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쾌락, 중독, 죽음, 해방"
캄캄한 새벽, 한 남자가 베란다에서 상념에 젖어있다.
조용히 담배하나를 꺼내서, 입에 문다.
그리고 라이터를 꺼내어, 부싯돌을 힘껏 굴려 불을 붙인다.
칙 하고 들리는 단말마와도 같은 마찰음.
그의 손 안에서 펼쳐지는 자그마한 불꽃놀이.
왠지 모르게 아름답다.
그리고 조용히 타닥타닥 타들어가는 소리가,
귀를 간지럽힌다.
이건 담배가 타들어가는 걸까, 아니면 그의 마음이 타들어가는 걸까.
남자는 서투른 첫 키스와 같이 양껏 빨아서 마음의 짐을 덜어낸다.
이 죽음의 키스는 너무나도 달콤하다.
한숨에 오늘의 걱정을 담아.
한숨에 미래의 불안함을 담아.
한숨에 지난날의 후회를 담아.
연기와 함께 뱉어낸다. 그리고 그 잡다한 모든 것들이.
한 줌 연기와 함께 세상 속에 녹아들어 없어진다.
왜 인지 가벼워지는 마음에, 계속 그 한숨을 즐기다 보면.
일산화탄소가 무겁게 뇌를 짓누르며 찾아오는
찰나의 무아지경.
그때 그를 복잡하게 한 모든 것이 일순간 정리된다.
뒤이어 선물처럼 다가오는 그 순간의 해방감.
이 해방감은 남자의 문제를 직접적으로 해결해주진 않는다.
자신을 태워서 얻는 책임 없는 쾌락과 해방.
하지만 이 해방감을 느끼다 보면,
성냥팔이 소녀가 거리에서 차갑게 식어가면서도
왜 성냥을 계속 태웠는지 이해할 것만 같다.
그래서 남자는,
또다시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못한
본인의 속내를 마음대로 들락거리는
오래된 친구이자 애인을 다시 찾는다.
물론 그녀는 그의 영혼을 태운다.
그리고 몸을 태운다ㅡ
자신의 몸을 태운 대가라도 받아가려는 걸까.
그리고 악마와의 거래처럼, 순간의 해방을 통한 쾌락을 선사한다.
그 남자는 이 중독적이면서 파멸적인 거래를 끊어내야 한다 생각하면서도.
손은 저절로 다시 그녀를 찾는다.
입은 그녀와의 죽음의 키스를 시작한다.
그리고 다시,
일산화탄소가 뇌를 짓누르는 중독의 오르가즘에 온몸이 전율한다.
일산화탄소와 니코틴,
그리고 수많은 유해물질들과 몸을 섞는다.
그 과정에서 윤리와 이성 따위는 저 멀리 치워버린다.
순수하지만 위험한 욕망에서 피어난 더러운 육체관계의 향연이랄까.
잠깐은 좋을지 모르나,
그의 몸은 건강이라는 순결을 잃고 갈기갈기 찢겨간다.
이성으론 안된다는 걸 알면서도,
쾌락에 더럽혀진 남녀가
그저 욕망에 의한 육체적 관계를 자신을 파괴하면서도 지속하듯이,
몸은 그 거래에 너무나도 익숙해졌다.
분명 옛 그리스 철학자들은
철인 통치를 입에 침이 튀기며 주장했고,
이성이 욕망을 말처럼 통제한다 했었는데.
그를 보면 이 순간만큼은,
과연 이성이 욕망이라는 야생마를
통제할 수 있는가에 대한 회의감이 몰려온다.
쾌락에 뇌가 주물러져서 정상적인 판단이 안되는 걸까.
이성의 극치를 맛본 그들에게,
남자는 스스로 내뱉으면서도 어이없고
감당할 수 없는 조소가 올라온다.
그 조소는 비명에도 가까워 보인다.
이론만 빠삭한 것들, 생각만 주구장창 하면 뭐하는지.
그게 말처럼 됐으면,
이 세상이 어째서 이 모양일까?
말만 번지르르 하지.
