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마침내 드디어 1승
공부든 다이어트든 운동이든 무언가 목표로 한 것을 이뤄내려고 할 때 정체기를 거치다가 한 번에 성장한다는 개념으로 ‘계단식 성장’이라는 단어를 쓴다. 그러니까 오늘 1을 했다고 1 만큼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 1을 해도 0, 오늘 1을 했는데 -1, 오늘 1 했는데 -3, 오늘 1 했는데 다시 0, 그러다가 어느 날 1을 했더니 +10 같이, 엎치락뒤치락하며 나아갈 기미가 보이지 않던 내 상태가 한 번에 수직상승하여 성장한다는 것이다.
계단식 성장에서 세로축이 성장일 때, 가로축에 놓여있어야 하는 것은 노력일 테다. 우리가 팀적으로 성장하기 위해서 들였던 노력 중 하나는, 경기가 끝난 뒤 팀원들이 함께 모여서 전체 경기 영상을 보며 코멘트하는 것이었다. 함께 경기 영상을 보면서 ‘방금 그 움직임 잘했어’, ‘이 경우에는 왼쪽으로 공을 차지 말고 오른쪽이나 뒤쪽으로 찼어야 했어’, ‘아무것도 안 보일 때 그 공간에 잘 나타났어’, ‘빈 공간으로 뛰어야 했어 ‘ 같이 서로의 부족한 점을 알려주고, 내가 모르는 점을 질문했다. 혼자 보면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함께 볼 때 더 많이 보였다. 어찌 보면 당연했다, 실력에 따라 보이는 것들이 훨씬 많으니까, 또 당장 운동장에서 판단하고 움직였을 때 보다 객관적으로 영상을 보면서 판단할 때 더 좋은 판단이 나오니까 말이다. 우리는 이 날을 일컬어 ‘코멘트데이’라고 불렀고, 소수가 참여해서 진행했던 것이 점점 더 많은 인원의 팀원이 참여하게 되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인데 코멘트데이를 위해서 주장은 우리 경기 영상을 보고 또 보고, 다시 또 봤다고 했다. 무엇이 단점인지 알아차리기 위해서 시간과 에너지를 쏟아부은거다. 하나 더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은, 경기 후 이렇게 영상 분석을 하는 것이 굉장히 드문 일이라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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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초, 어느덧 하반기의 두 번째 경기. 현재 리그 1위를 달리고 있는 팀과의 경기다. 경기 시작 전 단체 사진을 찍는데, 뭐지. 다들 기세가 좋다. 기합이 바짝 들어있다. 눈이 이글이글 타오른다. 이 아이들이 여름의 더위를 그대로 삼켜서 마음속에 심은 걸까. 너희 뭐야, 뭔데. 왜 다들 나랑 같은 마음인 건데.
1 쿼터 상대팀의 저돌적인 공격으로 아슬아슬한 상황을 맞더니, 2 쿼터에 선제골을 먹혔다. 하지만 오프사이드 반칙으로 골은 취소되었고, 골키퍼로 서있던 나는 몰래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켰다. 골대를 부여잡고 고개를 떨궜던 우리 수비들도 분명 나와 같은 마음이었다. 오전에 비가 내렸던 터라 살짝 미끄러운 운동장에서 상대팀 선수들이 어려워하는 틈을 탄 3 쿼터에 1:0으로 주장의 골이 터졌다. 이어진 4 쿼터에 우리는 수비적으로 물리지 않고, 더욱 세게 공격으로 몰아붙였다. 3 쿼터와 4 쿼터에 골키퍼로 섰던 친구는 킥이 좋아서 우리는 우리 진영으로 내려앉지 않았다. 나는 처음으로 왼쪽 사이드에서 크로스를 올려보았다. 골대 앞에서 항상 한 수 접던 친구는 논스톱으로 슈팅을 때렸다. 공이 오면 소리 지르며 무서워했던 친구는 가슴 트래핑을 기가 막히게 해냈다. 가운데에서 미드필더를 보는 친구는 많은 움직임으로 공간을 모두 커버했다. 윙에 서있던 친구들은 2:4:2 포메이션을 소화하느라 엄청나게 뛰어댔다. 경기 종료 휘슬이 부는 순간까지 아무도 긴장을 놓지 않았다. ‘경기 끝났습니다’라는 마이크 소리와 함께 휘슬이 불렸고, 나는 눈물을 흘렸다. 모두 달려왔다. 드디어 승리였다. 리그전을 시작하고 9개월 만에 맞이한 첫 승리였다. 음악소리가 나오던 스피커에서 퀸(Queen)의 ‘We are the champions’가 흘러나왔다. 우리는 동그랗게 서로를 끌어안고 환호했다.
어쩌다가 이렇게 축구에 빠졌을까. 왜 이렇게 진심이 되었을까. 다른 운동이었어도 가능했을까. 이 친구들과 같이 한 게 아니었더라도 같은 마음이 들었을까. 아니, 축구가 뭐길래 이런 마음까지 들게 되는 걸까.
오로지 축구를 하기 위해서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 모인 사람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본다. 삶에는, 서로 모르는 타인들이, 순수하게, 어떤 하나의 목표를 위해서, 같은 시공간에 모이는 일은, 거의 없다.
돈을 벌면서 하는 일이 아니고 돈 내면서 하는 일, 시간을 버는 일이 아니라 시간을 쓰면서 하는 일, 내 노력과 에너지를 쓰면서 하는 일. 누군가는 쓸데없는 일에 낭비가 많다고 할 수도 있는 일. 그렇기에 지금 이 순간이 더 소중해지는 일. 하지만 지금 이 일도 지나고 나면 없다. 지나고 나면 또 없어. 그러니까 집중해야 해. 소중한 순간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해. 다른 사람들의 눈을 신경 쓸 겨를이 없다. 관심 없는 사람들의 볼멘소리에 귀 기울일 시간도 없다. 내가 맞닥뜨린 이 상황을, 아니 어쩌면 내가 그토록 꿈꿔왔을 이 시간들을 제대로 만끽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더욱 진심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