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심히 일하는데 왜 더 가난해질까

#6.

by NT

거실에 놓인 85인치 4K TV를 본다. 불과 5년 전만 해도 이 정도 크기의 TV는 꽤 비쌌다. 쉽게 지갑을 열기 쉽지 않았다. 지금은 어떤가? 중소기업 제품이라면 백만 원 초반대에도 살 수 있다. 심지어 그때보다 성능은 훨씬 좋아졌는데 가격은 낮아졌다.


이번엔 시선을 수도권 아파트로 돌려보자. 10년 전, 내가 사회초년생일 때 쳐다보았던 그 아파트. 그때는 "몇 년만 바짝 모으면 살 수 있겠다" 싶었다. 하지만 지금 그 집은 내 연봉을 한 푼도 안 쓰고 수십 년을 모아야 겨우 살 수 있는 가격이 되었다.


기이하다. 왜 TV는 싸지는데, 집값은 미친 듯이 오를까?


우리는 이것을 단순히 '부동산 투기 때문'이라거나 '경제가 성장해서'라고 퉁치고 넘어간다.

여기서 린 알든은 이 현상 뒤에 숨겨진 '돈의 비밀'을 지적한다.


본래 인류의 역사는 디플레이션(가격 하락)이 정상이다. 이유는 기술(Technology)이 발전하기 때문이다. 과거에 농부 한 명이 밭을 갈려면 일주일이 걸렸다. 그러다 트랙터가 발명되고, 그 일은 하루 만에 끝났다.


생산성이 올라가면 물건은 흔해지고 가격은 내려가는 것이 자연의 이치다. 이 때문에 컴퓨터, 스마트폰, 의류, TV 기술의 수혜를 입은 모든 공산품은 시간이 갈수록 싸졌다.


정상적인 세상이라면 기술 발전 덕분에 우리의 삶은 점점 더 여유로워져야 한다. 물가는 매년 2~3%씩 떨어져야 하고, 우리는 적게 일하고도 더 풍족하게 살아야 한다.


그런데 현실은 어떤가?


매년 물가는 오른다. 정부와 중앙은행은 연 2%의 완만한 인플레이션이 목표라고 당당하게 말한다.


이게 무슨 뜻일까?


기술 발전이라는 중력이 물가를 -2%로 끌어내리려고 하는데, 정부가 돈을 마구 찍어내어 억지로 끌어올리고 있다는 뜻이다.


즉, 우리는 표면적으로 보이는 2%의 물가 상승뿐만 아니라 기술이 가져다준 2%의 풍요까지 합쳐 총 4%의 구매력을 매년 도둑맞고 있는 셈이다.


이 도둑맞은 돈(유동성)은 어디로 갈까?


TV나 옷처럼 공장에서 무한대로 찍어낼 수 있는 물건으로는 가지 않는다. 그런 건 이미 흔하니까. 대신,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절대 늘어날 수 없는 것'을 찾아 이동한다.


서울의 땅, 강남의 아파트, 희소한 미술품, 그리고 금.


TV 가격이 내린 것은 기술의 축복이다. 하지만 집값이 폭등한 것은 기술의 축복(디플레이션)을 윤전기(인플레이션)가 집어삼켰기 때문이다.


여기서 혹자는 이렇게 물을지도 모른다.


"물가가 계속 떨어지면 사람들이 물건을 안 사지 않을까? 내일 더 싸질 텐데 굳이 오늘 살 이유가 없잖아. 그러다 기업이 망하고 경제가 멈추는 거 아냐?"


우리는 학교와 뉴스에서 그렇게 배웠다. 디플레이션은 악(Evil)이라고. 하지만 이것은 경제학자들이 만든 가장 정교한 가스라이팅 중 하나다.


다시 거실의 TV와 당신의 주머니 속 스마트폰을 보자. 스마트폰과 TV, 컴퓨터는 지난 20년간 가장 극심한 디플레이션을 겪은 품목들이다. 매년 성능은 두 배로 좋아지는데 가격은 그대로거나 떨어진다.


경제학자들의 논리대로라면, 우리는 스마트폰을 사지 않아야 한다. 내년에 더 좋고 싼 모델이 나올 테니까. 죽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죽기 직전에 최고의 폰을 사는 게 합리적이지 않은가?


현실은 어떤가. 우리는 필요하면 산다. 아이폰 신제품이 나오면 밤새 줄을 선다. 전자제품 산업은 디플레이션이 가장 심한 분야지만 역설적으로 지난 20년간 가장 폭발적으로 성장한 산업이다.


사람은 가격이 오를 것 같아서 소비하는 존재가 아니다. 당장 필요하고 그것이 내 삶을 윤택하게 만들기 때문에 소비한다.


오히려 인플레이션이 만든 소비가 더 기형적이다. "내일이면 돈 가치가 떨어지니 빨리 써버리자"라는 심리로 불필요한 물건을 사고, 빚을 내서라도 명품을 지른다. 이것은 건전한 경제가 아니라, 강요된 과소비다.


그렇다면 정부와 중앙은행은 왜 그토록 디플레이션을 두려워할까?

경제가 망해서가 아니다. 자신들이 갚아야 할 빚의 가치가 커지는 것이 두렵기 때문이다.


돈 가치가 올라가면(물가가 하락하면), 월급쟁이와 저축하는 사람들은 왕이 된다. 가만히 있어도 내 돈의 힘이 세지니까. 반면 빚을 잔뜩 진 정부와 자산가들은 지옥을 맛본다. 갚아야 할 돈의 실질 가치가 늘어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윤전기를 돌린다. "경제를 살리기 위해서"라는 그럴듯한 핑계를 대면서.

실상은 "나의 빚을 녹여 없애기 위해서"다. 그 과정에서 성실한 저축자들의 구매력은 희생양으로 바쳐진다.

우리는 이것을 '인플레이션'이라 부르지만 이는 '보이지 않는 세금'이다.


정부가 우리 통장에서 세금을 50%씩 떼어가면 폭동이 일어날 것이다. 때문에 돈을 찍어내어 물가를 올리는 방식은 아주 은밀하고 조용해야 한다. 사람들은 자신의 돈이 녹아내리는 줄도 모르고, 그저 "물가가 비싸네, 더 열심히 일해야지"라며 스스로를 채찍질할 수 있도록 말이다.


우리는 지금 러닝머신 위를 달리며 살고 있다. 기술 발전은 러닝머신의 바닥을 뒤로 보내주려 하는데, 정부는 속도를 높여 앞으로 달리게 만드는 것이다. 우리는 넘어지지 않기 위해 죽을힘을 다해 뛰어야 한다.


우리는 오늘도 헐떡이며 달린다.

분명 TV는 더 커지고 선명해지고 있는데, 삶의 해상도는 점점 흐릿해지는 건 당신만의 착각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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