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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선생 Mar 25. 2024

서양 용(드래곤)과 동양 용의 차이

유해조수 vs 공무원

용은 상상 속의 동물입니다. 거대한 크기와 위압적인 생김새, 신묘한 능력을 가진 용은 예로부터 꾸준히 사랑받아왔는데요. 언제부터인지도 알 수 없을만큼 오래 전부터 전해오는 열두 띠에 해당하는 동물 중 유일한 상상의 동물이기도 하죠.

십이지신 중 용(왼쪽에서 두번째)

거대하고 이질적이며 위협적인 동물에 대한 공포는 문화보편적이기에 용에 대한 이미지는 전세계적으로 존재합니다만, 그 의미에 대해서는 다소 차이가 있습니다. 오늘은 동양과 서양에서 용을 바라보는 관점에 대해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왕좌의 게임>의 드래곤

용(龍)으로 번역하기는 하지만 서양 용은 드래곤(dragon)이라 불리는 동물입니다. 거대한 몸은 비늘로 덮여 있으며 날개와 네 개의 다리가 있습니다. 깊은 못이나 늪, 숲이나 화산에 사는 드래곤은 자신의 영역을 침범한 인간들에게 불을 뿜는 위험하고 사악한 동물로 묘사됩니다.


금과 보물을 좋아하여 모으고 지키는데 드래곤이 지키는 것을 훔치러 오는 인간들은 드래곤이 내뿜은 불길에 타죽기 일쑤죠. 이러한 특성에서 드래곤은 뭔가를 지키는 존재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슈렉>의 드래곤

지키는 자가 있으면 훔치는 자도 있는 법. 서양의 문학과 예술에는 드래곤을 무찌르고 드래곤이 지키는 무언가(공주라든가 보물)를 되찾는(?) 류의 스토리가 많이 있죠. 꼭 뭔가를 되찾는 것 외에도 일반적인 서양 콘텐츠에서 드래곤은 구축의 대상입니다.


이 점이 서양 드래곤의 특징인데요. 즉 드래곤은 해치워야 할 대상으로 등장한다는 것이죠. 드래곤 자신의 탐욕 때문이든, 드래곤이 소유하고 있는 보물(이나 공주) 때문이든, 드래곤은 죽어야 합니다. 이것이 드래곤이 사악한 존재로 묘사되는 이유입니다. 사악해야 잡아 죽일 정당성이 확보되니까요.


즉, 서양 전통에서 드래곤은 '유해조수'인 것입니다.


애초에 드래곤은 인간과 같은 시기에 생존했던 뱀, 악어, 도마뱀 등의 거대한 파충류였을 가능성이 있습니다(드래곤의 어원은 뱀입니다). 인간이 영역을 넓혀가면서 깊은 숲 속, 큰 물가 등에 살고 있던 이들 파충류는 인간 사냥꾼의 손에 하나씩 제거되었을 것입니다.

데이빗 스콧의 <니므롯>, 1832년 작

동서양의 신화에는 산 속에서 숲 속에서 강에서 바다에서 파충류 형태의 괴물을 무찌르는 영웅들의 이야기가 공통적으로 존재합니다. 성경의 창세기에도 인류 최고의 사냥꾼 니므롯(영어식으로 님로드)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여기저기 살고 있는 괴물들을 사냥해 인간의 영역을 넓힌 인물입니다.


한편, 드래곤을 무찌르는 자는 주로 '기사'인데요. 괴물들을 사냥한 고대 영웅들의 후계인 이 기사들은 사람들에게 해를 입히는 드래곤을 무찔러서 용맹을 증명하거나 드래곤을 죽이고 드래곤이 감금하고 있는 공주를 구하는 사람입니다.

로마제국 멸망 후 개인의 무력을 바탕으로 생계를 꾸려가는(?) 이들을 기사(knight)라고 합니다. 기사들은 뛰어난 싸움실력을 갖춘 데다 갑옷과 투구로 무장하여 오직 전투를 위해 살아가는 이들이었는데요. 영지가 없는 기사는 주로 영주들의 용병 노릇을 했으며, 영지가 있는 기사는 자기보다 작은 세력의 영주들을 규합하고 자기보다 큰 세력의 영주들에게는 복속하는 등 계약관계를 맺고(봉건제도) 중세 유럽을 지배했습니다.


