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16세기, 서아프리카의 붉은 태양 아래 한 흑인 청년이 서 있다. 그의 손에는 부족의 전사들이 목숨을 걸고 사냥한 상아와 사금 주머니가 들려 있다. 맞은편에 선 유럽 상인은 입가에 묘한 미소를 띠며 작은 주머니를 내민다.
그 안에서 영롱한 빛이 쏟아진다. 유리구슬이다.
청년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서아프리카인들에게 유리는 보석보다 귀한 신비의 물질이었다. 투명하게 빛을 투과하는 이 아름다운 물체를 만들기 위해서는 엄청난 기술과 시간이 필요하다고 믿었다.
청년은 주저 없이 자신의 피와 땀이 어린 금을 건네주고, 그 작은 유리알을 받아 든다. 그는 자신이 현명한 거래를 했다고 믿으며 행복하게 집으로 돌아간다.
그는 몰랐다. 저 바다 건너 유럽의 베네치아 공장에서는 그가 평생을 바쳐야 얻을 수 있는 이 유리구슬이 매일 수만 개씩 기계적으로 쏟아져 나오고 있다는 사실을.
이것은 무역이 아니었다. 보이지 않는 약탈이었다.
린 알든은 이 비극적인 역사를 통해 돈의 냉혹한 법칙을 설명한다. 그것은 바로 만들기 쉬운 돈(Easy Money)을 가진 자가 만들기 어려운 돈(Hard Money)을 가진 자의 부를 흡수한다는 법칙이다.
시계를 19세기로 돌려, 태평양 한가운데 작은 섬 얍(Yap)으로 가보자. 이곳에는 더 기이한 돈이 있었다. 바로 집채만한 석회암 바퀴, '라이 스톤(Rai Stones)'이다.
이 섬에는 석회암이 나지 않았다. 얍의 남자들은 카누를 타고 400km나 떨어진 먼 섬으로 원정을 떠났다. 변변한 도구도 없이 맨손으로 바위를 깎고, 그 거대한 돌을 배에 실어오는 과정에서 많은 이가 파도에 휩쓸려 죽거나 다쳤다.
그래서 라이 스톤은 단순한 돌덩이가 아니었다. 그것은 부족민들의 용기이자 희생이었으며, 무엇보다 '누구도 쉽게 만들 수 없다'는 절대적인 믿음이었다. 그 믿음 위에서 섬의 경제는 평화롭게 돌아갔다.
하지만 1871년, 데이비드 오키프라는 아일랜드 선장이 표류 끝에 이 섬에 도착하며 비극은 시작된다. 그는 원주민들이 이 돌덩이를 신주단지 모시듯 한다는 것을 간파했다.
그는 배를 타고 돌아가 최신식 폭약과 철제 도구를 싣고 돌아왔다. 원주민들이 수년에 걸쳐 피땀 흘려 깎던 돌을, 그는 다이너마이트로 '콰광' 하고 터뜨려 하루에도 수십 개씩 찍어냈다.
오키프는 자신이 '복제'한 돌돈을 원주민들에게 나눠주고, 대신 코코넛과 해삼 같은 실물 자원을 헐값에 사들였다. 섬에는 전례 없이 많은 돈이 넘쳐났다. 사람들은 부자가 된 기분에 취했다. 하지만 곧 깨달았다. 옆집 순이 아빠가 목숨 걸고 가져온 옛날 돌돈과 오키프가 폭약으로 깨트린 돌돈이 섞이자, 모든 돌의 가치가 쓰레기가 되어버렸다는 것을.
성실하게 일했던 원주민들의 자산은 증발했고 오키프는 섬의 경제를 지배하는 왕이 되었다.
나는 이 잔혹한 이야기를 읽으며 등골이 서늘해졌다. 수백 년 전 원시 부족의 무지함 때문이 아니었다. 지금 이 순간, 나의 삶이 그들과 너무나 닮아있기 때문이다.
나는 매일 회사에서 내 젊음과 시간을 갈아 넣는다. 얍 섬의 원주민이 맨손으로 바위를 깎듯 나 역시 묵묵히 성실함이라는 도구로 노동을 한다. 그 대가로 나는 '원화(KRW)'라는 종이돈을 받는다.
그런데 저 멀리, 거대한 은행과 정부라는 이름의 현대판 오키프들이 있다. 그들은 내가 피땀 흘려 버는 그 돈을, 엔터 키 하나로 1초 만에 수조 원씩 찍어낸다. 양적 완화, 경기 부양, 유동성 공급... 이름만 그럴듯할 뿐, 본질은 다이너마이트로 돌돈을 복제하는 것과 다를 것이 무엇이랴...
그들이 돈을 쉽게 찍어낼수록 내가 가진 돈의 가치는 희석된다.
10년 전부터 들어온 소중한 적금은 그때의 가치의 1/2이 되었다. 아파트 가격이 미친 듯이 오른 것처럼 보이지만, 아니다.
우리가 쓰는 돈이 흔해빠진 유리구슬이 된 것이다. 넘쳐나는 라이 스톤이 된 것이다.
이는 분명 문제가 있다. 서아프리카 청년이 유리구슬을 목에 걸고 좋아할 때, 유럽 상인들은 그들의 황금을 배에 실었다. 오늘 내가 월급이 들어왔다며 안도할 때, 누군가는 내가 바친 '노동 시간'을 헐값에 가져가고 있다.
우리의 보석은 언제부터 돌멩이가 되었을까. 아니, 애초에 우리는 유리구슬을 보석이라고 착각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약탈의 역사는 끝나지 않았다. 단지 도구만 더 세련되게 바뀌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