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선생 Mar 21. 2023

슬램덩크 열풍에서 본 새 시대의 가능성

세대 간 화합은 가능할 것인가

슬램덩크의 인기가 화제다. 누적 관객수는 어느덧 350만을 넘었고 31권짜리 만화책이 중쇄를 거듭하며 불티나게 팔리고 있다. 고등학교 시절을 강백호, 서태웅과 함께 보낸 사람으로서 뿌듯함과 아련함이 얽히는 마음이다.


여러 전문가들이 이미 언급했듯이 슬램덩크 열풍에는 필자와 같은 중년들의 향수가 한몫을 차지한다. 애니메이션 속의 강백호와 서태웅은 30년 전의 그 모습 그대로다. 2023년의 중년들은 그들과 함께 달리며 옛날의 나를 만난다. 그냥 과거가 아니라 가장 젊고 아름답고 풋풋했던 때의 내 모습이다.


그러나 지금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슬램덩크 열풍에는 복고를 넘어서는 무언가가 있다. 그것은 바로 세대 통합이다. 아빠와 아들이 손잡고 영화관에 가고 딸과 엄마가 같은 만화 주인공을 사랑하는, 마음 따뜻해지는 이 모습은 과거의 한국에서는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아들은 아버지가 보시는 영화를 고루하다고 생각했고 딸들은 엄마가 사랑했던 스타들에게 관심이 없었다. 효도 차원에서 같이 극장에 가고 콘서트 표를 예매해 드리지만 부모자식이 같은 문화를 향유하는 일은 일찍이 없었던 일이다.


세계 그 어느 나라보다 빠른 변화를 겪었던 한국은 그 때문에 세대 간의 문화 차 또한 클 수밖에 없었다. 현재의 대한민국에는 조선 시대와 일제강점기, 전쟁과 냉전, 산업화와 정보화, 세계화와 4차 산업시대가 뒤섞여 있다. 한국인들은 숨가쁜 변화에 적응하느라 급급했고 겉으로 보기에는 성공적인 듯하지만 그 이면에는 수많은 문제들이 방치되어 있다. 세대 간 갈등도 그중 하나다.

물론 세대 간의 갈등은 어느 정도 필연적이다. 자원은 한정돼 있고 인간의 수명 또한 제한적이기 때문이다. 인류의 역사는 부모를 극복하고 자신들의 자리를 차지해 온 자식들의 역사다. 이를 정신역동이론적 상징으로 살부(殺父), 즉 ‘아버지 죽이기’라 한다. 프로이트가 이야기했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대표적이다.


이로 미루어 본 한국의 현대사는 아버지를 죽이는 상황의 연속이었다. 아버지(전통)를 죽이고 그 자리를 차지한 일제에 대한 독립운동서부터, 전쟁과 분단으로 이어진 광복 이후의 사상투쟁, 독재와 싸웠던 4.19, 5.18, 6월 항쟁, 가깝게는 2016년의 촛불까지. 꼭 정치적인 측면에서 뿐만이 아니다.


명절마다 되풀이되는 제사를 둘러싼 갈등, 권위적인 직장문화를 둘러싼 꼰대 논쟁, 전통적 성역할에서 비롯된 남녀 갈등, TV 리모콘을 둔 채널 싸움까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분야에서 한국에서 전통과 권위는 끊임없이 도전받고 교체되어 왔다. 일부 한국인들은 자신들의 나라를 정체되고 변화 없는 나라로 묘사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꽤나 객관적이지 못한 생각이다.

출처: 인사이트(전 세계 ‘도시’의 과거와 현재를 비교해봤다 (사진 12장) - 인사이트 (insight.co.kr))

어감이 좀 그렇지만, ‘아버지를 죽이는 것’은 변화에 대한 태도와 관련이 있다. 한국인들이 끊임없이 아버지를 죽여왔다는 것은 한국이 그만큼 변화를 추구해 왔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실제로, 한국은 식민지 시대를 극복하고 전쟁과 분단 상황에서도 눈부신 경제성장과 민주화, 문화적 성취 등을 이루어왔다.


워낙 짧은 시간에 많은 변화가 이루어지다 보니 그만큼 해결해야 문제도 많다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숙제다. 그리고 그 숙제 중에는 내가 해야 하나 싶은 것들도 많다. 부모 세대들이 받아서 자식 세대에게 넘긴 것들도 있고, 내가 받았지만 어쩔 수 없이 내 자식들 대로 넘어가야 하는 것들도 있다. 인간의 수명은 한계가 있고 인간 사회란 수많은 세대가 공존하기 마련이므로.


이러한 상황에서, 슬램덩크 현상에서 나타난 세대 공감의 모습은 적지 않게 희망적이다. 근 백년 이상 계속된 살부(殺父)의 전통에 균열이 발생했다. 부모가 듣던 노래를 부르고, 부모가 보던 영화를 보고, 부모가 하던 일을 잇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들이 우리 사회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지난 세월 동안 아버지들을 죽여오면서, 아니 기성세대의 모든 것들을 부정해오면서 자식들의 마음도 편치는 않았다. 자신들이 이뤄온 것들을 부정당하는 기성세대의 마음은 오죽했으랴. 나는 내 부모를 부정했지만 나는 내 자식에게 인정받기를 바라고, 나는 부모와 잘 지내지 못했지만 나는 내 자식과 잘 지내고 싶은 마음은 현대 한국을 살아온 모든 중년들의 마음일 것이다.


이제부터가 중요하다. 슬램덩크 열풍 하나로 우리 사회의 뿌리 깊은 갈등이 해소되리라 기대할 수는 없다. 그러나 한국의 갈등이 지금 모습 그대로 계속되지는 않을 것이라는 점은 장담할 수 있다. 얼어붙은 강물이 다시 흐르고 꽃나무에 새순이 돋는 것처럼 우리를 변화케 할 새로운 계절이 시작되었다.     


*******이 글은 '경향신문'에 기고한 글입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