그 말이 정작 세상을 구했나?
그리고 사람을 구했나?
세상의 죄악을 걷어냈나?
구한 적도 있었겠지.
인간의 깊은 사유에서 나오는 철학은,
우리에게 더 나은 삶을 향한 대안을 제시하기도 한다.
이성의 극한에서 통찰을 추구한
그들의 업적은 무시 못한다.
솔직히 냉철하지만, 이들의 대안은 맞는 말이다.
허나 그것이,
사람에게 닿았나?
마음에 울림과 회심을 가져왔나?
무너져 내린 자들을 살아가고 싶게 했나?
냉철하고 맞는 말만 했지,
그 안에 듣는 이를 안아주는 사랑은 있었나?
우는 사람에게 아무리 정교한 논리를
들이밀어 봤자, 휴지보다도 못한 법이다.
남자는 본인의 이성을 아득히 초월한 자들에게
주제넘은 소리를 일갈한다.
이성이 겁탈당한 쾌락의 꼭두각시가 내뱉는 헛소리는,
인간 본연의 연약함이 가장 돋보이는 순간이기도 하다.
아니면 신이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하여 준 자유의지를,
멋대로 사용하는 인간의 오만함이라고도 볼 수 있으려나.
자식을 사랑하기에
성장을 신뢰하기에,
간섭하지 않고 자유를 준 것이다.
강제적인 주입은 사랑이 될 수 없으니까.
어느 부모가 자식을 영원히 울타리 안에
가두어 놓는가?
부모의 믿음에 의한 자유로운 사랑의 독립을,
자식들은 배반으로 갚는 것이다.
아브라함의 간청에, 뜻을 여섯 번이나 번복하신
하나님의 전례 없는 무한한 사랑에도,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을 피치 못한 것을 보라.
성경에서 하나님이 뜻을 여섯 번이나 무르신 것은,
이 소돔과 고모라 이야기가 유일하다.
그 무한한 사랑을 걷어차고
결국 멸망에 이른 것을 보면,
인간은 이리도 오만하다.
어찌나 불쌍하고도 어리숙한 존재인가.
헤아릴 수 없는 사랑을 스스로 걷어차고,
사랑에서 나온 자유가
본인들이 일궈낸 자산이라 생각한다.
교만의 장송곡을 부르고,
방종의 춤을 추며,
멸망의 길로 들어선다.
쾌락과 욕망이, 그리고 인간이
본인 스스로 주도권을 잡으면 이리되는 것이다.
여하튼, 이성은 끊임없이 날뛰는 야생마의 고삐를, 팔뚝에 핏줄이 터질 듯 도드라질정도로 꽉 잡아챈다.
그러나,
담뱃재를 툭, 털듯 이성이 욕망의 몸부림에 바스러져 튕겨 나간다.
그리고 다시, 그의 손에서 잠깐의 불꽃놀이가 일어난다.
언젠가는 이 불이,
욕망의 쾌락에서 나오는 부산물이 아니라.
이성이 주체로써 타오르고,
도덕을 비추고,
욕망을 채찍질하며 다스릴 수 있을까?
인간의 연약함과 원죄는, 그것을 쉬이 허락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뜨거운 사랑의 불길만이.
인간의 구속할 수 없을 것 같은 오만함과 욕망.
그리고 그들의 죄와 허물을 구속하신다.
그리고, 진짜 변화를 가져온다.
그게 기적이자, 놀라운 사랑의 은혜일 것이다.
이성은 감성에게 질 수가 없을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랑은 이성이 하지 못하는 일을 해낸다.
이성은 대안을 줄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을 구원하고 감싸 안는 건
사랑이다.
혹자는 말한다.
사랑은 그저 육체적 본능에서 우러나오는
찌꺼기라고.
너무나도 불안정하고, 영원하지 않은데
이것이 힘이 될 수 있느냐고.
그러나, 사랑이 가져오는 변화를 보면
쉽사리 말할 수는 없다.
그렇기에 더 강력히 이야기하는 것 같다.
사랑은 이성을 넘어설 수 있는,
유일한 비이성적 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