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트코인은 믿음일까, 실체일까

유발 하라리의 상호주관적 실체와 비트코인의 본질에 대하여

by NT

인류가 사나운 포식자들을 제치고 지구의 지배자가 된 비결은 무엇일까.


유발 하라리는 그의 저서 사피엔스에서 그 답을 ‘허구를 믿는 집단적 능력’에서 찾는다. 그는 우리가 마주하는 세계를 세 가지 층위의 실체로 구분한다. 산과 강처럼 인간의 인식과 무관하게 존재하는 객관적 실체, 개인의 마음속에만 존재하는 주관적 실체, 그리고 수많은 사람이 공통으로 믿기에 현실에서 힘을 발휘하는 상호주관적 실체다.


돈, 국가, 법, 인권은 물리적 실체가 없다. 그러나 우리가 그것이 존재한다고 합의하고 믿는 순간, 수백만 명의 낯선 이들이 질서 있게 협력하게 만드는 강력한 힘이 된다. 하라리는 인류의 역사를 이러한 상호주관적 실체, 즉 ‘상상 속의 질서’를 확장해 온 과정으로 정의한다.


오늘날 우리는 가장 현대적이고 정교한 상호주관적 실체를 목격하고 있다. 바로 비트코인이다.


비트코인은 눈에 보이지 않는 코드 조각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전 세계 수천만 명의 사람들은 이것을 ‘가치 저장의 수단’이자 ‘검열 불가능한 돈’으로 받아들이는 데 합의했다. 전통적인 화폐가 국가라는 상호주관적 실체의 보증에 기대어 존재한다면, 비트코인은 특정 주체 없이 참여자들의 네트워크 합의만으로 작동한다.


흥미로운 점은 개별 주체들이 비트코인을 믿지 않는다고 해서 이 시스템이 즉시 사라지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 신뢰를 유지하기 위해 이미 투입된 막대한 물리적 비용과 전 세계적으로 분산된 합의 구조가 개별 주관을 넘어선 사회적 실체로 기능하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비트코인은 여전히 상호주관적 실체이면서도, 그 믿음이 유지되는 방식만큼은 기존의 화폐와 근본적으로 다르다.


하라리는 사피엔스에서 상호주관적 실체의 위험성도 경고하는데, 오직 믿음에 기반하기 떄문에 인간들이 믿음을 거두는 순간 신기루처럼 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수많은 법정화폐가 초인플레이션 속에서 종이 조각이 된 역사가 이를 증명한다.


이 지점에서 비트코인은 독특한 해법을 제시한다.

상호주관적 신뢰를 유지하는 비용을 객관적 실체인 물리 법칙에 고정시킨 것이다.


그 핵심 기제가 바로 작업 증명(Proof of Work, PoW)이다. 작업 증명은 단순히 디지털 장부의 숫자를 바꾸는 행위가 아니다. 현실 세계에서 막대한 전기 에너지를 소비해 연산을 수행하는 물리적 과정이다. 누군가 비트코인 네트워크의 기록을 조작하려 한다면, 그는 전 세계 채굴자들이 동시에 투입하는 에너지보다 더 큰 물리적 자원을 확보해야 한다. 이는 의견이나 선언의 문제가 아닌 에너지 보존 법칙과 비용의 문제다.


중요한 점은 작업 증명이 ‘허구를 제거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비트코인은 여전히 사람들이 가치 있다고 믿는 상호주관적 실체다. 다만 작업 증명은 그 허구를 유지하는 데 드는 비용을 현실 세계의 물리 법칙에 연동시킨다. 그 결과 신뢰는 쉽게 배신될 수 없는 것이 된다. 믿음을 철회하는 데 드는 비용이 극단적으로 높아지는 순간, 허구는 변덕스러운 약속이 아니라 물리적으로 저항력을 가진 질서로 변한다.


이러한 비트코인의 특성은 린다 효과(Lindy Effect)와 맞닿아 있다. 린다 효과란 사라지지 않는 기술이나 아이디어의 기대 수명이 현재까지 살아남은 시간에 비례한다는 개념이다. 비트코인은 탄생 이후 수많은 해킹 시도와 각국 정부의 규제와 내재 가치 논쟁 속에서 ‘이제 끝났다’는 사망 선고를 수백 차례 받아왔다. 그럼에도 네트워크는 멈추지 않았고 블록은 지금까지도 계속 쌓이고 있다.


시간이 흐를수록 비트코인이라는 상호주관적 실체는 역설적으로 더 단단해진다. 어제 살아남았다는 사실이 오늘의 신뢰가 되고, 그 신뢰가 다시 내일의 생존 가능성을 높이기 때문이다. 이는 비트코인이 인류의 새로운 신뢰 실험으로 앞으로도 지속될 가능성을 크게 높힌다.


인류는 지금까지 왕과 중앙은행, 정부 등의 인간의 권위를 믿는 상호주관적 실체 위에 문명을 건설해 왔다. 이 지점에서 비트코인은 물리 법칙과 수학이라는 비인격적 질서를 신뢰의 기초로 하는 독특한 상호주관적 실체를 제시한다.


이는 권위를 제거한 유토피아라기보다는 권위의 역할을 물리적 비용으로 대체한 시스템에 가깝다. 비트코인은 하라리가 말한 ‘허구’에서 출발했지만, 작업 증명을 통해 물리 세계에 닻을 내리고 린다 효과를 통해 시간의 검증을 통과하고 있다.


이는 단순한 투자 자산을 넘어, 인류의 신뢰 체계가 ‘누가 말했는가’에서 ‘실제 얼마의 비용이 지불되었는가’로 이동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우리는 어쩌면 가장 허구적인 디지털 세계에서, 가장 실재적인 가치를 지닌 ‘새로운 어떤 것’을 마주하고 있는 첫 세대 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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