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 속에 숨겨진 한국인의 무의식
한국 귀신 설화의 원형이라 할 수 있는 밀양의 아랑설화와 평안도 철산의 장화홍련 이야기는 억울한 죽음을 당한 귀신이 고을 사또에게 나타나 결국 한을 푼다는 공통적인 이야기 구조를 갖고 있습니다. 이러한 스토리 라인은 전설의 고향 등에서 꾸준히 재생산되며 한국 공포물의 틀을 형성하고 있는데요.
한국 귀신 이야기들의 핵심은 귀신의 한(恨)과 해한(한풀이)의 동기입니다. 한국인들은 자신에게 닥친 불행한 경험을 한(恨)으로 형상화하고 한은 어떤 일이 있어도 - 죽은 후에 귀신으로 나타나서라도 - 풀어야 한다는 것이죠. 한국인의 한에 대해서는 관련 글 '한이란 무엇인가1,2'https://brunch.co.kr/@onestepculture/389'을 참고해주십시오.
그런데 이러한 한국 귀신 이야기들에는 재미있는 포인트가 하나 더 있습니다. 바로 귀신이 나타나는 곳/대상인데요. 약간의 베리에이션(?)이 있지만 대개의 귀신 이야기에서 귀신들은 사또에게 나타납니다. 사또란 지방에 파견된 관리를 통칭하는 말로 사도(使道)가 변한 말입니다. 즉 귀신이 사또에게 나타난다는 얘기는 지방관에게 나타난다는 이야기죠.
행정구역에 따라 품계의 차이는 있지만 보통 지방관은 현 단위(현재 면 정도?)까지 파견되었고, 보통 현감/현령은 종5,6품, 부사/목사는 정3품, 관찰사/부윤은 종2품에 해당하는 관직이었습니다. 아랑과 장화홍련이 살았던 밀양과 철산은 정3품 부사가 부임하는 큰 지역이었습니다.
각설하고.. 이 말인즉슨, 귀신이 한을 풀기 위해 관청으로 찾아와 지방관 면담을 신청했다는 건데요. 요즘 말로 하면 민원을 넣으러 왔다는 얘깁니다. 그렇습니다. 한국 귀신들의 본질은 '민원인', 아니 '민원귀?'인 것입니다.
이러한 특징은 옆나라 중국이나 일본의 귀신 스토리와는 꽤나 다른 지점인데요. 요재지이 등에서 그려지는 중국 귀신들은 보통 '요괴'라고 불리는 오래 묵은 동물이나 기물이 변신한 류가 많습니다. 한을 품은 귀신도 없지는 않지만 한을 풀기 위해 관청으로 민원을 넣기 보다는 도사나 승려의 도움으로 한을 푸는 경우가 많죠.
일본도 우리 식으로 한을 푸는 귀신보다는 요괴 이야기가 많은 편이고 특히 일본 요괴들은 자기 영역(나와바리)에 침입한 인간에게 해를 입힌다는 이야기 구조를 갖고 있죠. 한국 귀신과 일본 귀신의 차이에 대해서는 요 글(https://brunch.co.kr/@onestepculture/40)을 참고해 주십시오^^.
한국 귀신들이 지방관에게 민원을 넣으러 온다는 사실은 한국인들에게 관(官)이 심리적으로 매우 가깝게 있음을 방증합니다. 한국은 예전부터 관의 개입이 숨쉬듯 자연스러운 나라였습다. 적당한(?) 크기의 땅덩어리 때문에 통일신라 때부터 지방관을 파견하기 시작했고, 고려와 조선을 거치면서 토착세력의 약화와 중앙집권화가 꾸준히 이루어졌죠.
이러한 점은 한국인들의 무의식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전설과 민담에는 사또, 원님들이 등장하는 무수한 이야기들이 있고, 급기야 귀신도 관(官)을 통해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려 하는 것입니다. 과거 지방관은 사법과 군사 등의 업무를 총괄했고 지역에 사는 사람들의 대부분의 문제는 관에서 처리했었기에 가능한 일이죠. 한국인들은 과거부터 내가 무슨 문제가 있으면 관(官)에서 관원들에게 해결해야 했고 또 해결해 온 것입니다.
관(官)과의 심리적 거리는 결정적으로 무속신(神)들의 위계가 관직으로 나타난다는 점에서 더 명확히 알 수 있습니다. 무당들이 모시는 신들 중 OO대감의 '대감'은 정2품 관원(장관급)을 이르는 말이고 OO장군의 '장군' 역시 지금으로 치면 지역사령관 내지는 군단장급의 호칭입니다(정3품). 모두 관원 즉, 공무원이죠. 그것도 고위 공무원입니다.
내 문제를 해결해 줄 신이라면 그만큼 높고 힘있는 분이어야 한다는 민초들의 무의식이 반영된 호칭이라 하겠습니다. 이 외에도 저승을 담당하는 염라대왕과 판관들, 심지어 저승사자(차사)들도 공직 이름들인 걸 보면 한국의 역사에서 관과 관원들이 얼마나 사람들의 삶에 가까왔는가를 짐작케 합니다.
여담으로 한국 문화콘텐츠에서 과거의 군사/경찰 즉 포졸은 군기 다 빠진 오합지졸로 묘사될 때가 많은데요. 이 역시 포졸들을 가까이에서 보며 부정부패를 포함한 그들의 여러 측면을 보아왔던 한국 문화의 특징입니다.
이를테면 무협지 같은 중국 문화콘텐츠에서 관군은 정예 중의 정예로 나오거든요. 땅이 넓어 관의 행정력이 미치지 못하는 곳이 많았던 중국의 특성이 반영된 장면이 아닐까 합니다(참고: 무협지로 알아보는 중국인 심리https://brunch.co.kr/@onestepculture/509)
우리가 세상을 인식하는 방법은 우리의 역사 그리고 문화와 뗄레야 뗄 수 없습니다. 한국인들이 '정치인들은 다 썩었고, 나라에 부정부패가 가득하고, 공무원, 군인, 경찰 할 거 없이 제대로 된 놈들 하나도 없다'는 식의 인식을 갖고 있는 것은 우리 역사에서 그들이 그만큼 우리 삶에 가깝게 존재해 왔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세계의 역사와 문화를 살펴보다보면, 우리가 '나랏일 하는 놈들 다 도둑놈이다'라고 할 동안, '나랏일 하는 놈들이 있어?!' 내지는 '그놈들이 일을 해?!!' 수준의 배경을 가진 나라들도 많거든요. 어쩌면 한국은 그렇게까지는 형편없는 나라가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