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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선생 Aug 13. 2020

일본은 왜 한국을 혐오할까?

혐한(嫌韓)의 심층심리

서점의 한 코너를 가득 채우고 있는 ‘혐한’ 서적들, 거리에서 소리 높여 외치는 혐한 시위대, 공중파를 비롯한 방송과 언론에서 연일 이어지는 한국 때리기. 혐한(嫌韓)은 부정할 수 없는 일본의 문화현상입니다. 이에 반대하는 시민들의 목소리도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러한 현상은 일본에서 꾸준히 또 반복적으로 발생하고 있습니다.

혐오라는 감정은 일본인들에게 어떤 의미를 갖고 있을까요?


혐오는 인간의 삶에 큰 영향을 끼쳐 온 감정입니다. 혐오는 구역질과 구토 등 강한 신체적 반응을 수반합니다. 혐오를 유발하는 자극은 배설물, 시체, 썩은 음식이나 벌레 등 지독한 냄새와 메스꺼움을 유발하는 외양을 지닌 대상이죠.     


우리의 사회적 관계는 혐오스러운 것을 피하려는 다양한 시도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예로부터 위생은 인간 사회의 중요한 이슈였습니다. 사람들이 사는 곳으로부터 불쾌한 물질들을 치우지 않으면 곧 벌레가 들끓거나 전염병이 돌아 사람들이 죽고 사회가 붕괴될 수 있으니까요.     


어떠한 대상에 혐오감을 느끼거나 그 대상을 취급하는 방법은 사회적 관습 속에 스며들어 있으며 대부분의 사회들은 혐오감을 주는 특정 집단이나 오염물을 지닌 사람들을 기피하도록 가르쳐 왔습니다.  따라서 혐오라는 감정 자체는 인간의 생존과 사회유지에 어느 정도 이상의 기여를 해 온 것이 사실이며 이는 현재도 마찬가지입니다.  


외설법 등을 비롯한 여러 법체계에서도 혐오는 중요한 판단의 근거로 작용하고 있지요. 이렇듯 혐오는 인간 사회에서 보편적으로 나타납니다. 하지만 배설물, 시체 등 원초적 대상에서 다른 대상으로 혐오가 확장되는 과정은 사회에 따라 상당한 차이가 있습니다. 여기가 문화가 작용하는 지점입니다.      

모기 극혐!

최근 한국사회에서도 혐오는 중요한 사회문제로 떠오르고 있는데요. 특히 벌레(蟲)라는 00충이 붙는 표현은 파리, 구더기, 모기 등 오랫동안 인간을 괴롭혀왔던 독충들에서 유래한 뿌리깊은 혐오 표현입니다.     


그러나 일본에서 나타나는 혐오와 한국에서 보이는 혐오는 본질은 같을지언정 그것이 드러나는 양상은 사뭇 달라 보입니다. 한국의 혐오가 세대, 성별, 계층, 정치적 견해를 막론하고 사방팔방 좌충우돌 표출된다고 하면 일본의 혐오는 한국이나 특정 국적의 사람들에게 향하는 모습인데요.     


이번 글에서는 혐오라는 감정에 대한 연구들을 바탕으로 한국과 일본 두 나라 사람들의 혐오에 대한 생각의 차이를 탐구해보고자 합니다.      


법철학자 윌리엄 밀러는 혐오의 핵심적 관념을 전염에 대한 생각이라 보았습니다. 역겨운 물질이 내 몸에 들어와서 나쁜 결과를 일으킬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혐오의 바탕이라는 것이죠. 독일의 문화학자 빈프리드 메닝하우스는 혐오를 타인에 대한 태도로 확장시킵니다. 쉽게 말하자면 혐오란 ‘절대 타인과 동화되기 싫다’는 생각과 연합된 감정입니다.     


사람들은 자신과 다른 이들을 구분하려는 욕구를 가지기 때문에 너무나 이질적인, 즉 자신과 너무나 다른 타인들은 혐오의 대상이 되기 쉽습니다. 그들과 가까워지거나 동화되기 싫다는 생각에서 나아가 그들이 자신을 오염시킬지 모른다는 두려움마저 갖게 되는 것이죠.     


역사상 존재한 모든 사회는 혐오와 같은 강한 감정을 통해 인간의 동물성이 드러나는 경계를 단속해 온 것이 사실입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내집단을 다른 집단과 구분하고 집단 내의 연대감을 높이는데 유용한 역할을 해 왔죠. 이것이 인간의 역사에서 혐오가 수행해 온 실질적인 기능입니다.     

혐오를 통해 사람들은 실제로 견뎌내기 어려운 삶의 문제들을 보다 잘 회피할 수 있게 됩니다. 1차대전 패전의 후유증과 경제대공황으로 어려움에 처한 독일인들을 다시 일어서게 한 것은 유대인들에 대한 혐오였고, 관동대지진의 피해로 충격에 빠진 일본인들이 눈을 돌린 것은 조선인들이었습니다.     


이제 혐오라는 감정의 본질에 좀더 다가가 보겠습니다. 심리학자 폴 로진에 따르면, 혐오는 기피(감각 요소에 의해 유발되는 부정적 반응)나 위험(해로운 결과가 예상되어 거부하는 반응)과는 다릅니다. 혐오는 우선, 당사자가 지닌 대상에 대한 인식에 따라 혐오반응을 이끌어 낼 수 있다는 점에서 단순한 기피와 구분됩니다.     


