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다가가지 못하면, 누구에게도 다가갈 수 없다."
기반이 없는 것은, 결국 무너진다.
해변에 쌓아 올린 모래성처럼,
꿈도, 관계도, 그리고 나 자신도.
우리는 언제나 존재의 인정과 누군가의 사랑을 갈구한다.
인간은 본래 불완전한 존재이기에,
외로움에 무너져 내리지 않으려 애써 발버둥 친다.
존재를 인정받지 못하고, 사랑받지 못한다는 건,
때로 죽음보다 깊은 고통을 남긴다.
그래서 우리는 관계 속에서
서로의 빈자리를 채우려 애쓴다.
하지만 가끔,
가슴 한편에 스며드는 외로움과 공허함에 휩쓸릴 때,
우리는 가장 본질적인 사실을 잊고 만다.
"내가 나 자신을 사랑할 수 있는 상태일 때에야,
비로소 타인과의 관계도 건강해질 수 있다."
나는 단순하면서도 중요한 진실조차 알지 못했다.
한때, 자존감은 땅바닥을 기어 다녔고,
자신을 사랑하지도 못한 채,
스스로를 몰아 새우며 버텼다.
나는 남들의 반응에 강박적으로 매달리며,
'불편했을 거야. 그러게 왜 나서서 폐를 끼치지?'
스스로를 채찍질했다.
자기 비난에 신음하며,
상대방에게 정중히 사과를 남긴 뒤,
관계를 끊어버린다.
여전히 그렇게 살아가고 있었다.
최근의 일은, 다시 한번 그것을 상기시켜 주었다.
3월, 사경회에서 한 후배를 알게 되었다.
대면식에서 만났던 선배의 동생이었다.
강연이 한창 진행 중일 때, 오른쪽 시야에 툭 나타난 누군가의 휴대폰.
고개를 돌려보니, 그녀였다.
남고를 나오고, 군대를 다녀온,
복학한 그때의 나에게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냥 멍했다.
눈도 마주치지 못한 채, 덥석 인스타 아이디를 알려주었다.
귀는 새빨개지다 못해 터질 것 같았다.
당황한 나는 로봇처럼 뚝딱거리며,
그녀의 휴대폰에
내 아이디를 적고 팔로우를 걸었다.
자신의 언니가 팔로우되어 있는 걸 발견하고,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을 걸어온다.
그 순간, 나는 어딘가로 튕겨져 나간 것만 같은 기분에 휩싸였다.
너무나도 빛났기에,
어두운 곳에 오래 갇힌 사람이 갑작스레 강한 빛을 쬐듯,
그 빛을 마주하기가 두려워, 피하고만 싶었다.
그리고 흐른 일주일.
매일같이 고민했다.
학년도 다르고, 수업시간도 전혀 겹치지 않는 상황.
어떻게 자연스럽게 접점을 찾을 수 있을까?
하루 종일 그 생각뿐이었다.
모든 관계는 작은 만남 하나로부터 시작된다.
접점이 없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이런 적은 처음이었기에,
친한 군대 선임이었던 형에게 털어놓았다.
"스토리에 답장이라도 해, 말 걸던가. 일단 만남이 생겨야 뭐라도 일어나지."
이하동문, 구구절절 맞는 말이다.
그러나 또다시 찾아왔다.
내 발목을 붙잡는 그놈이.
'거절당하면?'이라는 속삭임.
항상 날 옥죄어왔던 목소리였지만,
이번만큼은 애써 무시했다.
용기를 내보기로 했다.
시작도 해보기 전에 포기하면,
아무것도 얻을 수 없을 테니까.
나는 이카루스처럼,
설령 날개가 녹아 끝없이 추락하더라도,
조금이라도 빛에 가까워지고 싶었다.
답장을 보낼까 말까 며칠을 고민했다.
그러던 중, 올라온 스토리 하나를 보고
겨우 답장을 써내려 갔다.
단순한 질문 하나였지만,
보내기까지 수백 번 마음을 다잡아야 했다.
'이건 그냥 친구처럼 가볍게 말 거는 거야.'
수십 번을 되뇌다가 결국 한 마디를 보냈다.
그 안에는, 수백 번의 심호흡이 담겨있었다.
아메리카노를 숨 쉬듯 들이켰다.
차가운 씁쓸함이 입안을 휘감았다.
뛰는 심장,
카페인 때문일까,
기대감 때문일까.
주변 친구들의 말소리는 멀어지고,
오직 내 심장 소리만 또렷하게 들렸다.
고요 속,
나만이 오롯이 느끼는 정적을 알람 소리 하나가 툭 건드렸다.
"왔다."
후배에게 답장이 도착했다.
기회를 놓치지 않고, 살며시 그녀의 문을 두드렸다.
그러던 중, 대화 속에 들어온 질문 하나.
"사진 찍는 거 좋아하세요?"
저번 대화에서
그녀는 취미가 사진이라는 걸 떠올렸다.
그래서 압구정 카페에서 담은
성수대교 야경 사진을 스토리에 올려두었던 참이었다.
