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좌가 0이 된 순간, 누군가 내 안에서 비명을 질렀다.
나는 이성적인 사람이었다. 감정을 통제할 줄 알았고, 어떤 상황에서도 침착함을 잃지 않는 편이었다. 적어도 그렇게 믿었다. 하지만 '파산'이 내 삶의 문을 부수고 들어온 순간, 그 믿음은 산산이 부서졌다. 그리고 폐허 속에서 뭔가가 눈을 떴다.
진화심리학자들은 말한다. 우리 뇌의 가장 깊은 곳에는 20만 년 전 아프리카 초원을 살던 원시인이 아직 살고 있다고.
이 원시인에게 가장 무서운 건 굶주림이 아니다. 사냥감은 다시 잡으면 된다. 진짜 공포는 '무리에서 버려지는 것'이다.
맹수가 우글거리는 야생에서 혼자가 된다는 건 곧 죽음이다. 그래서 우리 뇌는 지위의 추락, 자원의 상실을 맹수만큼이나 위협적인 것으로 인식하도록 진화했다.
계좌가 백지가 된 순간, 내 안의 원시인은 미친 듯이 발광했다.
넌 이제 쓸모없어. 무리가 널 버릴 거야. 혼자 남겨지고, 비참하게 죽을 거야.
이성은 채찍을 들었다.
본능을 후려치기 시작했다.
닥쳐. 진정해. 괜찮다고 했잖아. 다시 벌면 돼. 울지 마. 무너지지 마. 티 내지 마.
그게 '자기 혐오'의 실체였다.
생각해보면 이상하다. 이미 바닥에 떨어진 사람이 왜 스스로를 더 짓밟는 걸까. 왜 상처 입은 자신을 보듬는 대신 가혹하게 공격하는 걸까.
진화적으로 보면 이유가 있다.
자기 혐오는 '무리에서 쫓겨나는 것'을 막기 위한 내부 검열 시스템이다. 부족 사회에서 추방은 곧 죽음이었다. 그래서 우리 뇌는 남들에게 비난받기 전에, 먼저 스스로를 비난해서 행동을 교정하려 한다.
네가 잘못했으니까 네가 맞아야지.
나는 살기 위해, 내 안의 나를 죽일 듯이 미워했다.
그제야 이해가 갔다.
왜 양팔이 그토록 먹먹했는지.
상상해보라. 누군가의 입을 틀어막고, 발버둥 치는 몸통을 24시간 껴안아 제압하고 있다고. 팔에 피가 통하겠는가. 근육은 굳고, 감각은 마비될 것이다.
내 팔의 먹먹함은 병이 아니었다.
질식의 흔적이었다.
내가 나를 억누르고, 비틀고, 조르느라 생긴 보이지 않는 전쟁의 상처였다.
겉으로는 괜찮았다. 차분하게 웃으며 일했다. 전화 받고, 보고서 쓰고, 점심 먹었다.
하지만 수면 아래에서 나는 나를 학대하고 있었다. 팔이 저려올 정도로. 감각이 사라질 정도로.
헤르만 헤세의 소설 《데미안》에 이런 장면이 나온다.
주인공 싱클레어는 두 개의 세계 사이에서 찢긴다. 부모님이 있는 따뜻하고 도덕적인 '밝은 세계'와, 욕망과 본능이 꿈틀대는 '어두운 세계'.
싱클레어는 자신이 밝은 세계의 사람인 줄 알았다. 하지만 어두운 세계의 힘 앞에서, 그 믿음은 너무나 쉽게 무너진다.
싱클레어는 말한다.
"내 속에서 솟아 나오려는 것, 바로 그것을 나는 살아보려 했다. 왜 그것이 그토록 어려웠을까."
나는 반대였다.
내 속에서 솟아 나오려는 것—그것을 죽이려 했다.
왜 그것이 그토록 두려웠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