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반게리온의 마지막은, 이카리 신지만을 위한 축하가 아니었다.">
누구나 살면서 이런 감정을 느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우리는 누군가와의 연결을 갈망한다.
하지만 상처받는 게 두려워서
아예 다가지도 못하고,
연결의 과정에서 받은 아픔에
관계 자체를 외면하기도 한다.
그렇다고 혼자가 해답이 될 수 있을까?
전혀 아니다.
오히려 그 안에서 외로움에 무너진다.
'왜 인간은 타인을 갈망하면서도 다가가지 못할까?'
외로움은 견딜 수 없으면서도,
상처는 두려운 것이다.
참, 우리는 얼마나 모순적인 존재인가.
이 모순의 이유를, 나는 꽤 오랜 시간 붙들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세기말의 한 작품 속에서
나만의 조용한 정답을 찾았다.
바로 1995년 일본 사회에 등장해
단순한 애니메이션을 넘어
폭발적인 반향을 일으킨 작품
[신세기 에반게리온]이었다.
이야기에 중반부부터 드러나는 등장인물들의 서사와
작중 설정들은 수많은 해석들을 낳았고,
그리고 그 중심에는
인간 존재의 고립과 두려움을 다루는 주제 의식은
당시 세대의 내면 깊숙한 불안에 정확히 닿아 있었다.
그러나 다양한 해석이 나오는 만큼,
혹자는 이렇게 말한다.
'우울하고 절망적 내용으로만 가득 찬 만화'
'혼란스럽고 무슨 메시지를 던지는지 도저히 알 수 없다'
인정한다.
확실히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급박한 전개와 설명 없는 내용 진행은,
충분히 그렇게 느껴진다.
그러나 내가 느낀 에반게리온은
향수와도 같은 작품이었다.
시간이 지나야 비로소 피어오르는
여운을 가진 작품이었다.
시간이 흘러 비로소 느껴지는 베이스 노트처럼,
묵직하고 깊은 잔향 말이다.
에반게리온의 탑 노트는,
소년 성장물 로봇 전투가 주를 이루는
잘 만든 SF 애니메이션이다.
다음에 느껴지는 미들 노트는
갑작스러운 급박한 전개와
쭉 내리깔리는 절망적인 분위기의 연속,
그리고 난해한 결말로 인해
혼란스럽게 다가오는 작품일 수도 있다.
하지만 진가는 마지막까지 남아 깊은 울림을 남기는 베이스 노트이다.
나는 내가 맡은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묵직하고 오래가는 잔향"을
지금 이 자리에서 함께 나누려 한다.
에반게리온은 묻는다.
우리는 왜 "서로를 갈구하면서도 동시에 두려워하는가?"
작중에서는 'AT필드'라는 개념이 등장한다.
AT필드는 내가 나로 존재할 수 있게 해주는,
나와 타인을 구분하는 보호장치이자 결계이다.
AT필드는, 내가 나로서 존재할 수 있는
존재의 필수 조건인 것이다.
인간은 이 AT필드를 지니고 있지만,
그 벽만으론 스스로를 온전히 세워낼 수 없다.
우리는 완벽하지 않고, 결핍된 존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서로를 통해 빈자리를 채우고
미완성의 자아를 조금씩 완성해나가려 한다.
하지만 주체성을 가진 우리는,
타인과의 연결에서 충돌을 피할 수 없다.
그 충돌은 곧, 갈등과 고통이라는 그림자를 낳는다.
그래서 우리는 타인을 갈망하면서도
그 연결이 두려워 움츠러든다.
그렇다고 해서, 연결을 포기하면
남는 건 고립뿐이다.
한마디로 연결의 고통과 고립의 외로움 사이, 모순의 굴레에서 끝없이 몸부림친다.
결국 에반게리온은
AT필드라는 설정을 통해,
인간 존재의 필수 조건인
'주체성', '개별성'을 이야기한다.