작은 접점이, 드디어 만들어진 것 같았다.
나는 최근 들어 사진을 취미로 삼게 됐다고 답했다.
첫 대화는, 꽤 성공적인 것 같다.
대화는 며칠 동안 사진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졌다.
하지만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왠지... 나만 계속 질문하고 있는 것 같다.
인터뷰도 아니고, 이 패턴의 반복이다.
'혹시 부담스러운가?'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친다.
하지만 곧 스스로를 다독인다.
"아직 인스타만 교환한 사이잖아."
부담스럽지 않게 조심스레 물어본다.
'제가 너무 질문만 했죠?'
그렇게 보내고, 곧바로 잠에 들었다.
다음 날 아침,
창을 넘은 햇살이 내 뺨을 스쳤다.
그리고, 기다리던 답장이 왔다.
"괜찮다고. 언제든 물어보라고."
세 문장 정도의 짧은 문장이었다.
그러나 그 짧은 온기는,
내 마음속 두려움이 주는 냉기를
전부 녹여 없앴다.
조그마한 떨림을 일으키기에 충분한 힘이었다.
따뜻한 친절함은,
더 다가가고 싶게 만들었다.
그래서, 나는 한 발짝 더 나아가보기로 했다.
나는 그녀의 친절에 작게나마 감사를 전했다.
그리고 떨리는 마음으로,
한마디를 적어, 천천히 날려 보냈다.
"시간 되면 밥 한 끼 같이 먹어요."
하염없이 기다렸다.
기대감과 불안감이 뒤섞인 머릿속은
아무것도 할 수 없게 굳어 버렸다.
잠시 뒤 울린, 알람 하나.
"네 좋아요. 언제 한번 먹죠."
이제, 첫걸음을 뗐다.
작은 만남, 그 조그만 울림이
조용히, 내게로 다가오고 있었다.
하늘도, 내 마음을 알아차린 걸까.
오늘따라 유난히 쾌청한 날씨였다.
시원한 바람이 나를 스치고 지나갔다.
대화를 마친 뒤,
닷새쯤 흘렀을 무렵.
카페에 앉아,
저녁노을과 도시의 풍경을
고요히 담아내며 여유를 즐기고 있었다.
약속은? 아직 물어보지 않았다.
지금은 시험 기간이다.
그 사람이 내게 보여준 친절처럼,
나도 조심스럽게 기다리기로 했다.
사진을 찍는 일이 이렇게 즐거운 줄 몰랐다.
접점을 만들기 위해 시작한 취미는,
어느새 일상의 작은 기쁨이 되어 있었다.
오늘 담아낸 이 순간의 서울을,
조심스레 스토리에 올린다.
혹시 봐주지 않을까,
아니,
봐주기만 해도 충분했으니까.
머지않아, 기대보다 더 좋은 결과가
조용히 내게로 다가왔다.
연락이 왔다.
항상 먼저 보내고 있던 대화가,
이번엔, 저쪽에서 먼저 시작된 것이다.
"선배님은 사진을 휴대폰으로 찍으시나요?"
한 마디의 짧은 질문,
그러나 안에는,
'나에게 먼저 다가온' 작은 온기가 담겨 있었다.
그 순간, 내 마음은 다시 물결치기 시작했다.
우리는 잠시 대화를 주고받았다.
그러다 이윽고 흐름은 뚝, 끊어졌다.
나의 답장을 마지막으로, 대화는 멈췄다.
시간이 흐를수록, 조금씩 느껴진다.
점점 다가오는 불안감.
처음엔 괜찮았다.
'바쁠 수도 있으니까.'
그러나 날카로운 의심은,
여지없이 파고 들어왔다.
'내가 무리한 건 아닐까?'
이대로 무너질 것인가,
아니면 한 번 더 용기를 내볼 것인가.
애석하게도, 나는 굴복했다.
이번엔, 조금만 더 용기를 내볼 수도 있었을 텐데.
스토리도 올리고,
사진에 '좋아요'도 눌러본다.
하지만, 답장은 오지 않는다.
오랜 시간 괴롭혀온 내면의 작은 목소리는,
어김없이 이 순간을 절대 놓치지 않는다.
"이쯤 되면 알았어야지."
늘 그랬듯, 난 조용히 수긍한다.
시작된다.
가혹한 자기비판.
수많은 고민들의 연속.
추락할지라도 포기하지 않고 않겠다고
스스로에게 다짐한 한 남자.
남자는 스스로 접은 날개를 끌어안은 채,
천천히, 그리고 확실하게 추락해 갔다.
그것은 녹은 것이 아니었다.
그는, 스스로 접어버린 것이었다.
그리고, 반복된다.
일방적인 배려.
타인의 거절이 두려워, 지레짐작한 끝에
먼저 끊어버리는 자기 방어.
그리고 이어지는 익숙한 사과.
"제가 후배님께 불편감을 드린 것 같아요.
솔직히... 갑자기 연락 와서 부담스러우셨을 텐데.
그럴 의도는 아니었어요.
앞으로 따로 연락은 드리지 않을게요.
여러모로 죄송했습니다."
