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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선생 Dec 28. 2020

방으로 들어가는 히키코모리 vs 산으로 들어가는 자연인

일본인과 한국인의 세상에서 멀어지는 방법

사회생활을 거부하고 장기간 집안에만 틀어박혀 있는 사람을 일컫는 ‘히키코모리’는 일본의 대표적인 사회 현상입니다. 히키코모리는 1970년대부터 일본 사회에 나타나기 시작했으며, 경기침체가 시작된 1990년대 초부터 심각한 사회 문제로 떠올랐습니다. 2019년 내각부 통계에 따르면, 일본의 히키코모리는 120만 명으로 일본 인구의 1%에 해당합니다.      


히키코모리는 대개 10 , 후반에 시작되는데, 이들은 히키코모리 상태에서 나이가 들어 중년에 이르기도 합니다.  시점의 히키코모리들  중년(40-64) 절반이 넘는 61만명으로 추산되는데요.  30 전에 히키코모리 생활을 시작한 청소년들이 이제는 중년이  것이라   있겠습니다.     

일본의 히키코모리

히키코모리의 원인으로는 극심한 경쟁 사회에 대한 두려움, 학교나 회사에서 느끼는 고립감, 집단따돌림이나 괴롭힘의 경험, 가족간의 관계에서 받는 상처, 지나친 부모 의존, 심각한 자신감의 결여로 인한 자해적 심리상태 등이 꼽힙니다.      


히키코모리가 나타나기 시작한 1990년대는 버블붕괴 이후, 본격적인 경기침체가 시작되던 시점이었습니다. 미국 워싱턴 포스트는 장기적인 경기침체 이후 고도성장을 지탱해온 세대와 그렇지 못한 세대간의 적응력 차이가 히키코모리라는 사회 현상으로 나타났다고 진단합니다.     


그 외에도 민폐를 끼쳐서는 안된다는 ‘메이와쿠’ 문화, 사람은 자신에게 주어진 직분에 충실해야 하며 이를 다하지 못할 경우를 수치로 받아들이는 분위기, 일본 특유의 집단 따돌림 ‘이지메’, 개인적 감정 표현을 제한하는 사회적 분위기 등이 히키코모리들을 만들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우리나라에도 이런 이들이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은둔형 외톨이’라는 이름을 쓰지요. 취업난 등 사회에서 받는 상처가 많아지고 인터넷, 스마트폰 등 굳이 밖에 나가지 않아도 불편함을 느끼지 않게 됨에 따라 한국에도 ‘은둔형 외톨이’가 늘어나고 있다는데요.      


하지만 아직 우리나라에서 은둔형 외톨이는 심각한 사회문제로 받아들여지는 분위기는 아닌 듯 합니다. 우리나라의 '은둔형 외톨이'는 30만명으로 추산되지만 공식 통계는 없는 실정입니다. 질적인 측면에서도 일본과의 차이는 드러납니다.     


히키코모리 연구자 여인중 동남정신과 원장은 ‘일본 히키코모리가 에스프레소라면 한국 은둔형 외톨이는 카페라테’라고 표현하고 있는데요. 그 빈도나 증상의 심각성 면에서 일본의 히키코모리가 더 심하다는 뜻일 터입니다.      


무라카미 류의 소설 ‘지상에서의 마지막 가족’에는 사회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히키코모리가 된 아들 히데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히데키는 학교와 직장에서 상처를 받고 방에 틀어박히는데 소설에 묘사된 그의 말과 행동에서 히키코모리들의 심리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김씨표류기>의 여자 김씨

그는 외부와의 접촉을 차단한 채 생활합니다. 햇빛이 창으로 들어오는 것도 싫어서 검은 종이로 창문을 가려놓은 상태입니다. 그의 유일한 취미이자 활동은 가려놓은 창문에 조금 뚫어놓은 렌즈 구멍으로 찍는 사진입니다.      

필름을 사거나 사진을 현상하기 위해 잠깐이라도 밖에 나갈 때면 자신의 몸에서 불쾌한 냄새가 날까봐 몇 번씩 샤워를 하고도 인적이 드문 한밤이 되어서야 집을 나섭니다. 그 외의 시간에는 자신의 방에서 한 발짝도 나오지 않고 식사도 어머니가 방으로 가져다 줍니다. 그가 가족과 나누는 소통은 다음 끼니에는 무슨 반찬을 달라는 쪽지가 전부입니다.     


제가 인상적으로 기억하는 대목은 히데키의 자기 인식이었습니다. 그는 히키코모리가 된 자신을 가족을 비롯한 다른 이들에게 민폐를 끼치는 존재라는 생각으로 괴로워합니다. 이런 생각은 영화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에서도 나타나는데요.     


