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의 역사에서 비롯된 남편 성 따르기
한국여성들은 결혼 후에도 자기 성을 그대로 씁니다. 한국인들에게는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다른 나라에서는 안 그렇다고 합니다. (http://media.daum.net/culture/others/newsview?newsid=20151217220517982)
가까운 나라 일본과 중국도 결혼 후에는 남편 성을 쓰는 것이 일반적이고 서양 나라들도 전통적으로 남편 성을 쓰는 경우가 많습니다(일본과 중국은 근대 들어 법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서양에서도 법으로 규정된 것은 아니지만 오랜 시간 동안 문화적 관습으로 굳어져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세계적으로 결혼 후 남편 성을 쓰는 건 '문화 보편적'인 현상 같습니다. 한국이 특이 케이스가 되는거죠. 그렇다면 한국은 왜 남편 성을 따르지 않을까요? 그 전에 남편 성을 따른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결혼 형태의 변천
인류 초기의 결혼형태는 '약탈혼'이었습니다. 여자를 납치해서 아이를 낳게 하는 것이죠. 로마의 건국 초기, 신생국으로 인구가 부족했던 로마는 옆나라 사비니로 쳐들어가 여인들을 납치해 왔습니다.
이러한 풍습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일반적이었는데요, 인류학자 헨리 모건은 씨족 내에서 근친혼을 금지한 것을 약탈혼의 원인이라 보았습니다. 근친혼이 불가능하므로 결혼상대를 밖에서 찾아야 하는데 보이는 대로 잡아오게 된 것이 약탈혼의 시초라는 겁니다.
결혼식때 신부가 쓰는 면사포는 여자를 납치할 때 쓴 그물, 미드에서 흔히 나오는 베스트맨, 즉 신랑들러리들은 납치를 돕던 어깨들, 결혼반지는 잡아온 여자에게 채워두던 족쇄..에서 유래되었다는 분석도 있습니다(참조: 인류혼인사).
이러한 약탈혼의 과정은 당연히 몹시 껄끄럽습니다. 여자를 납치하는 도중에 사람이 죽거나 다치기 일쑤이고 결혼에 성공하더라도 여자를 빼앗긴 집안이나 부족과의 갈등이 예견되는 것이죠.
그래서 이후에 조금 발달한 결혼방식이 '매매혼'입니다. 대놓고 쳐들어가서 신부를 납치해오기 뭐하니까 돈을 주고 사오는 방식이죠. 이 돈이 '지참금'입니다. 보통 신랑측이 신부측에 지불하는데 이런 식으로 데려온(납치->매매) 여자는 남자의 '재산'이라는 의미를 갖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남자의 성을 갖게 되는 것이죠. 서부영화 같은데 보면 야생마를 잡아와서 목장의 낙인을 찍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런 것과 의미는 동일하다고 보시면 될 거 같습니다. 물론 약탈혼이나 매매혼의 실질적 의미는 사라진지 오래지만 그 흔적이 결혼풍습(예, 들러리, 결혼반지)이나 남편의 성을 따르는 관습에 남게 된 것이죠.
그렇다면 우리나라는 왜 남편의 성을 따르지 않게 되었을까요?
위의 설명을 따르자면, 한국의 결혼에는 약탈이나 매매와는 다른 과정이 개입되어 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과거 우리나라의 결혼제도를 보면, 고구려의 서옥제(壻屋制)라는 풍습이 있었는데요. 혼약이 이루어지면 신부의 집에 서옥(사위집)이라는 작은 집을 짓고 신혼부부를 살게 하는 것이죠. 부부는 자식을 낳아 장성하면 데리고 떠납니다.
이 서옥제의 흔적은 '장가든다'는 말로 현재도 남아있는데요. 조선시대에도 신랑이 신부 집으로 와 결혼을 한 뒤 몇 년 살다가 자식이 크면 시댁으로 가곤 했습니다. 대학자 율곡 이이가 태어나서 자란 곳도 신사임당의 친정인 강릉이지요. 당시 사람들은 이를 처가살이라고 부끄러워하지 않고 당연하게 생각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위집'이라는 뜻을 가진 고구려의 서옥제와 신랑이 장가가서 자식이 장성할 때까지 장인네 집에서 살았던 조선의 결혼풍습은 거의 유사합니다. 조선 중기까지 이러한 풍습이 지속되었기 때문에 신부가 '시집'으로 가서 겪는 '시집살이'도 비교적 후대(임진왜란/병자호란 이후)까지는 낯선 풍경이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지속되어 온 방식의 결혼에는 남자가 여자를 '재산'으로 고려한다는 의미가 들어있지 않습니다. 결혼에는 여성의 부모의 허락이 가장 우선되지요. 서옥제에 대한 기록을 보면, 사위가 장인장모의 집 대문 앞에 무릎을 꿇고 절하면서 따님과 자게 해달라고 세 번 청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여성의 집안(가문)이 영향력을 가지고 있으니 그 집에서 시집온 여성을 함부로 대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이치겠지요. 조선전기(임진왜란 전)만 하더라도 여성들은 상당한 사회적 지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결혼 전의 성(아버지의 성)을 그대로 쓰는 것은 물론, 제사에도 남성과 같이 참여하였고, 아들과 딸을 가리지 않고 상속을 받았죠. 고려시대에는 여성들의 사회적 활동도 상당 수준으로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이로 미루어 인류학자들은 고대 한국사회가 모계사회였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합니다. 물론 모계사회라는 뜻이 아마조네스같이 여성 위주의 사회였다는 뜻은 아닙니다. 현대적 의미에서 여성의 권익이 보장되었다고 보기 보다는, 여성의 가문(집안)이 상당한 영향력을 가졌던 사회라고 보는 편이 맞겠습니다.
이는 조선의 왕들이 외척(왕비의 가문)을 그렇게도 경계했던 사실과도 관계가 있을 것 같습니다. 일례로 육룡이 나르샤..의 유아인.. 아니 태종 이방원은 훗날 아들 세종의 장인 심온의 가문을 경계하다 못해 씨를 말려버리지요;; 심온은 결국 문종대에 이르러서야 복권됩니다...
위의 기사는 여성의 사회진출 지수가 OECD 28개국 중 28위인 한국의 현실을 들며, '남편의 성을 따르지 않는다는 것이 여권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고 끝맺고 있습니다만, 남편의 성을 따르지 않는 것은 분명 여권과 상관이 있었습니다.
한국사람들이 여성을 앞에 놓은 건 '연놈' 할 때밖에 없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굉장히 무식한 말씀입니다. 현재 한국 여성의 인권이 바람직한 상황은 아니지만 한국사람들이 저런 소리를 들을 정도로 역사적으로 여성을 무시해온 사람들은 절대 아닙니다.
한국인들이 남편의 성을 따르지 않는 것은 여성(의 가문)을 존중했기 때문입니다. 여성의 가문은 결혼한 여성을 통해 신랑과 신랑의 가문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여성들은 독자적인 성을 갖고 권리를 행사할 수 있었던 것이죠.
물론 그런 권리들이 현대적 의미의 여권과는 거리가 있겠지만 납치당하고 팔려다녀야 했던 다른 문화권의 여성들과 비교하면 상당한 수준의 권리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문화 비교는 꽤 어려운 일입니다. 기본적으로 당대를 기준으로 이루어져야 하지요. 분명 우리 사회에는 여성에 대한 차별과 편견이 존재합니다. 하지만 현재 남아있는 악습을 가지고 우리가 5000년 역사 내내 여성을 차별해왔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