마지막 인사를 남긴 뒤,
마음을 굳게 먹고 팔로우를 해제했다.
초라한 나와는,
완전히 결이 다른 사람이었으니까,
약간의 후회조차 남을까 두려웠다.
다신 돌아갈 수 없도록,
완전한 종말을 선고한다.
그저 바람이나 쐬고 있었다.
내가 없어도 잘만 돌아가는 듯한 세상을 바라보며,
스스로 만들어낸 괴로움에 몸부림쳤다.
잠시 시간을 보기 위해 핸드폰을 켠다.
"네??"
"그런 게 아니었어요."
"같이 나눈 사진 대화도 너무 재미있고 좋았어요."
"만약 연락을 안 봐서 그런 거면, 정말 죄송해요."
"원래 연락을 잘 보지 않아서, 죄송합니다."
찰나의 침묵이,
주변의 공기를 집어삼킨다.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다.
"....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너무 늦게 닿아버린 따스함.
나는 이미, 스스로 문을 닫았다.
몰려든 죄책감은, 무거운 침묵보다 더 깊었다.
그냥 넘길 수 없었다.
문자 한 통으로는 이 마음이 전달되지 않을 것 같았다.
나는 조심스레,
떨리는 손으로 연락을 보냈다.
"혹시 시간 되시면 전화되세요?"
"되실 때 연락 주세요."
답장은 짧았다.
"네? 뭐 하실 말씀 있으세요...?"
순간 생각이 스쳤다.
이건 아니었다.
나는 다시 문자로 천천히 써 내려갔다.
"저는 복학생이고 후배라 많이 조심스럽게 다가갔어요.
그래서 조급하고 혼자 의미를 부풀리다 보니
이렇게 된 것 같아요.
혹시나 오늘 일로 상처받거나
기분 나쁘셨으면 정말 죄송합니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지만, 그래도 이 말만은
꼭 하고 싶었어요."
다음 날, 답장이 도착했다.
"엇, 그렇게 생각 안 했는데..."
"알겠습니다."
모든 것은 조용히, 그리고 돌이킬 수 없이 끝났다.
마지막 인사였다.
"그렇게 안 느끼셨다면 다행이네요."
"알겠습니다."
마지막 문장까지 닿고 나서야,
나는 깨달았다.
나의 무너짐이 누군가에겐
최고의 유희였을지도 모른다는 걸.
쓰러진 그 자리에서,
나는 알게 되었다.
그 괴물은,
늘 이 순간만을 기다려 왔다.
괴물을 떨쳐내려 했던 대가를,
남자는 혹독하게 치러야 했다.
내면의 두려움이 속삭이는 말에 무너져,
스스로 날개를 접어버린 남자는
절망의 자유낙하를 시작했다.
그리고 그는,
더 이상 어디로도 나아갈 수 없었다.
그가 쫓던 빛은,
이제 더 이상 자신을 비춰주지 않는다.
가끔 마주쳐 돌아오는 건,
싸늘한 시선과, 차가운 무관심뿐이다.
가장 조용하고, 가장 가혹한 형벌이었다.
나는, 그 형벌을 받아들인다.
아무 말도, 저항도 없이.
다만, 조용히.
나를 무너뜨린 건,
누군가의 거절이 아니었다.
오히려,
스스로를 믿지 못했던 나 자신이었다.
이제는 안다.
타인에게 다가가기 전에,
먼저 나를 사랑해야 한다는 걸.
그래서 다짐한다.
앞으로는,
무너질까 두려워 달아나지 않고,
스스로를 품어 안을 것이다.
그 사랑이 단단해질 때,
나는 다시 누군가의 문을 두드릴 것이다.
완전하진 않아도,
두려움에 멈칫해도,
괜찮다.
언젠가, 나를 사랑하는 날이 오기를.
그리고, 그날
누군가를 온전히 사랑할 수 있기를.
[Epilogue.]
"차가운 형벌 속에서,
나는 괴물의 손을 천천히 벗어나,
세상 속으로 발을 내디뎠다."
"이 긴 이야기의 끝까지
묵묵히 함께 걸어와준 당신께,
진심으로, 고맙습니다."
타인에게 다가가는 과정은,
때로는 '굳이 상처받을 것을 감수하며 해야 할까?'라는
조용한 속삭임을 불러옵니다.
그러나, 그렇기에 아름답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그래도 다가가야 합니다.
타인의 관심을 끊임없이 갈구하면서도,
다가오는 이를 경계하며 벽을 새워놓는
인간의 모순처럼,
관계는 고통을 수반하면서도,
결국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 다가섬의 과정은,
'자신을 사랑하는 상태'라는 위에서야
비로소 아름답고, 건실하게 이루어집니다.
저도 아직은 그 전제를 온전히 이루지 못했지만,
언젠간 우리 모두가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사랑으로 서로를 따스히 품어줄 수 있기를.
그때에는, 우리의 손에
작지만 빛나는 열쇠 하나가
꼭 쥐어져 있기를 바라겠습니다.
"자신을 사랑하는 것, 그것이 열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