이 기사가 드래곤을 무찌른다는 스토리에서 유럽에서 드래곤 이야기의 전형이 만들어진 것이 대략 로마 멸망 후 봉건제도가 구축되기 시작할 무렵이라 볼 수 있는데요. 중세 유럽은 유럽 전체를 지배하는 거대 세력이 존재하지 않던 시기였습니다. 각 지역의 기사들이 각자의 지역을 평정하는 과정에서 드래곤을 무찌르는 기사들의 이야기가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영월기사단 모집 공고

즉, 사악함과 두려움의 상징 드래곤은 그때까지도 탐사되지 않은 지역에 대한 공포와 숲과 늪으로 뒤덮였던 중부 유럽을 개척해 나가는 인간의 두려움이 종합된 괴수, 그러나 없애버려야 할 괴물(유해조수)이었던 것입니다.


한편, 동양의 용은 서양의 드래곤과는 좀 아니 많이 다릅니다. 유해조수인 드래곤에 비해 용은 처음부터 권위와 위엄의 상징이며 물을 다스리고 날씨를 관장하는 신성한 존재입니다. 비늘로 덮인 뱀처럼 긴 몸에 네 개의 다리, 뿔이 난 머리는 드래곤과 유사하지만 동양의 용은 날개가 없습니다. 날개가 없어도 잘 날아다니죠. 용쯤 되는 존재가 체신머리 없이 날개를 파닥거려야 하겠습니까.

당연히 용은 제거해야 될 대상이 아니라 권위와 위엄의 상징, 즉 왕을 의미합니다. 왕의 옷에는 용이 새겨져 있고 왕이 사는 곳에는 용이 조각되어 있습니다. 왕의 얼굴을 용안(龍顔)이라고 하는 등 왕과 용은 거의 동일시되었던 것이죠. 이는 중국과 한국, 베트남 등 전제왕조의 역사가 깊은 곳에서 발견되는 공통점입니다.


또한 용은 불교적 상징으로도 많이 나타나는데요. 불교 전래과정에서 인도의 '나가'라는 전설상의 동물(뱀)을 용으로 번역하면서 용은 불법을 수호하는 신성한 동물이 됩니다. 지금도 절에 가면 중요한 건물에는 용이 장식되어 있죠. 건물 앞으로 용머리만 있는 게 아니라 건물 안으로 들어가면 대들보에도 용의 몸이 조각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동양적 전통에서 용은 훨씬 관료적입니다. 선비들이 과거를 봐서 관리가 되는 과정을 등용문(登龍門)이라고 한다든가, 이무기가 천년을 수도(공부)하여 용이 된다든가, 각 바다에는 용왕님(수신)이 계신다든가 하는 것이죠. 이 중에 이무기가 용이 되기 위해 공부를 해야 하거나 동해, 서해, 남해에 용왕님이 각각 계신다는 이야기는 우리나라의 경우인데요.


이는 앞선 이야기(한국 귀신은 왜 사또를 찾아갈까https://brunch.co.kr/@onestepculture/510)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한국의 관료제 역사에서 기인하는 듯합니다. 용이 되기 전의 존재(이무기, 잉어 등)일 때는 사람들에게 해도 끼치지만 일단 용이 되고 나서는 날씨와 물을 관장하는 업무에 충실합니다. (용이 되기 위해 어려운 시험도 봐야 합니다)

용왕 탱화

용과 용왕님이 등장하는 여러 이야기들을 보면, 신적인 존재로서 권위와 능력, 위엄도 강조되지만 백성들을 위해 고심하며 업무를 처리하는 모습을 쉽게 만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관할 구역에도 대단히 민감하여 다른 바다에서 일어난 일은 관할이 아니라고 다른 지역의 용왕께 책임 돌리기(?)를 시전하는 모습도 볼 수 있죠.


어려운 시험을 통과하여 능력을 증명하고 권위와 위엄을 갖춘 존재, 자신의 관할 구역에서 본연의 업무를 다하는 존재. 우리 역사에서는 이런 존재를 '고위 공무원'이라고 합니다. 요약하자면, 동양에서 용은 권위와 위엄의 상징으로 왕권을 대표하는 신성한 존재였고 이는 서양에 비해 오래 전부터 안정된 동양의 행정제도와 관련이 있는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서양의 창작자들이 간혹 용을 드래곤으로 오해하여 문화콘텐츠에 반영하는 경우가 있는데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미이라 3>에서 진시황이 변신한 머리 세 개 달린 용?

문화적 상징은 해당 문화의 역사와 전통, 사람들의 욕망이 반영된 문화적 산물입니다.우리 문화의 산물인 경우에도 알면 알수록 그 진면목이 보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더우기 남의 나라의 문화적 상징을 차용할 때는 그들을 이해하기 위한 최소한의 노력을 기울여야 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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