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디지털 세상은 '풍요의 천국'이다. 내가 찍은 사진 파일을 친구에게 카톡으로 보낸다고 해보자. 내 폰에도 사진이 남아 있고, 친구 폰에도 사진이 생긴다.
'복사(Ctrl+C)와 붙여넣기(Ctrl+V)'.
이것이 디지털의 본질이다.
원본과 복사본의 차이가 없는 세상, 모든 것이 무한히 복제되는 세상.
그런데 이 무한한 풍요가 치명적인 독이 되는 분야가 딱 하나 있다.
바로 '돈'이다.
만약 내가 1만 원이라는 디지털 파일을 친구에게 보냈는데 내 지갑에도 그대로 남아있다면?
그건 돈이 아니다. 휴지 조각이다. 돈이 돈이려면, 내가 너에게 보냈을 때 내 잔고에서는 반드시 사라져야 한다.
지난 30년간, 천재적인 컴퓨터 공학자들은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머리를 싸맸다.
"어떻게 하면 디지털 데이터를 복제 불가능하게 만들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은행 같은 관리자 없이도, 내가 쓴 돈이 내 지갑에서 사라졌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을까?"
아무도 답을 찾지 못했다. 은행 서버가 장부를 관리해주지 않으면 디지털 세상에서 돈은 무한 복제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2008년 10월 31일. 전 세계가 리먼 브라더스 파산과 금융 위기의 공포에 떨고 있을 때, 인터넷 구석의 한 게시판에 익명의 논문이 올라온다. 작성자는 사토시 나카모토(Satoshi Nakamoto).
그는 은행을 거치지 않고도, 그 누구도 복제할 수 없는 디지털 현금을 만드는 법을 알아냈다고 주장했다. 인류 역사상 최초로 '디지털 희소성(Digital Scarcity)'이 발명되는 순간이었다.
사토시의 아이디어는 기막힌 발상의 전환이었다.
은행이라는 '비밀 장부'를 없애는 대신, 전 세계 모든 사람이 똑같은 장부를 나눠 가지면 어떨까?
상상해 보자. 하늘 위에 거대한 '유리 장부'가 떠 있다. 이 장부는 전 세계 누구에게나 보인다. 철수가 영희에게 1비트코인을 보내면, 그 순간 전 세계 모든 사람의 장부에 동시에 기록된다.
"철수가 영희에게 1코인을 줬음. 철수 잔고 -1, 영희 잔고 +1"
만약 철수가 몰래 1코인을 복사해서 훈이에게 또 보내려고 하면 어떻게 될까? 전 세계 사람들이 하늘을 가리키며 소리칠 것이다. "거짓말쟁이! 아까 영희한테 줬잖아. 네 잔고는 0이야!"
이것이 바로 블록체인(Blockchain)*의 핵심, '분산 원장' 기술이다.
관리자(은행) 한 명을 믿는 대신, 참여자 모두가 감시자가 되어 서로를 검증하는 것이다. 누구도 장부를 몰래 고칠 수 없고, 누구도 돈을 복사할 수 없다.
그렇다면 누군가 해킹을 해서 하늘 위의 장부를 싹 지워버리면?
사토시는 여기에 '에너지(Energy)'라는 물리적 방벽을 세웠다.
장부에 새로운 거래를 기록하려면, 컴퓨터로 엄청나게 어려운 수학 문제를 풀어야 한다. 이 문제를 풀려면 막대한 전기가 소모된다. 우리는 이것을 채굴(Mining)이라 부르고, 그 과정을 작업 증명(Proof of Work)이라 부른다.
왜 굳이 전기를 낭비하며 문제를 풀까? 해커가 장부를 조작하려면, 전 세계 채굴자들이 쓰는 전기 에너지보다 더 많은 에너지를 한순간에 쏟아부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에 가깝다.
즉, 비트코인은 단순한 데이터 쪼가리가 아니다. 전기라는 현실의 자원을 디지털 공간에 굳혀서 만든 성벽에 가깝다. 금을 캐내려면 곡괭이질이 필요하듯, 비트코인을 만들려면 전기를 쓰는 연산 작업이 필요하다. 아무도 금을 집에서 만들어낼 수 없듯, 아무도 비트코인을 맘대로 찍어낼 수 없다.
이것은 혁명이었다. 인터넷이 정보의 바다라면 비트코인은 그 바다 위에 떠 있는 '녹지 않는 얼음'이다. 복제가 판치는 디지털 세상에서 유일하게 복제되지 않는 '하나'.
사토시는 첫 번째 장부(비트코인 네트워크의 제네시스 블록)에 이런 문구를 숨겨놓았다.
"2009년 1월 3일, 재무장관이 은행에 대한 두 번째 구제금융을 앞두고 있다." (The Times 03/Jan/2009 Chancellor on brink of second bailout for banks)
이것은 단순한 신문 기사 제목이 아니었다. 제멋대로 돈을 찍어내어 실수한 은행들을 살려주는 고장 난 화폐 시스템에 대한 조롱이자 선전포고였다.
"너희는 맘대로 돈을 찍어내라. 나는 수학과 코드로 영원히 변하지 않는 돈을 만들 테니."
어쩌면 2009년에 사토시는 1971년 인간이 잠가버린 금고 문을 디지털 희소성이란 열쇠로 다시 연 것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