이를 통해서,
우리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이며
서로를 통해 완전함에 도달할 수 있으나,
그 과정에서 서로의 경계에 의한
필연적인 충돌이 존재하고.
쉽게 다가갈 수 없는 벽과,
마주침에서 비롯된 불편함이 따라온다.
그러나 기억해야 한다.
고통은 주체성의 본질이 아닌
그로 인해 따라오는 부작용이라는 것을.
주체성은 내가 나로서 존재하고 살아있다는 가능성이자, 증거이며
나와 타인을 구분 짓는 존재론적 필수 조건이다.
오히려 그건,
우리가 서로를 마주할 수 있게 해주는
연결의 시작점이다.
존재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타인을 인식할 수도 없다.
경계가 있어야 '나'와 '너'가 를 구별하고,
그 앞에서 마주 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조건은 타인과의 연결에서의
어려움, 충돌을 야기한다.
그리고 그 충돌의 필연적 반작용으로
상처를 동반하고,
'타인을 갈망하면서도 두려워하는 모순'을 선사한다.
존재의 조건이자,
너와 나로 마주할 수 있는 시작점이지만,
그것은 우리를 사무치도록 아프게 한다.
"세상의 잔혹한 테제이자, 거부할 수 없는 법칙이다."
그래서 작중에서는
'인류보완계획'을 실행하려 한다.
'인류보완계획'.
인류를 하나의 단일한 의식의 집합체로 일체화시키려는 시도이다.
이는 곧, 인간의 주체성, 개별성이 충돌하며 발생하는
타인과의 연결 과정 속 고통과 상처를 없애는 것이다.
결국 우리는,
고립의 외로움도, 연결의 상처도 모두 견딜 수 없어서
존재의 조건 자체를 버리려 시도한다.
하지만 AT필드는,
내가 나로 존재하기 위해 세우는 벽이자, 타인과 나의 경계이다.
'내가 나로 존재할 수 있는 필수 조건'이므로,
우리는 이 AT필드가 제거됨으로써 존재를 잃게 된다.
내가 이해한 인류보완계획은
고립의 외로움과 타인과의 연결 사이에서
일어나는 충돌의 두려움 사이에서
끝없이 저항하는 운명을 벗어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건 곧, 존재론적 사형이다."
나라는 존재가 없어지고 얻는
타인과의 완벽한 결합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이건 보완이 아니다,
타인과의 충돌 속 상처를 없애고 완전함을 추구한다는 허상 아래,
"인간이라는 존재를 소멸시키는 계획이자.
스스로의 주체성을 지워내는 집단 자살 행위다."
신지는,
끝없이 타인의 애정과 연결을 갈구하지만,
실패로 돌아가며
깊은 자기혐오와 자괴감에 무너진다.
그리하여 결국, 인류보완계획을 실행한다. 그것이 자의든, 타의든 말이다.
계획이 발동되고 그는 릴리스와 융합한다.
존재와 존재의 경계가 허물어진 세계 속,
타자성의 혼란스러운 바다로 가라앉는다.
실체 없는 타인과의 연결이 주는 혼란 속에서,
신지는 끝없이 고민하게 된다.
소년은, 끝없이 무너지는 자아의 경계에서
자신이 누구인지 다시 묻기 시작한다.
결국 신지는, 인류보완계획을 통한 타인과 강제적인 합일보다는
충돌의 고통과 고립 사이에서 끝없이 몸부림치는 길을 택한다.
그것만이, 나로서 존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존재가 지워진 그곳엔, 의미도 감정도 남지 않았다.
그제야 깨닫는다.
"완전함만을 남긴 세계는, 사실상 아무것도 아닌 세계였음을."
이카리 신지는 타인과의 연결을 원하나,
그 연결이 초래할 고통에 주저하며 스스로를 가둬왔다.
다가오길 바라면서도, 벽을 새워 놓는 인간관계의 부조리를,
그는 마침내 받아들인다.
그리고 고통 속에 살아가는 그 존재도 나임을,
내가 나로 서있지 못하는 삶은 아무런 의미도 없음을 조용히 수용한다.
