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은 이력서에도 새순은 돋는다

7년의 공백 후, 나를 긍정하기까지

by 정윤주 한걸음랩

내가 이 이력서를 쓰기까지 몇 주를 망설였던가.


공고를 본 건 12월 초중순이었다. 교육공학 전공을 살릴 수 있는 AI 인재 양성 프로그램이라는 점에서 내가 찾던 업무였다. 하지만 장거리 출퇴근, 지방 출장 가능성이 마음에 걸려 포기했다. ‘내가 지원한들 붙을까’라는 자기 비하적 회피도 없진 않았다.


그러다 한 AI 컨퍼런스를 듣고 마음이 바뀌었다. AI는 내가 앞으로 꼭 알아야 하는 분야라는 확신과 더불어, 내 졸업논문이나 경력, 역량이 이 직무와 잘 연결될 수 있겠다는 가능성이 보였다.


다시 날 시작하게 만든 동기는 계속 기억하고 싶다 (출처: Unsplash의 Cristofer Maximilian)


'그래, 다시 시작할 때 필요한 건 기술도 경력도 아닌, 나를 움직일 동기였다.

이게 다시 시작하려는 모든 사람이 마주하는 가장 어려운 과제일 터.'


주변 사람들에게 "나 여기 꼭 지원해 볼 거야"라고 당차게 말하며 꼭 지원하겠다고 마음먹었다. 근데 막상 이력서를 쓰려니 다시 두려움이 찾아왔다. 눈 딱 감고 출력한 이력서는 아직 따뜻한 기운이 손끝에 남아 있는데, 왜 이리도 낡아 보일까. 내 이력은 과거에 머물러 희뿌옇게 고여있었다. 자신감이 확 떨어졌다. 이런 뒤쳐진 이력으로 내가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그래서 노트북을 껐다.


내 눈에 보였던 낡은 낙엽 같던 내 이력서 (출처: Unsplash의 Mark de Jong )


잠시 그 비루한 생각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었다.


하루가 지나고 다시 노트북을 켰다. 이 날은 이력서가 아니라 채용공고부터 출력해서 천천히 읽어봤다. 어떤 업무 역량을 원하는 것일까, 여기서 필요한 경험은 무엇일까, 어떤 흥미와 열정을 가진 사람을 원하는 것일까. 채용 공고에서 뽑은 단어들을 일단 포스트잇에 적어 텅 빈 벽에 붙였다. 이 단어들과 매치시킬 수 있는 내 과거의 경험들은 무엇이 있을까?


그 낡은 이력서를 다시 펼쳤다. 이번엔 날짜는 보지 않았다. 흐른 시간보다 내가 쌓아온 경험만 보기로 했다. 난 어떤 상황에서 무엇을 고민했고 어떻게 해결해서 어떤 성과를 냈는가에만 집중했다. 나의 경험과 역량을 포스트잇에 있는 대로 적었다. 그리고 앞서 붙여둔 역량과 비교해 보니, 생각보다 괜찮았다. 그걸 보자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를 객관적으로 파악하기 좋은 도구, 포스트잇! (출처: Unsplash의 Brands&People )


'비벼볼 만하겠는데?'


이건 그냥 단순한 자신감이 아니었다. 난 이 나이가 되어서야 처음으로 나 스스로를 낮게 보지 않게 된 것이었다. 난 어릴 때부터 뭔가를 잘 해내면 그건 당연하고 다행인 거고 더 해내지 못한 아쉬움이 컸던 사람이었으니까.


이력서를 다시 쓴다는 건 그냥 그 말 그대로의 작업이 아니었다. 이건 내가 나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게 된 계기이자, 지금의 나를 긍정하고 받아들인 과정이었다. 발 끝부터 차오르는 나 자신에 대한 뿌듯함이 마치 손가락 사이로 스쳐가는 햇살마저 다 느껴지는 듯한 온기로 다가왔다.


그렇게 7년 만에 다시 꺼낸 내 이력서는 하루 사이 전혀 다른 모습이 되었다. 희뿌연 물속에 잠겼던 낙엽 같던 이력서가 연둣빛 새순처럼 생기 있게 빛나기 시작했다. 나는 비로소 내 과거를 진심으로 받아들였고, 그 시간이 쌓여 지금의 내가 되었다는 걸 온전히 긍정했다.


이력서는 그렇게 다시 쓰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