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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선생 Aug 30. 2020

이지메(いじめ)의 심층심리

일본인들은 왜 이지메를 할까?

코로나가 전세계적 유행(팬데믹) 단계로 접어들면서 코로나에 반응하는 각국의 문화적 방식이 두드러지고 있습니다. 코로나 사태는 이제껏 경험한 적 없는 위기입니다. 위기는 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들죠. 불안한 사람들은 문화적으로 자신들에게 익숙한 방식으로 불안에 대처하려 합니다.

이 글에서는 일본의 경우에 대해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코로나가 확산 중인 일본에서는 확진자들을 따돌리거나 확진자가 거주하는 집에 낙서를 하고 돌을 던지거나 그 가족들까지 괴롭히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데요. 최전방에서 코로나에 대처하고 있는 의료진과 그들의 가족에게까지 행해지고 있는 이러한 현상은 이지메(いじめ)라는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말로 왕따나 집단 따돌림으로 옮겨지는 이지메는 에도시대의 촌락공동체에서 행해지던 무라하치부(村八分)에 뿌리를 두고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요. 무라하치부란 마을 사람들이 힘을 모아야 하는 10개의 항목(탄생, 성인, 결혼, 사망, 제사, 화재, 수해, 질병, 여행, 건축공사) 중 화재와 장례 두 개만 빼고 나머지 8개의 일에 대해서는 따돌리는 것을 뜻합니다.     

잦은 전쟁과 지진, 쓰나미 등의 천재지변으로 강력한 응집력을 필요로 했던 일본의 촌락공동체는 이를 유지하기 위해 엄격한 규범체계를 확립하게 되었는데, 마을의 규범을 어긴 이들을 촌락 내에서 처벌하던 것이 바로 무라하치부입니다.     


우리는 이지메를 주로 학교폭력과 관계된 맥락에서 이해하고 있습니다만, ‘공동체의 규범을 어긴 이들을 응징한다’는 의미의 이지메는 일본사회 전반에서 매우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문화적 현상이라 할 수 있는데요.   

  

일본 문화에서 이지메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사회학자 나이토 아사오의 <이지메의 구조>에 따르면, 이지메의 기능은 ‘타인 조종에 의한 전능’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타인을 마음대로 조종함으로써 전능감을 느끼려는 것이죠.      

통제감의 욕구(need for control)는 인간의 가장 기본적 욕구 중 하나입니다. 삶에 대한 통제는 자신이 마음먹은 대로, 제 뜻대로 삶을 살 수 있느냐를 좌우하는 중요한 요소죠. 자존감과 행복의 결정요인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아주 어린 아이도 제 몸을 가눌 수 있는 정도만 되면 통제감을 확보하려 합니다. 정신역동이론가 에릭슨이 말한 ‘자율성 대 수치’의 시기입니다. 아이들의 통제감의 욕구는 프로이트도 강조한 배변훈련을 통해 충족되는데요.      

에릭슨

이 시기에 배변과정을 통제하는 부모의 양육태도에 따라 아이가 경험하는 통제감의 수준에 차이가 발생하게 됩니다. 물론 배변통제는 가장 기본적인 통제행위에 해당하구요. 두 세살 난 아이들이 하기 시작하는 “내가 할꺼야!!”의 대환장파티가 바로 이 과정이라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이 경우, 부모의 개입은 자율과 통제라는 두 축으로 이루어지는데요. 아이의 욕구를 우선하는 부모는 아이의 요구를 충분히 받아주면서 스스로 통제할 수 있게 도와주려 할 것이고, 통제를 우선하는 부모는 규범과 원칙을 강조하며 아이의 욕구는 등한시할 것입니다.      

적절한 통제감을 경험한 아이는 스스로의 행위를 잘 조절해 나가겠지만 그렇지 못한 아이는 자신이 통제감을 갖는 상황을 두려워하거나 통제감을 경험할 수 있는 다른 방법들에 집착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따라서 정신역동이론에서는 강박적 성격을 항문기 고착적 성격으로 봅니다.     


앞선 글들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일본은 아이들에 대한 상당히 엄격한 훈육을 강조하는 문화입니다. 그리고 남들에게 폐를 끼쳐서는 안된다는 메이와쿠나 세상에 대한 기리(義理)와 같은 사회적 규범들이 일상에 폭넓게 작용하고 있죠.      


