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원평의 소설 《아몬드》의 주인공 윤재는 뇌 속 편도체가 고장 난 소년이다. 그는 세상이 무섭지 않다. 눈앞에서 끔찍한 비극이 벌어져도 심장이 뛰지 않는다. 세상은 감정이 없는 그를 '괴물'이라 불렀다.
나는 종종 상상했다.
2018년 겨울, 자고 일어나니 통장의 숫자가 전부 증발해버린 그때, 내가 그 '괴물'이었다면 어땠을까.
텅 빈 계좌를 보고도 무표정하게 밥을 넘기는 나. 빚 독촉 문자를 받고도 맥박 하나 변하지 않고 깊은 잠에 빠지는 나. "돈은 다시 벌면 됩니다"라고 기계처럼 말하며 내일의 차트를 분석하는 나.
그랬다면 더 잘 살 수 있지 않았을까?
상상의 끝에서 서늘한 진실을 마주했다.
만약 그때 공포가 없었다면, 나는 멈추지 않았을 것이다.
전 재산을 잃고도 통증이 없으니 무표정한 얼굴로 은행에 달려가 대출을 되는 대로 받았을 것이다. 밤새 꿀잠을 자고 맑은 정신으로 더 큰 판돈을 걸었을 것이다. "감정은 투자에 방해될 뿐입니다"라고 합리화하며 낭떠러지까지 전속력으로 질주했을 것이다.
브레이크가 고장 난 자동차처럼.
공포를 느끼지 못한다는 건 그런 것이다. 멈춰야 할 때를 눈치채지 못하는 것. 낭떠러지 앞에서도 액셀을 밟는 것. 그것은 용기가 아니라 시스템의 오작동이다.
나를 멈춰 세운 건 현명한 이성이 아니었다.
나를 벼랑 끝에서 살린 건, 그토록 지우고 싶어했던 공포였고, 통증이었다. 내 인생의 엔진이 과열되어 폭발하기 직전, 몸이 강제로 걸어버린 비상 브레이크였다.
브레이크가 걸렸다는 건 알았다.
그러나 차가 멈췄다고 해서, 바로 문을 열고 나올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여전히 찌그러진 차 안에 앉아,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핸들을 잡고 있었다.
인간에게는 고통을 피하려는 본능만큼, 자신의 불행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본능도 강력하다.
우리는 이것을 '연기'라고 부른다.
평온한 일상 속에서 우리는 수없이 연기를 하며 산다. 속으로는 울어도 겉으로는 웃을 수 있고, 겁이 나도 센 척할 수 있다.
남들에게 행복해 보이기 위해, 아니 스스로가 괜찮다고 최면을 걸기 위해 가면을 쓴다.
나도 그랬다. 5천만 원을 잃은 직후에도 친구들에게 "수업료 낸 셈 치지 뭐"라고 쿨하게 말하며 술잔을 기울였다. 상처받지 않은 척, 여전히 '번듯하고 미래가 창창한 직장인'이라는 껍데기를 필사적으로 유지하려 했다.
하지만 몸이 비명을 지르기 시작하자 상황이 달라졌다.
원인 모를 소화불량. 밤새 심장을 옥죄는 불면증. 양팔의 기분 나쁜 감각 이상. 뜬금없이 찾아와 숨통을 조이는 명치의 답답함.
이 신체화된 고통들은 내 몸의 모든 에너지를 오직 '생존'에만 쏟아붓게 만들었다.
고통은 인간이 더 이상 연기를 할 수 없게 만든다.
연기란 막대한 에너지가 드는 고도의 정신 노동이다. 여유가 있을 때나 가능한 사치다.
몸이 죽을 만큼 아파오자, 뇌는 연기에 쓸 에너지마저 회수해 생존에 돌려버렸다. 쿨한 척, 괜찮은 척할 힘이 1%도 남지 않았다.
배터리가 방전된 로봇처럼, 가면이 툭 하고 떨어져 나갔다.
고통이 내 멱살을 잡고 차 밖으로 끌어냈다.
연기 그만해. 넌 지금 춥고, 아프고, 두려워. 그게 진짜 너야.
멱살 잡혀 마주한 현실은 참혹했다.
내가 믿어왔던 '불안 없는 완벽한 세계'는 산산이 조각나 있었다. 그 폐허 위에서 나는 꽤 오랫동안 망설였다.
"이건 현실이 아니야"라고 되뇌며, 깨진 가면 조각들을 주워 다시 붙여보려 애썼다.
세상이 원래대로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 하지만 한 번 무너진 세계는 다시 세워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떠나기가 쉽지 않았다. 그곳은 안전지대가 아니라 서서히 썩어가는 도피처일 뿐인데도.
나아갔다고 착각했다가 다시 도망치고, 받아들였다고 믿었다가 다시 무너지는 날들이 이어졌다. 깨진 틈을 메워보려다 파편에 손가락이 베였다.
그 좁고 어두운 틈 사이에서 수없이 비겁해지고, 도망치기를 반복했다.
그러는 와중에도 시간은 무심히 흘렀고, 계절은 여러 번 바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