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합격을 피드백으로 바꾸는 법에 대하여
10년 만에 지원했던 채용 공고에서 떨어졌다.
면접조차 보지 못한 채, 문자와 이메일로 짧게 끝난 불합격 통보는 생각보다 헛헛했다. 여러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경력이 너무 예전 경력이어서 그런가, 에세이를 잘못 쓴 걸까, 전문적이지 못했나보다, 원하던 이력이 아닌가보다. 그러곤 앞으로도 계속 떨어지겠구나 싶은 생각에 휩싸였다.
내 지난 경력은 변하지 않으니까.
취업을 준비하던 20대 때가 떠올랐다. 참 많이도 떨어졌고, 깊이 좌절했고, 자주 울었다. 끝없이 침잠했던 그 시기에 미국에서 온 막내 고모를 만나러 언니와 함께 이태원에 갔다. 무슨 밥을 먹었는지 어떤 대화를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창가에 앉아 창밖을 보며 문득 뛰어내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만 선명하다. 그 순간 깨달았다. '나 지금 문제가 있구나.'
그 길로 처음 상담센터를 찾았다. 처음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지만, 상담을 거듭할수록 마음이 가벼워졌다. 마치 장독 속에 묵은 장 같은 속내를 퍼부어버리는 것 같았다. 그렇게 난 상담선생님께 내 마음 속 그릇에 늘러 붙어 있던 것들을 박박 긁어 보였다. 마지막 상담을 받고 메모장에 남긴 선생님의 말은 여전히 유효하다.
"나의 감정은 항상 타당하다.
가장 깊은 곳까지 나를 주기적으로 관찰해라.
이성과 감정을 둘 다 잘 키우는 것이 어른이 되는 것이다."
선생님께 죄송하지만 난 아직 그런 어른이 되지 못했나보다. 난 경력단절 기간이 길어질수록 회사 동기들이 승진하고 아이를 낳고도 열심히 회사를 다니는 걸 볼 때마다 이따금 후회했다. 그냥 버텼다면 어땠을까. 그 생각이 들면 한 며칠동안 우울한 기분에 빠져 지냈다. 하지만 그 뿐이다. 이미 지나간 일이고, 난 내 결정을 후회하지 않는다. 내 전공을 아끼고 사랑하고, 그때 대학원을 간 내 결정은 용기 있는 선택이었으니까.
불합격한 날, 신랑은 내게 술을 권했고 몇 주 만에 나도 술을 조금 마셨지만, 기분이 나아지진 않았다. 대신 화장실 거울과 샤워부스를 닦았다. 어떤 물 때는 몇 번을 닦아도 잘 안닦이더라. 멀리서 보면 깨끗하고 맑아진 것 같은데 가까이에서 보면 흔적이 남아있었다. 잘 지워지지 않는 물때처럼, 내 과거의 이력도 아무리 닦아내려 해도 흔적이 남는다. 물때는 어찌 지워지겠지만, 시간의 흔적은 그저 받아들여야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내 이력서도 그랬다.
시간은 지났고 이력은 낡았고, 나는 지금을 살아야 했다.
설거지를 하고, 세탁기를 돌리고, 아이들을 씻기고 나서야 컴퓨터 앞에 다시 앉았다. 일상의 루틴을 하나씩 하다 보니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앞으로도 계속 불합격만 할 것 같은 비참한 기분에서 빠져 나왔다. 난 지금 한 개 떨어진 것 뿐이고, 내가 지금 받은 불합격은 실패가 아니라 피드백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컴퓨터를 키자마자 가장 먼저 한 건 그 공고 담당자에게 이메일을 쓰는 일이었다. 떨어졌지만 정말 좋은 경험이었다고, 이 프로젝트가 잘 되길 진심으로 바란다고. 이메일을 보내고 나니 후련했다. 나는 분명히 성장했다. 이력서는 낡았지만 나는 낡지 않았다. 20대의 암흑 같던 취업 준비기간을 떠올리며, 지금의 나는 훨씬 단단해졌음을 느낀다. 나는 다시 나를 설레게 하는 새로운 공고를 기다리며 지금의 나를 더 잘 준비하고 가꿀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럴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