타인과의 관계의 모순과 아픔을 딛고
앞으로 나아가기를 결단한다.
"존재의 반작용으로 인한 고통에도,
존재하기 위해 살아가리라는 한 인간의 선언이다."
그렇게 붕괴된 자아의 세계는 모습을 감추고,
우린 다시금 타자성의 바다에서 끌어올려진다.
이카리 신지의 서사는,
다른 곳에서 만났던 '행복한 사나이' 하나를 떠올리게 했다.
부조리한 현실 속에서도 묵묵히 버텨낸 그를 말이다.
현실의 부조리함 속에서, 아무리 발버둥 쳐도,
또다시 고통받을 것을 알면서도..
묵묵히 돌을 밀어 올리는 시지프스를 닮아있었다.
그것이 모순이며, 고통스러운 길임을 알면서도,
신지는, 자신을 짓누르던 돌들을 껴안고 살아가기로 결심한 것이다.
"잔혹한 세상의 테제 속에서, 소년은 신화가 되었다."
'신세기 에반게리온'이라는 작품은 단순히,
고통과 절망만을 말하려는 작품이 아니다.
타인과의 연결을 갈구하나,
그로 인한 내적 경계의 충돌에서 쉽게 움츠러든다.
연결을 맺지 못한 뒤 찾아오는 고립.
그 안에서 오는 외로움과 자기혐오 사이에서 끊임없이
신음하는 인간 본질의 아이러니.
하지만 이 고통은, 나로 존재하기 위한 숙명이다.
그렇기에 고통을 딛고 우리는 타인과의 관계에 뛰어들어
온전해짐을 추구해 나아가야 한다."
이 메시지는 당시 침체된 분위기에서
신세기를 앞둔 일본 사회에 던지는 희망이었다.
"신세기로 나아가기 위한 굿 뉴스이자, 복음(에반게리온)인 것이다."
덧붙이자면,
'에반게리온'이란 단어는 복음, 좋은 소식을 뜻하며,
당시에는 보통 전쟁에서 승리했을 때 사용하던 단어였다.
따라서 "우리의 실존을 위한 투쟁의 승전보"라고 볼 수도 있다.
인간은 언제나 불완전했다.
사랑을 원하면서도, 상처를 두려워했고,
연결을 추구하면서도, 고립을 자초했다.
그 모순과 결핍 속에서도, 우리는 서로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충돌의 여파로 몸이 부서지더라도,
쓰러지고, 만신창이가 되어 성한 곳이 없어도,
우리는 끝내 서로를 향해 계속해서 걸어갔다.
반짝이는 순간만이 인간의 위대함을 말해주진 않는다.
오히려 가장 어두운 곳에서,
고통에 허우적 대고, 모순에 끝까지 저항하며
그러함에도 살아가려는 그 투쟁, 숨결, 선택은.
인간이라는 존재를 가장 담담하면서도 찬란하게 설명해 준다.
인간의 위대하고 영광스러운 모습을 통해서가 아니다.
결핍과 모순 속에서도 부조리함을 딛고 일어서려는 인간의
숭고한 의지에 보내는 새로운 방식의 구슬픈 찬가다.
아름답고도 슬픈 장면이다.
'역설적이기에 아름답고, 상처받기에 비로소 의미가 있다'
에반게리온의 마지막 인사말은.
급하게 마무리 지어버린 용두사미식 마무리가 아니었다.
타인을 갈망하면서도 타인과의 충돌을 두려워하는
인간의 아이러니를,
그저 시지프스처럼, 묵묵히 감내하며 받아들이기로 한
이카리 신지의 용기와 결단을 향한 축하이다.
하지만 이건 단순 신지만을 위한 축하가 아니다.
비논리적인 나도 나였음을 인정하고,
끝없는 굴레 속의 몸부림을 받아들이며 끌어안고 살아가는
우리의 아름다운 투쟁적 의지에 바치는 찬사다.
