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 보편주의와 문화심리학의 도전
대학에 입학해서 처음 심리학 수업을 들었을 때가 떠오릅니다. 뼈속까지 문과인이었던지라 기대했던 심리학도로서의 첫 수업이 "뇌"라는 사실에 적잖이 당황했었습니다. 한 해가 지나 2학년이 된 저를 당황하게 만든 것은 '통계'가 전공필수라는 사실이었고, 심리학과를 졸업하는 그 순간까지 저를 혼란에 빠뜨린 것은 심리학의 모든 개념과 이론이 '영어'로 돼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심리학은 '뇌'로 시작해서 '통계'로 들어가 '영어'로 끝나는 학문입니다. 이 사실에서 현대 심리학의 정체성을 유추할 수 있는데요. 요약하자면 심리학이라는 학문은 '인간의 심리는 보편적이다'라는 전제에서 출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첫째, 심리학은 인간 심리의 생물학적 기제를 강조합니다. 뇌의 구조와 기능, 신경계, 뉴런(신경세포), 신경전달물질 등을 이해하면 인간의 행동을 알 수 있다는 것이지요. 인간의 마음이란 결국 뇌 활동의 산물이라는 것이 이 입장입니다. 뇌와 신경계, 신경전달물질이란 인종과 국적, 문화를 막론하고 '인간 종'에게 보편적일 수밖에 없으므로 인간의 마음은 보편적이라는 논리지요. 해서 많은 심리학 연구가 이루어지는 미국의 심리학 용어들이 보편적인 개념으로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입니다.
둘째, 인간의 마음이 보편적이기 때문에 '측정'이 가능해집니다. 이 측정이라는 절차는 과학에서 매우 중요한데요. 자연과학의 대표격인 물리학의 연구대상인 물리적 속성, 즉 무게, 속도, 질량 등은 모두 측정이 가능하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측정이 가능해야 객관적 관찰과 이론구축, 가설검증 같은 과학적 연구가 가능해지는 것이죠.
이것은 과학이라는 심리학의 정체성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심리학이 '과학'으로서의 정체성을 갖게 되는 순간, 심리학의 주제가 되는 인간의 마음이라는 것은 측정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측정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은 외적인 조건에 따라 그 속성이 변해서는 안됩니다. 한국에서 몸무게 50kg인 사람이 미국에 간다고 30kg가 되지 않는 것처럼 말입니다.
현대 심리학의 이러한 가정을 '당구공 모델'이라고 합니다. 한국에서 당구를 치나 미국에서 당구를 치나, 같은 힘, 같은 각도로 쳤다면 공은 한국에서나 미국에서나 같은 방향으로 움직일 것입니다. 당구공의 움직임 같은 물리적 속성처럼 인간의 마음도 문화의 영향을 받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오랫동안 심리학의 기본적인 전제였습니다.
그러나 인류학 등에서 문화에 대한 오랜 연구들이 축적되면서, 그리고 심리학 연구들에서도 문화에 따른 차이들이 관찰되면서 인간의 마음이 보편적이라는 심리학의 전제를 재고해보자는 움직임이 나타납니다. 그것이 '비교문화심리학'으로 알려진 연구의 흐름입니다.
하지만 비교문화심리학은 문화의 질적인 차이보다는 어떠한 심리적 변인(개념)이 문화에 따라 얼마만큼의 정도차이를 보이느냐에 주목합니다. 예를 들자면, 자기존중감(self-esteem)이라는 개념이 A문화에서 5만큼 측정되었다면 B문화에서는 몇 점이 나올 것이며 그 차이는 통계적으로 유의미한가 하는 것이죠. 그리고 이러한 비교문화심리학의 입장이 현대 심리학에서 문화를 고려하는 입장입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비교문화심리학의 연구에서 문화의 차이가 존재한다는 말을 할 수 있으려면, 두 문화에서 측정된 심리적 개념이 보편적이라는 전제가 있어야 합니다. 두 문화에서 같은 개념이 동일하게 측정되었다는 가정이 있어야 그 측정치들의 비교가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두 문화에서 측정된 심리적 개념(예를 들어 자기존중감)은 동일한 개념일까요? A문화 사람들과 B문화 사람들이 자기존중감에 대해 같은 것들을 떠올리면서 설문에 응답했을까요? 그 응답은 아마도 자기(self)의 개념과 자기존중이라는 행위가 두 문화에서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지며 어떤 의미를 갖는지에 따라 다를 것입니다.
그러나 현 심리학에서는 두 문화에서 측정한 값들을 단순히 비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첫번째 문제입니다. 두 문화에서 측정한 값들이 동일한 것을 의미한다고 가정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따라서 두 수치의 의미보다는 두 수치의 차이에 주목하게 됩니다. 여기에서 두 번째 문제가 발생합니다.
