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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선생 Jul 23. 2017

갑질의 문화심리학

만인의, 만인에 의한, 만인에 대한 갑질

갑질이란 갑(甲)+질의 합성어로 양자의 사회적 지위에서 기인한 불평등한 권력관계를 일컫는 말입니다. 단순히 계약의 양 당사자를 일컫는 말인 갑(甲)과 을(乙)이 불평등한 권력관계를 나타내는 말로 사용된다는 것은 거기에 한국적인 어떤 것이 작용했기 때문이겠지요.


갑질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커지기 시작한 것은 2014년 말, 이른바 '땅콩회항' 사건부터입니다. 기내 서비스로 제공되는 땅콩을 까서 주지 않았다는 이유로 해당 항공사 오너의 딸이자 이사인 조모씨가 비행기의 이륙을 막았던 사건이죠. 

사람들은 '땅콩을 안 까줬다고' 승무원들에게 고함을 치고 그것이 규정에 어긋나지 않음을 설명하는 사무장을 비행기에서 쫓아내버린 행태에 경악했고, 그러기 위해 수백명이 타고 있는 항공기를 예정된 스케쥴과 관계없이 마음대로 돌릴 수 있다는 그 마인드에 기가 막혔습니다. 


사실 이 사건은 대한민국에서 종종 일어나는 '갑질' 중의 하나입니다. 땅콩회항 전에도 전국적인 관심을 받았던 남양유업의 '밀어내기' 갑질사건, 포스코의 '라면상무' 등의 사건이 있었고, 지금 이 시점에도 미스터피자의 갑질이나 종근당의 운전기사에 대한 막말 등이 대기업 갑질의 계보를 잇고 있습니다.


최근 갑질에 대한 사회의 분위기가 바뀌고 있습니다. 특히 하청업체에 대한 갑질이나 프랜차이즈 업체의 가맹점에 대한 갑질 등 대기업들의 횡포에 대해 공정거래위원회가 제재를 가하면서 갑질에 대한 경계심이 확산되는 듯 한데요. 그동안 가만히 있었던 을들도 이제는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갑질은 점점 사라지고 우리나라는 좋은 나라가 되는 것일까요?


물론 그래야겠습니다만 현실은 그렇게 이상적이지만은 않습니다. 갑질은 대기업의 전유물만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대기업 관계자나 부유층의 갑질은 종종 언론에 보도되지만, 우리 삶에 훨씬 더 가까운 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수많은 갑질들은 보도조차 되고 있지 않습니다. 

갑질의 본질은 '자신의 우월한 지위를 바탕으로 상대방에게 부당한 일들을 강요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갑질은 한국사회의 거의 모든 대인관계에서 나타납니다. 직장에서 상사가 후임에게, 선배가 후배에게, 연장자가 나이 어린 사람들에게.. 갑질은 대상과 맥락,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만인의, 만인에 의한, 만인에 대한 갑질이라는 말이 떠오를 지경인데요.


심지어 대기업의 갑질에 분노하던 을들이 자신보다 사회적 지위가 낮은 이들에게는 갑의 위치에서 갑질을 하는 모순된 장면도 심심치 않게 나타납니다. 이러한 모순을 제대로 인식하고 해결하지 않는다면 갑질을 근절하기 위한 어떠한 노력도 실패로 돌아갈 것입니다. 



그렇다면, 한국사회에서 갑질은 왜 나타나는 것일까요? 그리고 갑질이 진정 사라지려면 어떤 일들이 선행되어야 할까요?


최근 수행된 갈등해결방식의 문화차에 대한 연구에 따르면, 한국인들은 '지배'와 '양보'라는 갈등해결방식을 주로 사용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갈등해결방식은 갈등 자체에서 멀어지고자 하는 '회피', 상대를 억누르고 자신의 요구사항을 관철시키려는 '지배', 자신의 요구를 접고 상대의 요구에 순응하는 '양보', 서로가 만족할 수 있는 차선책을 찾는 '타협',  상대방을 만족시키면서도 자신의 요구를 극대화하는 '통합'으로 구분되는데요.


'지배'와 '양보'라는 한국인들의 갈등해결방식은 개인의 욕구와 지향을 중시하는 개인주의 문화에서는 회피나 지배가, 집단 내의 조화를 중시하는 집단주의 문화에서는 '양보'와 '타협' 등이 우세할 것이라는 예상과는 동떨어진 결과입니다.