비록 신세기 에반게리온은 침체된 세기말의 무너진 존재들을 향한
새로운 시대를 살아가기 위한 복음이라 밝혔지만,
그렇다 해서 이 메시지가 그 시대의 존재들에게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우리는 그들이 앞두고 있던 신시대를 살아가고 있으니까.
"세기말, 한 소년의 결단이 담긴 그 선언은,
메아리처럼 퍼져나가 신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까지 닿아 깊은 울림을 준다."
이카리 신지는 단순 등장인물이 아니라,
어쩌면 우리 내면의 모습을 작중 인물로 실체화한 존재일지도 모른다.
타인과의 관계를 갈망하나 두려워하고,
고립감을 극도로 경계하나, 타인에게는 다가가지 못한다.
역설의 굴레에서 끊임없이 허우적대는
우리의 초상화다.
타인과의 충돌과 실패의 좌절은,
때론 우리에게 크나 큰 상처를 준다.
그 흉터에서 나오는
자기혐오와, 외로움이란 상처는
우리를 끝없이 잠식해 간다.
이러한 아픔에 무너질 수도 있다.
도망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우리도 우리이기에,
무너지고 쓰러진 우리를 이해하며
다시 일어나기를 기다려주는 것은 어떨까.
나는 다짐했다.
갈등과 번민 속에 숨겨진 의미를 깨닫고,
이들과 함께 세상의 부조리함을 묵묵히 밀어 올리겠노라고.
내가 이들과 손을 맞잡기로 마음을 먹은 것은.
이들이 곧 나를 나로 존재할 수 있게 하는 유지장치이자,
"나라는 '존재의 진테제',
즉, 실존의 잔혹한 법칙과 역설이 만든 불협화음의 하모니" 로 이끄는 길임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난 이들을 끌어안고 타인의 AT필드에 뛰어들기로 선언했다.
그리고 끊임없이 부딪히고, 깨지고
바스러질지라도 살아가기로 했다.
아직 무너져있어도 괜찮다.
그 무너짐 조차도 결코 하찮지 않은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으니까.
나는 처절하면서도 찬란한 투쟁을 계속하며,
언젠가 당신이 그 돌들을 밀어 올릴 순간을 기다리겠다.
"존재하기 위해 살아가기를 다짐하고,
자신의 돌들을 다시금 끌어안으며 묵묵히 밀어 올리는 이들이여!"
당신은 세상의 냉정한 불합리함 속에서
무너짐이나, 고뇌함으로만 끝나지 않았다.
그 속의 아름다움과, 의미를 찾았다.
그리고 묵묵히,
끝없이 부딪히며 부서지고
회복하리라 선언하며 한걸음 나아갔다.
이런 잔혹한 어긋남도 내게 필요한 것임을,
그것 또한 나의 구성요소임을 수용하고 끌어안았다.
나라는 실체의 성립을 위해,
그들이 주는 부조리를 겸허하게
견뎌내기로 하며 또 다른 신화가 되었다.
나는 그런 나와 당신의 구슬픈 결단을 바라보며,
실존을 향한 아름답고도 처절한 투쟁 의지에
박수를 보낸다.
"그리고 강렬히 타오르는 이 의지의 불꽃이,
너무나 아름답다, 사랑스럽다.
나는 이 황홀한 찰나가
잔혹한 세상의 테제 속에서 다시금 신화로 피어나기를 바란다."
P.S : 이 글은 '정답'이 아닙니다.
제가 느낀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잔향,
그 안에서 제 마음에 닿은 울림을 나누고 싶어 쓴
지극히 개인적인 해석이 담겨있는 글입니다.
저의 해석이 어떻든, 여러분의 생각 또한 모두 옳습니다.
에반게리온의 매력은, 다양한 해석들이 가능하다는 그 자유로움에 있으니까요.
이 글은 신세기 에반게리온을 바라본 저만의 시점이라 생각해 주시면 됩니다.
모쪼록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더 괜찮은, 읽을만한 글로 다시 찾아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