이다. 


아저씨들은 지금 불안하다. 옳다고 믿어왔던 세월들이, 이제까지 정당화해왔던 자신들의 모습이 개저씨라는 이름으로 뭇사람들의 경멸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이다. 개저씨들은 혼란스럽다. 


그들은 덧없이 흘러가는 세월의 강, 이름 없는 어느 철교 위에서 “나 다시 돌아갈래!”를 외치는 중이다. 그러나 돌아가는 건 불가능하다.  TV에는 타임슬립 드라마가 흔하디 흔하지만 인류 역사상 시간을 거슬렀던 이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만에 하나 과거로 돌아간들 과거의 나는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을까?     

중요한 것은 현재이고 미래다. 인생이라는 기차는 오직 앞으로만 달린다. 내가 살아야 할 날들과 내가 함께 살아야 할 이들은 지금 그리고 여기 존재한다. 흘러가버린 과거를 붙잡고 오늘을 흘려버리는 것은 잘못 살아온 지난날에 대한 반성도 보상도 될 수 없다.


이제 다시 한번 선택의 순간이 왔다. 지금까지의 삶을 정당화하며 개저씨로 살아갈 것인가 아니면 스스로의 존재 이유를 찾을 것인가. 


기차는 코 앞까지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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