한국인의 '지배' 점수는 개인주의 문화의 대표라 할 수 있는 미국보다도 높고, '양보'의 점수는 집단주의 문화의 대표라 할 수 있는 일본보다 높았습니다. 이 결과는 개인주의 vs 집단주의의 틀로는 설명이 안 되는 현상으로, 보다 한국적인 문화적 요소가 개입되어 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한국인이 주로 사용하는 '지배'와 '양보'라는 갈등해결방식은 갑질의 특성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자신보다 사회적 지위가 낮은 상대에게는 '지배'를, 자신보다 지위가 높다고 생각되는 상대에게는 '양보'를 사용하는 것이죠. 지배와 양보는 서로 이질적인 성격인 듯 하지만 '상대방의 지위'가 이 둘 사이를 조절한다고 보면 충분히 나타날 수 있는 유형의 갈등해결방식입니다. 


이러한 행위의 경향성을 '권위주의적'이라고 합니다. 심리학에서 권위주의란 상대의 권위에 따라 자신의 행위양식이 달라진다는 의미를 갖는데요. 권위주의적인 사람들은 권위가 시작되는, 상대방의 지위에 관심을 갖고 그 지위로 상대방과 나의 위치가 파악되는 순간 상대방에게 하게 될 행동의 종류와 범위를 결정합니다.


쉬운 말로 하면, 권위주의적 문화를 만드는 것은 '지위가 곧 그 사람'이라는 생각입니다. 중국이나 우리나라처럼 오랜 관료제도의 역사를 갖고 있는 나라들에서 많이 나타나는 생각인데요. 영국이나 프랑스 같은 개인주의 문화의 나라에서도 종종 발견되는 태도입니다.


이런 사회에서 어떤 사람의 지위란 그 사람의 인품과 능력, 그 지위를 가질 자격을 포함하는 개념입니다.  따라서 지위가 높은 사람은 그에 걸맞는 권위를 갖게 되고 다른 이들은 그 권위에 복종해야 하는 것이죠. 반대로 지위가 낮은 사람은 역시 그럴 만 하니까 그렇다..는 생각으로 대하게 되는 것입니다.


신분제와 장유유서 등의 유교적 질서, 그리고 일제강점기, 군부독재 등의 권위주의 시대를 거치며 한국인들은 권위주의적 행위양식을 내면화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 행위양식은 상대방과 나의 지위 차이가 인식되는 순간 자동으로 활성화됩니다. 특히 갑질은 자신이 권력과 지위를 갖는 순간 드러날 가능성이 큽니다. 

이런 분이 하는 것만 갑질은 아닙니다

따라서 문화심리학의 관점에서 정의한 갑질은, 한국의 문화적 갈등해결방식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말은, 한국사회에서 갑질이 결코 일부 대기업이나 부유층의 문제가 아니라 갈등이 있는 곳이라면 누구에게나 어디에서든 나타날 수 있는 문화적 행위양식이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갑질에는 남녀노소가 없다는 말이죠.


그러나 갑질이 문화적 행위양식이라는 사실이 갑질을 정당화하거나 '한국은 어쩔 수 없다'는 결론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문화는 그것이 더이상 현실의 삶과 일치하지 않을 때 변화하며, 현재의 한국인들은 더이상 갑질을 받아들이지 않으며 또 그것이 정당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최근 두드러지고 있는 갑질에 대한 관심과 소위 '을들의 반란'들이 그 증거죠.


갑질은 권위주의적 사회 분위기 속에서 오랜 시간동안 유형화된 한국적 행위양식입니다.  이러한 갑질의 본질은 한국사회에서 갑질이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임을 시사합니다. 갑질을 없애기 위해서는 공정거래위원회의 제재도 물론 중요하겠지만, 우리의 삶 속에 파고든 권위주의적 행위양식이 곧 '갑질의 근본'이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나이, 지위, 돈, 권력, 경험이 많다고 상대에게 함부로 해도 된다는 그런 사고방식 말씀입니다. 나도 언젠가 누구에게 갑질을 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자신의 행위를 되돌아보고, 상대의 지위와 관계없이 상호존중에 기초한 수평적 관계를 바로세우는 것이 우리 사회의 갑질을 없앨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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