사람들에게 치즈 냄새를 맡게 하고 한 집단에는 그것이 치즈 냄새라고 말해주고 다른 집단에는 똥 냄새라고 알려주었을 때, 치즈 냄새를 맡는다고 생각한 사람들은 좋아했지만 똥 냄새라고 생각한 사람은 불쾌하다는 반응을 보였습니다. 혐오 반응을 일으킨 것은 냄새라는 물리적 자극이 아니라 사람들이 냄새에 대해 가진 인식이었던 것입니다.     

냄새 실화냐

또한 혐오는 위험과도 다릅니다. 독버섯 같은 위험한 대상은 그것을 먹지만 않는다면 같이 있어도 아무렇지도 않지만 혐오스러운 대상은 모든 위험이 제거되어도 여전히 혐오스럽습니다. 아무리 철저히 소독하고 영양분만 남겼다하더라도 선뜻 똥으로 만든 대체 음식을 드실 분은 없으실 겁니다.     


다시 말해, 감각이나 지각된 위험과는 별개로 대상에 대한 인식 자체로 혐오가 나타날 수 있다는 점인데요. 특정 대상에 대한 인식은 대개 그 사회의 문화적 배경과 깊이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대개는 교육과 학습을 통해 대대로 전승되죠.     


심리학자들에 따르면 아이들은 최소 일정한 언어능력을 획득한 이후 혐오를 경험할 수 있다고 합니다. 적어도 세 살 이전의 유아에게는 혐오가 나타나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물론 태어나면서부터 쓴 맛 등에 대한 불호는 나타납니다만 이 나이에서의 혐오는 기피나 위험(에 대한 지각)과 구분되지 않습니다.     


혐오는 네 살쯤 이후로 자리잡게 되는데요. 네 살이 되면 곧바로 완전한 혐오를 갖는 것이 아니라 부모의 신호에 반응하면서 먼저 기피를 배우게 되며, 부모와 다른 사람의 혐오를 반복해서 경험한 후에 완전한 혐오를 갖게 됩니다.      

즉 혐오란 부모와 해당 사회 구성원들로부터의 사회적 학습의 결과인 셈이죠. 혐오는 사회의 복잡한 연계망을 거쳐 다른 대상에게로 확장됩니다. 특정 대상에 대한 금기나 행위양식을 포함하는 일종의 문화적 관념 또는 문화적 태도가 형성되는 것입니다.      


일본인들이 혐오에 민감한 이유는 첫째, 일본이 안과 밖이라는 구분에 민감한 사회라는 점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혐오는 자신의 몸 안과 밖이라는 경계와 관련있는 개념인데요. 문제가 있는 더렵고 불쾌한 물질이 자신의 체내로 들어올 수 있다고 여길 때느껴지는 감정이 혐오입니다.      


자신과 관련된 것들을 안(內;우치)으로 그렇지 않은 것들을 밖(外; 소토)로 구분해 온 일본인들은 밖에 존재하는 것들에 대한 뿌리 깊은 두려움이 있는 것 같습니다. 때문에 밖에 있고 밖에서 들어오는 것들에 대한 혐오를 경험하기 쉽고 또 드러내기 쉬운 문화적 배경을 가지고 있는 것이죠.     


둘째, 혐오는 수치심의 경험과 관련됩니다. 철학자 마사 누스바움은 혐오를 원초적 수치심과 이에 대한 공격적 반응으로 규정하고 있는데요. 사람들은 자신을 높이 평가하고자 하는 자존의 욕구가 있습니다. 외부적 요인에 의해 이 욕구가 좌절되면 수치심을 느끼게 되는데 수치심은 ‘통제의 욕구’와 관련된 감정입니다.     


자신이 응당 통제해야 할 것을 통제하지 못했을 때 느끼는 감정이죠. 심리학자 에릭슨이 배변훈련이 이루어지는 시기를 ‘자율성 vs 수치’라고 명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누스바움은 사람들이 수치심을 느끼면 통제감을 회복하려는 시도로 다른 이들에 대한 폄하와 공격이 나타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루스 베네딕트가 <국화와 칼>에서 언급한 것처럼 일본은 전형적인 수치(恥;하지)의 문화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알맞는 위치(座)에서 행해야 하는 의무가 있고 주어진 의무를 다하지 못했을 때에는 수치를 느껴야 하죠.     

셋푸쿠

일본문화에서 이러한 수치심에서 벗어나는 길은 절치부심하여 명예를 되찾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이었습니다(割腹 셋푸쿠). 하지만 명예를 되찾기는 어렵고 자살은 하면 안 되니 남은 선택은 다른 이들에 대한 공격뿐입니다.


다른 이에게 공격성을 드러내는 일은 본래 일본의 문화적 규범 상 허용되지 않습니다만 ‘외집단’으로 분류되는 이들에게는 예외입니다. 밖에 있는 것들은 나쁜 것들이니까요. 이것이 일본에서 혐오가 주로 외국인들에게 표출되는 이유라고 생각됩니다.


다시말해, 일본인들은 자신 혹은 자신이 속한 내집단이 수치심을 느낄 때(통제감을 상실할 때) 다른 집단을 차별하고 혐오합니다. 그로써 잃어버렸던 통제감을 회복하고 수치심에서 벗어나려는 것이죠.


버블 붕괴 이후 침체된 경제, 아직 복구되지 않은 대지진의 여파, 후쿠시마 방사능, 얕보기만 했던 한국의 약진.. 아마도 당분간, 일본의 혐한은 계속되리라 생각됩니다. 그들이 달리 통제감을 회복할 방법이 마땅치 않아보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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