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분법적 사고의 기원
이분법적 사고는 현대 한국인들을 묘사하는 키워드 중 하나입니다. 모든 것을 선과 악, 우리편과 적으로 나누는 흑백논리는 남과 북, 빈자와 부자, 노와 사, 남과 여, 청년과 노인, 윗집과 아랫집 등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곳에서 사회의 분열과 갈등을 심화하고 있는 듯한데요.
많은 석학들이 이러한 현상을 우려하고 나름의 대책을 고민하지만 한국사회의 갈등은 점점 깊어지는 것 같습니다. 도대체 이유가 뭘까요? 일부 사람들이 이야기하듯이 한국인들이 '원래 화합을 하지 못하고 분열하기 좋아하는 민족'이기 때문일까요?
물론 한국인들이 가진 심리적 속성에도 대립과 갈등을 촉진하는 뭔가가 있을 수 있겠죠. 그것도 언젠가 한번 다루겠습니다. 하지만 제가 이번 글에서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보다 근본적인 이유입니다.
이분법적 사고는 우선적으로 우리의 역사에 뿌리를 두고 있다 하겠습니다. 36년간의 일제강점기 이후 해방된 우리나라는 강대국들의 이해에 의해 분단되었고 서로 다른 사상을 가진 세력들에 의해 동족상잔의 전쟁 및 분단 고착화라는 비극을 맞게 됩니다.
그 후로 우리는 우리편 아니면 적이라는 구분이 중요해졌고 그러한 구분을 내면화하지 않으면 생명을 위협받는 시대를 살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물론 그런 시대가 아닙니다만 수십년에 걸쳐 학습되고 강화된 태도는 이미 우리의 무의식 차원에서 자동적으로 작용하게 되었습니다.
한국의 역사적 특수성 외의 또 하나의 이유를 저는 유럽의 역사에서 찾았습니다. 분단과 그 이후의 대립이 역사적 원인이라면 이는 보다 보편적인 원인입니다.
여러분, 마녀사냥이 가장 극심하게 벌어졌던 시기를 아십니까? 많은 이들이 인류가 보다 '미개했던' 중세 초기, 예를 들어 12, 13세기 쯤일거라 생각하지만 사실 마녀사냥은 17세기에 가장 성행했습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명제로 근대의 서막을 열었다는 데카르트(1596~1650) 이후에 말이죠.
이게 웬일입니까. 근대라면 이성(理性)의 발견으로 복종의 대상이었던 자연을 정복하고 문명을 발전시켜 인간이 역사의 주체로 우뚝 서기 시작한 그 시기 아닙니까. 이성과 합리의 시대에 마녀사냥이라니요.
이같은 아이러니는 시대가 바뀌는 시기 사람들의 욕구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쉽게 말씀드리자면, 이성이 강조되는 새 시대가 열리니 과거는 그에 대비되는 개념(예를 들면, 광기(狂氣))으로 규정하는 것이죠. 지금의 나를 과거의 나와 구별하는 방법이자 과거를 나쁜 것으로 만들어 현시대를 높이려는 시도라 할 수 있습니다.
프랑스의 철학자 미셸 푸코의 <광기의 역사>에는, 이성의 발견과 함께 과거의 전통과 유산들이 비이성, 즉 광기의 역사로 규정되면서 벌어졌던 일들이 잘 묘사되고 있습니다. 뜬금없는 것처럼 보이는 17세기의 마녀사냥 역시 이러한 배경에서 일어난 일들 중 하나입니다.
이어지는 18세기를 계몽주의 시대라고 하는데 계몽주의의 영어enlightment란 빛을 비추다는 뜻입니다. 비이성의 시대를 어둠으로 보고 그 어둠을 밝히려는 시도를 enlightment라 칭한 것이죠. 기존의 질서(신神 중심의)가 사라진 세계는 어둡기는 했지만 한편으로 무한한 가능성이 열려 있었습니다.
사상가들은 나름의 지혜를 짜내어 새로운 세상을 설계하고 자신들의 이상을 구현하려 했습니다. 외울 것 많은 18세기의 계몽사상은 그러한 노력의 결과들인 것입니다. 그리고 수많은 전쟁으로 점철된 18세기~20세기 중반의 세계사는 서로 자신의 이상이 옳다고 믿었던 세력들 사이의 싸움이었습니다.
자신들이 옳다는 믿음은 저들은 틀렸다는 확신으로, 자신의 옳음을 증명하기 위한 투쟁은 상대를 죽여야 하는 전쟁으로 화한 것이죠.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전체주의와 민주주의, 제국주의와 민족자결주의 등등의 갈등이 그렇습니다. 뭐가 많이 생략된 거 같지만 근대에서 현대에 이르는 세계사는 대략 이런 흐름으로 이어져 왔습니다.
그렇게 보자면, 이분법적 사고, 즉 나와 의견이 다른 이들을 적으로 돌리는 행위는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는 인간의 대처방식인지 모릅니다.
다음은 새 시대를 만들어가는 방법입니다. 새 시대의 태동기는 어둡지만 많은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방법이 옳다고 믿는 이들은 다른 길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보려 하지 않습니다. 내 이상을 이루는 데 방해가 되는 걸림돌 또는 '역사의 진보를 막는 반동'으로 간주하는 것이죠. 이러한 과정을 통해 이분법적 사고는 심화되고 사회는 갈등과 분열에 휩싸이(는 것처럼 보이)게 됩니다.
한국은 준비되지 않은 상태로 새로운 시대를 맞이해야 했습니다. 변화에 대처하려 하면 또 다른 변화가 들이닥쳤죠. 끊임없는 자기규정이 필요했던 역사였습니다. 계속되는 혼란은 새로운 빛을 요구했고 저마다 옳다고 믿는 방식들이 충돌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한국은 변화하고 있었고 그 변화의 가운데서 새로운 길을 찾고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한국인들이 분열하고 갈등하는 것은 새로운 세상에 대한 열망이 그만큼 크기 때문이라고 해석합니다. 지금 이 세상은 잘못되었으니 이를 바꿔 더 좋은 세상에서 살고자 하는 욕구 말입니다.
또한 그러한 바람이 존재하는 한 한국사회의 분열과 갈등은 더 좋은 세상으로 향하는 원동력이 될 수 있다고 믿습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자신만이 옳다는 믿음입니다.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는 방법은 다양할 수 있습니다. 나만 옳다고 생각하는 것은 우리 사회의 갈등이 바람직한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을 어렵게 만듭니다.
이 문제는 우리가 반드시 풀어야 할 숙제입니다. 그리고 저는 우리가 언젠가는 반드시 답을 찾아낼 거라고 믿습니다. 또한 사회통합의 방법 같은 건 저보다 훨씬 훌륭한 분들이 많이 갖고 계실겁니다. 설마 그분들이 '한국인들은 어떻게 해도 답이 안 나오는 한심한 사람들'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기 위해 그런 문제제기들을 하시는 건 아닐테니까요.
어쨌든 결론적으로 말씀드리자면, 저는 우리 사회의 분열과 갈등이 꼭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변화하는 세계 속에서 나를 규정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며 새로운 시대를 살아갈 방법을 도모하는 것 역시 대단히 생산적인 일이기 때문입니다.
분열과 갈등이라는 현상 때문에 그 저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긍정적인 신호들을 놓치고 있는 건 아닌가. 가끔 생각합니다. 여기저기서 여러 번 말씀드리지만, 문제를 덮어두는 것보다는 드러내고 도려내는 것이 더 건강한 사회를 만드는 길이니까요. 그 과정이 혼란스럽거나 아프고 고통스럽더라도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