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주의화'의 진정한 의미
비혼과 저출산의 이유 중 하나로 꼽히는 ‘개인주의화’는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개인주의라는 개념이 익숙지 않은 우리나라에서 개인주의는 이기주의와 비슷한 의미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다시 말해, 개인주의화된 젊은이들이 자기들만 즐기려고 결혼과 출산을 하지 않으려 한다는 식이다.
그러나 개인주의는 이기주의가 아니다. 개인주의는 삶의 중심이 개인, 즉 자기 자신이 되는 문화를 말한다. 비교문화심리학에서는 농경에 비해 유목이나 상업이 중시되어온 서양에서 집단의 힘보다는 개개인의 능력에 의존하는 문화가 발달했다고 본다.
개인주의와 집단주의가 나타나는 요인들을 연구한 트리안디스에 따르면 개인주의 문화와 집단주의 문화를 나누는 가장 큰 기준은 생존을 위해 집단의 힘이 요구되는가 그렇지 않은가이다. 인구밀도가 적고 산업이랄 게 없어 수렵과 채집으로 연명해야 하는 지역과 똑같이 가난하여 집단에 의존해도 먹고 살 방법이 마땅찮은 극빈층에서도 개인주의 문화가 나타나는 이유다.
그러나 사실 개인주의가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서양에서도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전근대 시기는 개인의 힘만으로는 생존하기 어려운 시대였다. 서양사람들도 살아남기 위해서는 자기 지역의 영주에, 조합에, 공동체에 의존하고 협조해야 했다.
사회과학에서는 중세와 근대를 구분짓는 사건으로 산업혁명과 시민혁명을 꼽는다. 산업혁명의 의미는 자연에 의존하던 인간의 생산력이 기계로 이동했다는 점이며, 시민혁명은 세상을 지배하던 권력이 신의 권위를 부여받은 왕과 귀족들에서 시민으로 이동했다는데 의의가 있다.
행위의 주체가 인간으로 바뀌었다는 사실이 근대를 규정하는 가장 큰 기준인 것이다.
물론 이 전환이 순탄했던 것은 아니다. 자연과 사회를 통제할 수 있다는 인간의 능력에 대한 지나친 믿음은 국가주의 등 전체주의적 사상으로 이어졌고, 끝없는 경쟁은 전쟁으로 이어져 개인의 삶이 오히려 사라지는 시대를 맞게 되었다. 게르만 민족의 중흥이나 대동아 공영권,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체제 경쟁 등이 이 시대의 산물이다.
스스로의 운명을 결정하기 원하는 개인들이 등장하면서 이 시대가 마무리된다. 신이나 자연, 국가와 사상이 개인의 삶을 결정하는 것이 아닌, 개인 스스로가 자신의 행위를 규정한다는 생각이다. 현대적 의미의 개인주의는 이러한 생각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렇다면 한국의 경우는 어떨까? 한국은 이같은 과정을 외부의 힘에 의해 강제적으로 겪어야 했다. 구한말과 일제강점기를 지나 광복 이후에도 그같은 상황은 이어졌다. 분단과 전쟁, 군사 독재와 민주화 투쟁 등 한국인들은 민족의 독립 이후에도 국가의 수호와 민족 중흥의 역사적 사명, 경제발전과 선진화, 반독재와 민주화 등의 거대한 가치를 위해 살아왔다.
구질서가 지배하던 세계에서 새로운 질서로의 전환은 서구 사회가 먼저 겪었던 일이고 우리 역시 반드시 겪어야 했던 과정이었다. 하지만 그 과정 속에 묻혀간 수많은 개인의 삶들이 있었다는 사실 역시 잊어서는 안된다. 민족의 독립을 위해,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해, 국가의 재건과 경제 발전을 위해 잊혀졌던 수많은 꿈들이 있었다.
한국에서 개인의 삶에 초점이 맞춰지기 시작한 것은 경제적으로도 체제적으로도 사회가 안정되기 시작한 1990년대 이후였다. 이제까지의 인식으로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이른바 X세대의 등장은 한국사회에서 최초로 개인주의에 대한 담론을 불러일으켰으나..
곧이어 IMF가 닥치며 곧 국난극복이 키워드가 되고 말았다. 이후 세계화와 신자유주의, 정리해고와 비정규직이 일상화된 시대를 살며 틈틈이 미완의 민주주의를 바로 세우는 일까지.. 한국의 현대사에서 개인의 삶을 산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고 세대가 바뀌며 점차 점차 개인의 삶을 선택하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다. 이는 부정할 수 없는 자연스러운 변화의 흐름이다.
비혼과 저출생 역시 개인들의 선택이다. 현대 한국의 젊은이들이 결혼을 하지 않고 아이를 낳지 않겠다는 이유는 스스로의 선택에 신중하겠다는 방증이다. 개인의 삶을 유지하기도 어려운 현실에서 내 선택으로 인해 태어날 또다른 생명이 힘든 삶을 살아가도록 하지 않겠다는 선택이다.
저출생으로 성장의 동력을 잃고(?) 늙어갈 대한민국이라는 국가는 개인의 삶과는 별개다. 현대 사회의 개인들은 나라를 위해서, 또는 때(?)가 되었다고, 남들이 하니까.. 결혼하고 아이를 낳지 않는다. 개인의 선택으로서 충분히 합리적이고 이성적이며, 자신의 삶을 스스로 결정짓는 주체로서의 사고방식이라 하겠다.
즉, 지금 한국의 비혼 및 저출산은 현대적 자기(self)의 성장과 관계된 현상이다.
내 삶의 주인은 나라는 삶의 주체로서의 자각이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제 삶의 주체로 살아가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개인은 스스로 자신의 삶을 유지해야 하고 삶의 의미 또한 찾아야 한다. 이는 신의 뜻과 왕의 명령을 따르면 되었던 과거에는 없었던 종류의 어려움이다.
태어나는 순간 신분과 계급이 정해져 있었던 시대에는 내가 무엇을 하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농부의 자식으로 태어났으면 농사를 지으면 되고 양반의 자식으로 태어났으면 글공부 해서 관직에 나가면 됐다. 남성과 여성의 역할 또한 마찬가지다. 남자로, 여자로 태어나는 순간 개인이 선택할 수 있는 여지는 거의 없었던 것이 과거의 삶이다.
그러나 지금은 모든 것이 개인의 선택이다. 무수한 메뉴 앞에서 뭘 먹을지 혼란스러운 식당 손님처럼 현대인들은 자신 앞에 놓인 무수한 선택지와 어느 한쪽을 선택했을 때의 기회비용 사이에서 끊임없이 불안해한다. 개인의 삶을 포기한 수많은 이들의 희생 위에 얻어낸 개인의 삶은 축복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선택에는 책임이 따른다. 무수한 선택의 가능성과 기회비용을 저울질 하는 것도 어렵지만 일단 내린 선택의 결과를 받아들이는 일은 더욱 두려운 일이다. 사르트르는 인간은 자유롭도록 저주받았다고 했으며 그 결과 자유로부터 도피(에리히 프롬)하기에 이르렀다.
현재의 선택이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 지금은 알 수 없다. 하지만 주체로 서기 원하는 이들이 많아진다는 것은 좋은 신호다. 자신이 누구인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이보다는 매순간 고민할지언정 자신의 삶을 사는 이가 낫다. 예정된 혼란을 딛고 한 차원 성숙한 개인과 사회가 되길 바랄 뿐이다.
***이 글은 교수신문에 기고한 글(2023년 4월)을 수정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