우선, 비교문화심리학에서는 이 점수들의 차이를 문화의 차이라고 설명하고 있는데요. 이런 식의 설명에는 논리적 오류가 숨어있습니다. 예를 들면, 개인주의 문화의 사람들이 자아존중감이 높은 이유는 개인주의 문화가 사람들의 자존, 자립, 자기실현 등의 가치를 강조하여 긍정적 자기상을 조장하기 때문이고, 집합주의 문화를 가진 사람들이 자아존중감이 낮은 이유는 집합주의 문화는 개인의 독특성보다는 집단의 지향과 집단 내에서의 조화를 우선시하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이러한 설명은 서로 다른 문화에 속한 개인들에게 내재화된 서로 다른 문화 성향이 행동의 차이를 만들어낸다고 설명하고, 다시 이 행동의 차이를 지표로 삼아 다시 개인들의 문화 성향을 정의하는 방식으로 다분히 순환론적입니다. 개인주의 사람들은 왜 개인주의적이냐? 개인주의 문화에서 살아서 그렇다. 이것이 순환론적 설명입니다. 돌고 도는 것이죠.
또 하나는, 점수 차이의 해석에 관한 문제입니다. 예를 들어 개인주의 문화의 행복도는 집단주의 문화보다 높습니다. 여기에 대한 문화적 설명은, 개인주의 문화는 개인이 행복감을 보다 잘 느낄 수 있도록 해 주고, 집단주의 문화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죠. 그러면 한국 같은 집단주의 문화 사람들이 행복하려면 어떻게 해야되겠습니까? 개인주의 문화를 따라가야겠지요.
다소 거칠게 말씀드렸지만 현재의 심리적 개념들에 대한 문화차이는 대개 이런 패턴을 보입니다. 집단주의 문화 사람들은 개인주의 문화 사람들에 비해 자기존중감이 낮고, 행복도가 낮고, 개인이 추구하는 가치보다는 집단 안에서 튀지 않는 것이 중요하고.. 자연스럽게 서구 개인주의적 가치들이 동양적 가치들보다 더 낫다는 인식을 확장시키고 있습니다.
비교문화 연구결과의 이러한 해석은 서양이 동양보다 우수하기 때문에 세계의 주도권을 쥐고 있다는 '사회진화론적' 해석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 때문에 각별한 주의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미국에서나 한국에서나 그러한 주의를 기울이는 연구자들을 본 기억은 거의 없군요.
이런 문제들은 모두 '인간의 마음은 보편적'이라는 가정 때문에 비롯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마음이 보편적인데 문화에 따른 차이가 존재한다? 그것은 정도의 차이일 수밖에 없고 그 차이의 정도는 문화의 수준 차이 같은 단선적인 원인으로 설명할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문화심리학은 현 심리학의 이러한 생각에 의문을 제기합니다. 인간의 마음이 보편적이지 않다면? 문화에 따라 구성되는 심리적인 개념이 다른 문화의 그것과 다르다면? 그리고 그것을 경험하고 공유하는 방식이 문화마다 차이가 있다면? 그러한 차이는 통계적으로 설명해 낼 수 없습니다.
비교문화심리학의 성과를 무시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비교문화심리학은 인간의 마음과 행동에 문화가 지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지적했습니다. 그 자체로도 심리학의 지평을 크게 넓혔지요. 그러나 더이상 '문화에 차이가 있다'는 사실이 신기할 때는 지났습니다. 이제 문화의 차이가 어디에서 오는지, 문화에 따른 인간 마음의 질이 어떻게 다른지를 밝혀내야 할 때입니다.
인간의 행동에 어느 정도의 보편적 요소는 있을 지 모릅니다. 심리학이 고수하고 있는 과학으로서의 정체성을 고려한다면 측정 가능한 변인들을 연구하는 것도 필요하겠지요. 하지만 현 심리학의 이론들로 세계의 모든 문화에서 나타나는 인간 행동들을 이해할 수 있을까요?
한국에서 태어나고 자라고 살고 있는 한국 심리학자로서, 현 심리학 이론들을 가지고 한국인들의 마음과 행동을 설명하기에는 한계에 부딪칠 때가 많은 것이 사실입니다. 심리학에서 한국은 동양 집단주의 문화의 일원으로만 다뤄지니까요.
문화심리학의 한 분파인 토착심리학(indigenous psychology)이 지식세계에 만연한 지적 제국주의와 그 식민지들에 대한 반발로써 성립되었다는 사실은 많은 것을 시사합니다.
우리는 누구의 말로 우리의 마음을 이해하고 있습니까?
3.1절, 만천하에 대한민국의 독립을 외쳤던 그 날에 우리의 '마음의 독립'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