일본인들의 삶은 보육원(어린이집), 유치원 때부터 모든 것들이 규격화되어 있습니다. 손수건, 기저귀까지 이름 쓰는 곳이 정해져 있을 정도입니다. 명문화된 규칙 외에도 지역사회, 학교, 직장마다 보이지 않는 룰들도 많습니다. 그런 규칙들을 어겼다간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 정도로 끝나지 않는다는 사실도 꾸준히 학습하게 되겠죠.  

한마디로 개인이 자신의 삶에서 통제감을 경험하기 어려운 문화입니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말이죠. 그러나 통제감의 욕구는 인간의 가장 중요한 욕구 중 하나입니다. 그리고, 기본적 욕구의 결핍은 부정적 결과를 초래할 수 있습니다.      


목이 마른데 물을 마시지 않거나 졸린데 잠을 자지 않는다고 그 욕구들이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시간이 흐른 뒤에 곱절로 물을 마시거나 자지 않은 이상의 시간을 자야하죠. 욕구가 충족되지 않는 동안, 사람의 주의는 온통 채워지지 않은 욕구에 사로잡히기 마련입니다.     


제가 생각하는 일본 이지메의 본질은 결핍된 통제 욕구의 추구입니다. 통제감이 결핍된 사람들은 대개 강박적으로 주변을 정리하거나 많은 규칙을 만들어 그것을 지킴으로써 통제감을 충족하게 됩니다. 소위 강박적 성격이라 불리는 성격 유형입니다.     


그리고 누군가 그러한 규칙을 따르지 않는 것을 보면 통제감을 상실하면서 분노를 경험하게 되죠. 이지메 가해자에게서 자주 나타나는 피해의식과 증오의 이유가 이것입니다. “네가 내 맘대로 움직여주지 않아서 내 세계가 무너져 버렸다”, “내 세계를 엉망으로 만든 네가 나쁘다. 그런 너를 가만두지 않겠다.”      

이지메에서는 이런 심리적 메커니즘에 의해서 규칙을 위반한 이들에 대한 응징이 정당화됩니다. 그들을 처벌하고 응징함으로써 자신의 통제감(전능감)을 극대화하는 것이죠. 주변에 있는 이들 역시 집단에 순응하면서 통제감과 더불어 안정감을 느낍니다.


집단에서 이지메가 발생하면 구성원들은 이지메에 동참할 것을 암묵적으로 강요받는데, 이들은 억지로 동참할지언정 겉으로는 즐거운 듯 보여야 합니다. 집단에 기쁘게 동조하지 않는다는 것은 곧 그들이 피해자와 같은 입장이라는 것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랬다간 자신도 당장에 이지메의 대상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이지메에 가담하게 되는 것이죠.     


이지메는 그 대상이 되는 피해자들의 심리구조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나이토 아사오는 이지메의 피해자들은 ‘아무리 맞아도 무쇠처럼 굳세게 견딘다’는 헛된 전능 속에서 살아간다고 분석합니다. 피해자들 역시 이지메를 통해 삶에 대한 통제감을 경험하는 셈입니다.      

뜨겁게 지져봐~ 절대 꼼짝않고 나는 버텨낼테니까~
일본인들이 드라마 <이태원 클라쓰>에 열광하는 지점은 우리와 조금 다를 수 있습니다.


이렇게 강인해졌다고 자부하는 피해자는 현실의 비참함을 부정합니다. 현실이 비참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결국 자신의 존재 이유를 부정하는 꼴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거짓 강인함(가짜 통제감)을 구현하려면 현실의 비참한 자신을 끊임없이 부인하고 부정해야 합니다.


한편, 이지메에서 나타나는 신체적 힘(폭력)을 통한 정체성의 확인, 집단에의 동일시 등은 청소년기의 주요한 행동 특성입니다. 변화하는 신체적 능력과 사회적 역할 사이에서 정체성 혼란을 느끼는 청소년들이 그나마 타인과 구분되는 신체적 우월성으로 스스로의 자아상을 확인하거나 우월한 집단에 소속됨으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확보하려 하는 것이죠.     


이러한 모습들이 일본의 주요한 문화적 유형으로 나타난다는 것은 일본의 개인들이 끊임없이 정체성 혼란이라는 갈등에 노출되어 있거나 또는 정체성 확립이라는 욕구에 고착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해석할 수도 있겠습니다.


아마도, 스스로의 정체성을 통제감의 원천으로서의 자신이 아닌, 자신이 수행해야 하는 사회적 역할에서 찾아야 하는 일본 문화의 속성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일본인들의 '사회적 역할'에 대한 생각은 제 다른 글을 참고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일본인의 하지와 한국인의 부끄러움: https://brunch.co.kr/@onestepculture/3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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