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나이'의 잠재적 기능
새해입니다. 떡국 맛있게 잡수셨나요? 떡국 말고 또 드신 게 있다구요?
네... 한 살씩 더 잡수셨지요.. 그래서 올해 몇 살이십니까?
우리나라는 두 개의 나이가 있습니다. 일명 '한국 나이'와 '만 나이'가 그것이죠. 한국사람들은 태어나면 바로 한 살이 됩니다. 그리고 해가 바뀌면 한 살을 더 먹죠. 이런 식의 계산법을 '한국 나이'라고 합니다. 작년 12월 31일에 태어난 아기는 지금 두 살이네요.
한편 만 나이는 태어난 날(생일)을 기준으로 하는 나이입니다. 태어나면 0살, 1년 뒤 생일이 돼야 한 살이 됩니다. 작년 12월 31일에 태어난 아기는 아직 0살입니다. 한국 나이의 유래에 대해서는 명확히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을 비롯 국가 기관과 민속학 전문가들도 의견이 갈리는 부분입니다.
유력한 설은 한국사람들은 아이가 엄마 뱃속에 생겼을 때부터를 생명의 시작이라고 생각해왔다는 겁니다. 임신 기간이 10개월이니까 태어났을 때 이미 일 년 가까이 산 것이죠. 그래서인지, 우리의 나이 세는 단위는 '살'입니다. '살'은 '살다, 生'에서 왔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한편, 만 나이는 생일을 기준으로 하는 셈법입니다. 우리나라를 제외한 거의 모든 나라들이 만 나이로 나이를 세지요. 그런데 사실 '만 나이'라는 용어는 일본에서 나온 말입니다. 일본도 원래는 우리처럼 엄마 뱃속에서부터 나이를 세어 왔는데요.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이면서 서양식 나이(만 나이)와 기존의 세는 나이(数え年; 카조에도시)를 병행하다가 행정상의 어려움을 이유로 1950년부터는 만 나이만 사용하도록 법률을 제정했다고 합니다.
일본 뿐만 아니라 중국, 몽골, 베트남 등등 동아시아 문화권에서는 소위 '한국 나이'가 일반적이었습니다. 그러나 현대 사회가 되고 서구식 사회 시스템을 따르면서 다른 나라에서는 전통적인 나이 세기는 점차 사라진 것으로 보입니다.
만 나이는 서구식 나이 계산법입니다. 생일이 되기 전에는 나이가 올라가지 않는 방식인데요. 이는 동서양의 '나이'에 대한 개념이 다르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즉, 동양은 해(年, 歲)가 바뀌면 나이를 먹습니다. 공문서에 나이 적는 칸에 '___세' 라고 쓰인 '세'는 해 세(歲)자 이지 않습니까?
암만 12월 31일에 태어났어도 태어난 해가 2016년이면 그 해의 1세를 갖는 것이고, 다음 날 해가 바뀌면 또 그 해의 1세를 더하는 식이죠. 즉 동양의 나이는 해가 바뀌면 하나씩 올라가고 서양의 나이는 태어난 날이 돌아오면 하나씩 올라가는 것이죠.
여기에는 뭐가 더 맞고 틀리다, 옳고 그르다는 것이 없습니다. 그냥 예전부터 그래 왔던 습관, 다시말해 문화일 뿐인 것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왜 한국만 아직도 예전의 나이 셈법을 고집하는 것일까요? 이건 궁금해 할 만 합니다. 중국, 일본을 비롯한 동양의 다른 나라들은 이미 그런 방식을 버린지 오랜데 말입니다.
한국 나이와 만 나이를 병용하는 것은 여러 가지 불편을 초래합니다. 인구조사 등 행정적 불편함은 물론이고 법적 책임이 중요한 사안의 연령을 따지는 일에도 골치를 아프게 하죠. 외국인들과 상호작용할 때면 그들에게 '한국 나이(Korean age)'라는 개념을 설명해야 하는 불편함까지 가중됩니다.
이러한 불편함에도 한국사람들이 여전히 한국 나이를 쓰는 이유는 뭘까요?
최근 한 매체에서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한국 나이를 유지해야 한다는 의견이 만 나이로 통일해야 한다는 의견보다 우세했습니다. 한국식 나이 셈법이 불편하다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음에도 한국 나이를 쓰자는 사람도 여전히 많은데요.
