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1971년 8월 15일, 일요일 저녁. 미국의 인기 TV 쇼 <보난자>가 방영되던 도중 갑자기 방송이 중단되고 리처드 닉슨 대통령이 화면에 등장했다.
그는 긴장된 표정으로 성명서를 읽어 내려갔다. 투기꾼들로부터 달러를 보호하기 위해 일시적인 조치를 취하겠다는 내용이었다. 그 연설의 핵심은 단 한 문장이었다.
"나는 재무부 장관에게 달러를 금으로 바꿔주는 것을 일시적으로 중단하라고 지시했습니다."
그 순간, 인류의 화폐 역사는 두 조각으로 쪼개졌다.
수천 년간 돈은 곧 '금(Gold)'이었다. 종이돈은 금을 맡겨두었다는 보관증에 불과했다. 은행에 1달러를 가져가면 그에 상응하는 금을 내주어야 한다는 것은 깨질 수 없는 약속이었다.
그날 밤, 미국 대통령은 전 세계를 향해 이렇게 선언한 셈이었다.
"이제부터 은행에 종이를 가져와도 금은 주지 않습니다. 그래도 그 종이를 계속 돈으로 쓰십시오."
약속은 깨졌다. 일시적이라던 그 조치는 5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풀리지 않았다. 그날 이후, 우리가 쓰는 돈은 더 이상 금 보관증이 아니었다. 그저 국가가 "이것은 돈이다"라고 법으로 정한 종이, 즉 법정 화폐(Fiat Currency)가 되었다.
'피아트(Fiat)'라는 말은 라틴어로 "그렇게 돼라(Let it be done)"는 뜻이다. 신이 "빛이 있으라"라고 말하자 빛이 생겼듯이, 정부가 "이 종이는 돈이다"라고 명하니 돈이 되었다는 오만한 의미가 담겨 있다.
도대체 왜 미국은 황금이라는 닻을 끊어버렸을까?
이유는 단순했다. 가진 것보다 더 많이 쓰고 싶었기 때문이다.
당시 미국은 베트남 전쟁을 치르느라 막대한 돈이 필요했다. 금본위제 하에서는 금고에 있는 금만큼만 돈을 찍을 수 있었다. 전쟁을 하려면 세금을 더 걷어야 했는데, 국민들의 반발이 무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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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미국은 몰래 금보다 더 많은 달러를 찍어냈다. 냄새를 맡은 프랑스와 영국이 미국에 "종이는 됐으니 내 금을 내놓으라"며 상환을 요구하자, 금고가 텅 빈 것이 들통날까 봐 아예 금고문을 잠가버린 것이다.
린 알든은 이 사건을 두고 화폐의 본질이 작업 증명(Proof of Work)에서 무력 증명(Proof of Force)으로 바뀌었다고 설명한다.
금은 채굴하기 위해 땅을 파고 땀을 흘려야 했다. 누군가의 노력과 에너지가 들어갔다는 것이 증명되었기에 가치가 있었다. 이것이 작업 증명이다.
하지만 1971년 이후의 돈은 아무런 노력 없이 인쇄기만 돌리면 나온다. 그렇다면 이 종이 조각의 가치는 도대체 무엇이 보증하는가?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폴 크루그먼과 MMT(현대화폐이론)의 창시자 워렌 모슬러는 소름 끼치도록 솔직한 답을 내놓는다.
"법정 화폐는 총을 든 사람들에 의해 뒷받침된다."
정부는 우리에게 이 종이돈을 쓰라고 강요하지 않는다. 다만, 단 한 가지 의무를 부과한다.
"세금은 반드시 이 종이돈으로만 내라."
만약 당신이 이 종이돈을 거부하고 세금을 내지 않는다면? 국세청 직원이 찾아올 것이다. 그래도 거부하면 경찰이, 그다음에는 군대가 올 것이다. 즉, 현대의 돈은 국가의 공권력(Force)과 징세권이 유지되는 한에서만 가치를 가지는 '세금 납부 쿠폰'일뿐이다.
나는 지갑 속의 만 원짜리를 꺼내 본다. 이 종이의 가치를 지키고 있는 것은 한국은행 지하 금고의 금덩이가 아니다. 나에게 세금을 걷으러 올 수 있는 국가의 힘이다.
1971년, 황금의 족쇄가 풀리자마자 전 세계 정부들은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돈을 찍어내기 시작했다. 전쟁을 하고, 복지를 늘리고, 빚을 갚기 위해 쉴 새 없이 윤전기를 돌렸다.
돈의 양이 늘어날수록 내가 가진 돈의 가치는 희석된다. 짜장면 값이 500원에서 7,000원이 된 것은 짜장면이 귀해져서가 아니다. 돈이 그만큼 흔해빠진 종이가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것을 '인플레이션'이라 부르지만, 정확한 이름은 '보이지 않는 세금'이다. 정부는 내 주머니에서 돈을 직접 꺼내가는 대신, 돈을 새로 찍어내 내 돈의 구매력을 몰래 훔쳐가고 있다.
금고문이 잠기던 그날, 우리는 가치를 가진 돈을 잃어버렸다. 그리고 닻을 잃은 배처럼, 출렁이는 종이돈의 파도 위에서 멀미를 하며 표류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