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적 개념의 보편성에 대하여
플로우, 그릿, 스눕, 패션(passion), mindfulness, 휘게
행복연구 분야에는 이런 개념들을 흔히 볼 수 있다. 서점 한구석에 확고하게 자리잡은 ‘행복’ 코너에는 이런 종류의 책들이 가득하다. 독자 여러분께서도 많이 보셨을 테고 몇몇 분들은 책장에 꽂혀있기도 할 것이다. 우리가 이런 책들을 사서 보는 이유는 당연히 행복해지기 위해서다.
간단하게 개념들의 뜻을 살펴보면, flow는 물 흐르듯이(flow) 자연스럽게 뭔가에 집중하는 경험을 의미한다. 시카고 대학교의 칙센미하이가 제안한 개념으로 긍정심리학의 대표적 연구주제다. 그릿Grit은 긍정심리학의 아버지 마틴 셀리그먼의 제자이자 펜실베니아 대학교 심리학과 교수 엔젤라 더크워스가 밀고 있는 개념으로 자신이 세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열정을 갖고 온갖 어려움을 극복하며 지속적인 노력을 기울일 수 있게 해주는 마음의 근력을 의미한다.
스눕은 텍사스 대학교 심리학과 샘 고슬링이 개념화했는데, 누군가의 소지품, 책상의 정리상태 등 비언어적 단서를 가지고 상대를 꿰뚫어보는 힘을 말한다. 흔히 열정이라 번역되는 패션은 고통을 뜻하는 라틴어 passio에서 왔다. 이 용어가 프랑스를 거쳐 영어로 오면서 연인들의 사랑을 의미하는 말로 바뀌었다. 연인들의 불같은 사랑은 때로 격렬한 고통마저 동반하기 때문이다.
mindfulness는 마음챙김이라는 어색한 용어로 번역하고 있는데 불교의 수련방법인 명상이 사람들의 스트레스를 줄이고 창의력 증진, 정신력 강화 등에 도움이 된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긍정심리학 계열에서 각광을 받고 있는 주제다. 우리가 마음공부, 수양, 수련 등으로 표현하는 명상의 이유를 영어로 옮긴 것이 mindfulness다. 마지막으로 휘게는 요즘 한창 유행하는 북유럽의 라이프 스타일로 편안하고 소박한 즐거움을 의미한다.
행복해지기 위해 이런 것들이 필요하다는 이야기인데 이쯤 해서 드는 의문이 있다. 우리가 그런 것들을 몰랐었나? 플로우는 몰입으로 번역된다. 우리말에도 ‘물 흐르듯’이라는 표현이 있지만 이 경우는 ‘순리에 따르는’에 가까운 뜻이기 때문에 ‘몰입’으로 옮기고 있다.
그릿의 원뜻은 돌 같은 것이 마찰될 때 나는 뿌드득(빠드득, 까드득) 소리다. 여기서 빠드득 이를 악물면서 뭔가를 해내는 ‘기개’, ‘배짱’ 등의 뜻이 파생된 것이다. 우리말도 비슷한 뜻이 있다. 기개, 배짱도 뜻이 닿지만 이를 악물고라는 점에서 ‘오기’가 적당해 보인다.
스눕(snoop)의 원뜻은 ‘기웃거리다’, ‘꼬치꼬치 캐묻다’, ‘~을 찾아다니다’다. 기웃거리며 뭔가를 찾아다닌다는 의미에서 탐정, 스파이라는 뜻이 나온다. 이런 사람을 우리는 ‘눈치 빠른 사람’이라고 한다. 즉 스눕은 눈치다. 패션은 말 그대로 열정, 무언가를 위해 고통마저 감수하는 강한 에너지이고, 마인드풀니스는 마음수양, 휘게는 안빈낙도(安貧樂道)라 할 수 있다.
그동안 우리는 그동안 몰입할 줄을 몰라서 불행했던가? 눈치가 없고 끈기가 없어서 성공하지 못했으며, 명상을 몰라서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열정이 없어서 삶이 지루하다고 느꼈던가? 고등학교 교과서에도 나오는 안빈낙도를 몰라서 매일 돈돈거리며 사느냔 말이다.
물론 문화적 배경이 다른 개념을 옮기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떡이 rice cake이 아니고 도토리묵이 acorn jelly가 아닌 것처럼. 그러나 플로우나 그릿, 스눕, 패션 등은 몰입, 끈기, 눈치, 열정으로 바꿔도 충분히 뜻이 통한다. 심지어 마인드풀니스는 우리가 가진 개념을 번역한 용어를 다시 들여온 것이다.
이게 무슨 서쪽의 웨스트에서 불어오는 바람의 윈드를 맞으며 운명의 데스티니와 마주하는 상황인가.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이유는 우리에게는 뭔가 좋은 것이 나올 수 없다는 생각 때문이다. 우리에게 있는 것들은 다 후지고 버려야 할 것들이니 지금보다 더 나아지기 위해서는 밖에서 답을 찾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런 생각은 가깝게는 구한말 들어온 사회진화론적 세계관으로부터일 가능성이 크다. '진화하지 못해서' 나라를 잃었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은 우리나라의 모든 것들을 서양에 비해 낙후되었다고 생각했다. 우리말도 마찬가지다.
광복 이후, 미국이 우리나라에서 세계의 표준(standard)으로 자리매김하면서 이같은 경향은 더 심화되었다. 우리는 같은 대상이라도 한국어로 말하면 왠지 촌스럽고 후진 느낌을, 영어로 말하면 세련되고 있어 보이는 느낌을 받는다. 마늘은 입냄새 날 거 같고 갈릭은 향긋할 거 같은 그런 느낌 말이다.
이런 예는 한 둘이 아니다. 이러한 습관의 기원은 조선시대 이전으로 올라간다. 양반들은 한글을 언문, 암클이라 무시하고 일상 생활에서도 어려운 한자말을 섞어쓰며 자신들의 권위를 과시했다. 작금의 지식인들이 방송에서 영어를 섞어쓰며 자신들의 권위를 과시하는 것처럼. 특히 '있어보이고 싶은' 욕구가 절정에 이르는 패션계의 언어는 정말이지 가관인데 최근에는 ‘보그병X체’라는 하나의 장르로 자리잡기까지 했다. 나도 가방끈 깨나 늘린 사람이지만 학계의 언어도 크게 다르지 않다. 행복은 왜 해피니스라고 안 하는지 모를 지경이다.
누군가는 플로우나 그릿 연구의 결과들을 참고하면 몰입과 오기 같은 것들을 실생활에서 보다 잘 적용할 수 있지 않겠느냐고 말할지 모른다. 몰입이나 오기는 일상적인 개념이지만 플로우나 그릿 같은 것들은 학자들이 연구한 개념이기 때문에 더 잘 체계화되어 있을 테니 말이다. 맞는 말이다.
그런데 왜 우리는 몰입이나 오기, 눈치는 연구를 안했을까? 오죽하면 명상에 대한 연구가 하나도 없어서 외국에서 연구한 걸 다시 마인드풀니스라고 따로 배우고 있는 현실이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도 모르면서 모르는 것을 갖겠다고 나서는 꼴이다.
그렇게 해서 행복해지는 사람들은 책 팔아서 돈 버는 이들과 무슨 프로그램 만들어서 연수과정 같은 거 돌리는 사람들 뿐이다.
우리가 지금 휘게를 몰라서 불행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