가족에게 버림받고 평생 자신을 사랑해줄 사람을 찾다가 끝내 실패한 마츠코는 결국 히키코모리가 됩니다. 날로 정신이 피폐해져가던 마츠코는 어느날 환각 속에서 미친 듯이 벽에 ‘태어나서 죄송합니다’라는 글자를 새깁니다.     

‘태어나서 죄송합니다’란 일본 작가 다자이 오사무의 단편 ‘20세기 기수’에 나오는 표현입니다. 다자이 오사무의 환생이라는 평을 받던 마츠코의 첫 번째 애인 테츠야는 이 말을 남기고 마츠코가 보는 앞에서 기차에 치어 자살합니다.      


거듭된 사랑의 실패에 절망한 마츠코의 선택은 히키코모리 생활이었고 자신의 삶이 그렇게 된 이유를 ‘내가 태어났기 때문’이라는 마츠코의 절망어린 몸부림이 먹먹하게 다가왔던 장면이었습니다.      


바로 이 점이 일본 히키코모리들과 한국 은둔형 외톨이를 나누는
중요한 기준입니다.


사회생활에서 상처를 받고 자신만의 공간으로 숨는 이들이 있는 것은 문화 보편적인 현상입니다. 더 상처를 받는 것을 피하고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행동이죠. 그러나 이는 한국인들에게 일반적인 행동은 아닙니다. 나를 상처 준 사람을 원망하고 나를 이렇게 만든 사회에 분노할지언정 말이죠.      


엄밀히 말하자면, 한국인들도 도저히 어쩔 수 없는 상처는 자신의 탓으로 돌립니다. 한(恨)입니다. 한은 자신이 경험한 부정적 사건의 원인을 스스로에게 돌려 격렬한 분노와 관계의 손상 등 부정적 결과에서 벗어나려는 한국인들의 정신적 방어기제라 할 수 있는데요.      


그러나 똑같이 자기 탓을 한다고 해도 한의 경우는 다릅니다. 한은 일이 이렇게 된 이유를 나의 ‘존재’로 귀인하지는 않습니다. 대신 나의 ‘능력이나 노력 부족’ 같은 통제 가능한 영역으로 귀인하죠. 그래서 상황을 바꾸기 위한 노력이 시작되고 많은 경우에 실제로 상황을 개선하는 결과로 이어집니다. 문제는 아무리 노력해도 상황이 바뀌지 않을 때입니다. 더이상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느껴질 때죠.     


이때도 한국인들은 일본인들과는 다른 방법을 취하는 듯합니다. 자신의 방에 틀어박히는 것이 아니라 산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떠오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연인’입니다. 중년의 <나혼자 산다>로 불리는 <나는 자연인이다>에 나오는 분들이죠.      

레전드 자연인, 말벌 아저씨..

이들은 사업의 실패, 배우자의 사망, 지인의 배신 등 나름의 상처를 갖고 산으로 들어가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자식들 다 키우고 직장에서 은퇴하고 해야 할 일을 다 마친 분들도 많습니다.      


이들은 산 생활에서 자유를 느낀다고 이야기합니다. 산에서는 더 이상 세상일과 세상 사람들에 얽매일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자연인들이 산으로 들어가는 이유입니다. ‘들어간다’라는 말을 썼지만 히키코모리가 방으로 ‘들어가는’ 것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산으로 들어간다기보다는 집을 나간다고 해야 할까요.     


히키코모리와 마찬가지로 외톨이 생활이지만 자연인의 삶은 다릅니다. 그들은 산 속에서 자연과 계절의 흐름을 온 몸으로 느끼며 자신이 먹고 살 것들을 마련합니다. 더이상 할 수 있는 일이 없어 산으로 들어온 이들은 산에서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으며 삶의 이유를 찾아내는 듯합니다.     


시청률이 높다는 것은 그런 욕구가 있다는 것을 방증합니다. 사는 건 고되고 누구나 가슴에 상처 하나쯤은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실제로 산으로 떠나는 이들은 많지 않습니다. 그들에게는 아직 해야 할 일들이 남아 있고 할 수 있는 일들이 있기 때문이죠.      


청소년기에 방으로 틀어박히는 히키코모리들과는 달리 자연인들이 산으로 들어가는 나이가 대개 중년 이후인 것은 이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우리가 마음에 상처를 받을 때마다 다 산으로 들어갔다면 이미 우리나라 산들은 연령 불문하고 자연인들로 넘쳐났을 테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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