문화는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방식으로만은 작동하지 않습니다. 만 나이를 쓰는 것이 편리함에도 불구하고 한국 나이가 계속 유지되고 있다는 것은 한국식 나이 셈법이 갖는 어떤 기능이 있다는 뜻일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한국사람들한테는 그게 중요하다는 겁니다.
한선생이 생각한 '한국 나이'의 기능은 "한국문화에서는 나이가 대인관계에서의 행동양식을 규정해 준다"는 사실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한국사람들은 '나이'로 관계를 맺습니다. 처음 누군가를 만나면 통성명과 함께 서로의 나이를 묻지요. 그리고 나이에 따라서 관계가 결정됩니다. 예를 들어, 나이가 위면 '윗사람', 아래면 '아랫사람'의 관계가 성립하는 것이죠.
연배가 비슷하면 '형/오빠/누나/언니 vs 동생'의 관계가, 나이 차이가 세대 급(20살 이상)으로 벌어지면 '아저씨(삼촌)/아주머니(이모,고모) vs 조카', 나이 차이가 두 세대(4,50살) 이상으로 벌어지면 '할아버지/할머니 vs 손자/손녀'의 관계가 형성됩니다.
물론 공적인 관계나 일시적인 관계에서는 이렇게까지 가지는 않겠습니다만, 우리가 나이를 물어보는 것은 서로의 위치를 정하고 그 위치에 따라 '문화적으로 허용된' 행동양식을 사용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장유유서를 지켜온 우리의 문화적 전통에서 그러한 행동양식은 주로 '나이가 많은 사람'에게 유리하게 작용하지요.
이것이 한국 사람들이 '한국 나이'를 놓을 수 없는 이유입니다. 수없이 많은 사람들과 얽히고 설키는 대인관계에서 유리한 위치를 선점하려면 나이가 한 살이라도 많은 것이 유리하니까요. 만으로 나이를 세면 두 살까지 어려지지 않습니까? 제가 알기로 한국사람들이 적극적으로 만 나이를 사용할 때는 나이 먹기 싫을 때 뿐입니다.
나이를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대인관계는 많은 부작용을 낳습니다. 반드시 지켜져야 할 사회적 약속들이 나이 때문에 어그러지기도 하고 그 때문에 상처받는 이들도 있습니다. 최근에 화제가 되고 있는 '지하철 노약자석 문제'나 'OO대학 똥군기' 사건들이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부정적 현상들이 있기 때문에 한국식 나이문화는 없애야 마땅한 것일까요? 이는 또 다른 주제로 다뤄야 할 문제겠습니다만, 일단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문화에는 양면성이 있지요. 문화의 한 면만을 보고 문화의 전반을 평가하는 것은 위험한 일입니다. 그 문화가 수행하는 기능 때문입니다.
한국의 나이문화는 대인관계 맥락에서 서로의 행동을 지시하는 문화적 도식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그 도식에 따라 한국사람들의 행위와 마음 경험의 질이 결정되죠. 한국인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우선 이 점을 알아야 합니다.
또한, 한국의 '나이 따지는 문화'의 부작용이 적지 않지만 한국문화에서 나이 어린 사람이 항상 피해를 보는 것만은 아닙니다. 나이 많은 사람이 나이에 맞는 행동을 못할 때는 더 심한 욕을 먹습니다. 나이 먹은 만큼 책임도 커지는 것이죠.
장유유서란 나이 많은 사람이 나이 적은 사람에게 갑질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서로의 사회적 위치를 정하고 그에 따른 책임을 다 하라는 것이죠. 대개 옛 것을 쥐뿔도 모르는 사람들이 옛 것을 지킨다는 명목하에 여러 사람들을 피곤하게 합니다.
나이로 정해지는 서로와의 관계 속에서 한국사람들은 가장 익숙하고 자연스럽게 자신의 역할을 하며 살아갑니다. 그것이 한국 나이가 지속되는 이유죠. 나이 가지고 어린 사람 찍어누르는 사람이 잘못된 것이지. 나이 문화의 탓은 아닙니다. 물론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겠죠.
결론적으로, 저는 한국의 나이문화가 대인관계에서의 불확실성을 줄이고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기 위한 '재미있는' 문화라고 생각합니다. 행정적으로.. 여러 불편함이 있지만 이렇게 아웅다웅 살아가는 것도 재미있지 않을까요?
물론 제 나이에 맞는 '나잇값'은 똑바로 하고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